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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5시간 뒤 (1)
202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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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를 진정시킨 것은 때마침 위층에서 내려온 유빈이었다.

“어, 어, 보안관! 왜 그래? 뭐야? 좀 진정해.”

유빈은 황급하게 공사장을 가로질러 달려와 보안관과 신입을 떼어놓는다. 쿨럭! 쿨럭! 보안관의 억센 손아귀에서 겨우 풀려난 신입이 캑캑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동안 유빈이 말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른 데로 가서 열 좀 식혀. 이러다간 너 이 동네 경찰서에 단골 손님되겠다. 자, 자, 나랑 바꾸자. 내가 이거 나를게. 보안관, 넌 3층으로 가.”

“……괜찮아.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이제 진정됐어.”

보안관이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유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번 주 토요일 날 술 마시다 시비가 붙었을 때에도 딱 그렇게 말한 다음에 곧바로 주먹을 날렸었지. 그래서 우리 셋 다 경찰서에서 주말을 보냈고. 그러니까 이번엔 내 말 들어.”

보안관은 대꾸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유빈의 말을 따랐다.

“알았어. 다치지 않게 조심해. 저 새끼 믿지 말고.”

3층으로 올라가면서 보안관이 한 번 더 충고를 했다. 유빈은 알겠다며 손을 들어 보인다. 보안관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멱살을 잡혀 빨개진 목을 쓰다듬으면서 신입이 투덜거렸다.

“컥! 컥! 어흐, 목이야. 저 자식 뭐야? 깡패냐?”

“후후, 놀랐지? 근데 나쁜 애는 아니야. 가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기는 하지만.”

유빈은 선하게 웃는 낯으로 신입을 달랬다. 신입이 물었다.

“쟤 이름이 안관이야? 근데 ‘보’ 씨라는 성도 있어? 우리나라에?”

“이름일 리가 있나. 그냥 별명이야.”

“아, 그래? 보안관이라 이거지? 소싯적에 주먹 좀 쓰셨다고 자랑하는 거야? 쳇, 별명 진짜 존나 유치하다. 그러면 너희는 친구 사이?”

신입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빈정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빈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선선히 대답을 해주며 철조망 더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저 자식까지 포함해서 친구들 네 명이 같이 일했는데, 한 놈은 군대 갔고, 지금은 셋이야.”

“헐! 친구 네 명이 전부 다 대학을 못 가고 노가다를 뛰는 거야? 너희 어쩌려고 그러냐? 그 나이에 벌써 인생 포기하는 건 좀 이르지 않냐?”

유빈이 바쁘게 몸을 놀리는 동안 신입은 대충 하는 시늉만 하면서 밉살스러운 소리들을 내뱉어 댔다. 그래도 유빈은 별로 화를 내는 기색이 없다.

“대학을 못 갔다……. 뭐,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우린 애초에 갈 마음이 없었거든. 그래서 시험도 보지 않았고.”

“다들 어지간히 가난한가 봐?”

“맞아. 거짓말로라도 넉넉하다고는 못하지. 삼식이는 좀 이야기가 다르긴 한데……. 아, 거기 철조망 말이야, 그렇게 아무렇게나 던지면 안 돼. 서로 얽히지 않도록 줄을 맞춰 세워야 나중에 풀어서 쓰기도 편하거든. 자, 이렇게 하는 거야.”

유빈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신입은 마지못해 그 흉내를 내면서 보안관의 흠구덕을 한다.

“얼마나 오래된 친구 사이인지 모르지만, 넌 좀 괜찮은 애 같으니까 내가 충고 하나 해줄게. 저렇게 주먹 쓰기 좋아하는 새끼는 가까이하지 마라. 저 지랄 하다가 나중에 인생 골 아파진 새끼 여럿 봤다.”

그러자 지금까지 마냥 착한 미소를 짓던 유빈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그래? 그럼 나도 충고를 하나 해주지. 그렇게 모르는 사람 험담할 시간 있으면 케블라 장갑이나 껴. 맨손으로 레이저 와이어 만지다가 손가락 날아간 다음엔 울고불고 해봐야 소용없으니까. 그리고 보안관한테 누군가 맞고 있으면 무조건 맞는 놈이 나쁜 놈이라고 보면 돼. 쟤는 잘못된 건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니까.”

면박을 당한 신입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어…… 헤헤, 설마 진짜로 화내는 거야? 야, 나는 그냥 농담해 본 거야. 근데 이 장갑은 왜 끼라는 거야? 이까짓 게 무슨 보호가 되기는 해?”

잠시 경멸하는 눈으로 신입을 바라보던 유빈도 곧 표정을 바꾸며 대답했다.

“그래. 이게 이래 봬도 칼날이나 유리 조각도 막아주거든. 아침에 일 시작할 때 나눠 주면서 설명해 줬을 텐데.”

흐음, 이게 그렇단 말이지? 신입은 혼잣말을 하면서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목 길이의 케블라 장갑을 꺼냈다. 뭉그적거리는 신입에게 유빈이 재촉을 했다.

“빨리 껴. 그래야 너도 안 다치고 일도 빨리 끝낼 수 있으니까. 하루 종일 이것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잖아.”

다그치는 유빈에게 달라붙으며 신입이 친한 척을 했다.

“그게 있잖아, 내가 꼭 받아야 할 연락이 있는데…… 이게 통 안 와서 자꾸 전화를 확인하느라고 장갑을 벗게 되네. 여기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지나 봐. 아까부터 거의 먹통이야.”

난데없이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신형 스마트폰을 꺼내 보이는 신입으로부터 벗어나서 유빈이 말했다.

“내가 너라면 그거 보관함에 넣어둘 텐데. 여기 공사장이야. 그렇게 넋 놓고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다가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나도 그 정도야 알지. 그런데 여자애들이라 금방 전화를 안 받으면 질투를 하고 생난리를 치거든. ‘오빠, 딴 여자 만났지?’ 이러면서. 야, 너는 모르겠지만, 잘생긴 대학생이라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 인기가 있다는 게 때로는 피곤해.”

……잘생겼다고? 이놈은 거울이 없나? 한꺼번에 너무 재수 없는 말을 많이 들은 나머지 피로해진 유빈은 잘난 체하며 떠들어 대는 신입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 시선을 오해한 신입이 화색을 띠며 유빈에게 말했다.

“이런, 이런! 너 부러웠구나? 뭐, 앞으로 네가 잘만 하면 미팅까지 시켜줄 수도 있어. 내가 여자 대학생들 많이 알거든. 봐봐, 얘는 나 따라다니는 애고, 얘들은 걔 친구인데…… 예쁘지? 응? 부럽냐?”

워낙 눈앞에 바짝 가져다대는 바람에 유빈은 신입이 자랑하는 여자 친구들의 사진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신입이 물었다.

“어때?”

못생겼다……. 애초에 신입 생긴 꼴을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놈이 자랑삼아 내미는 여자들 사진은 정말 가관이었다. 기가 막힌 유빈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진 걸 보고 신입은 또 신이 나서 떠벌여 대기 시작했다.

“거 봐, 죽이지? 대학 가면 이런 애들 주변에 깔렸다니까? 난 맨날 이런 애들이랑 밥 먹고 같이 다녀. 누구 소개해 줄까? 얘? 얘? 아, 얘는 욕심내지 마라. 내 여자 친구거든.”

굳이 나쁜 말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어서 유빈은 그냥 손사래를 쳤다.

“저기, 사양할래. 빨리 일 끝내자.”

“왜? 아, 네가 고졸이라서 대학생이랑은 안 어울릴 것 같아? 하긴…… 그런 것도 좀 있지.”

하여간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놈이다. 이 같잖은 새끼를 몇 대 줘 팬 다음, 네 전화기에 있는 여자들 전부 다 더럽게 못생겼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보안관과 다를 게 뭔가. 유빈은 꾹 참기로 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바로 그때, 삼식이가 지나가다가 고개를 숙여 사진을 보고는 관심을 보였다.

“우와, 엄청 예쁘다. 장난 아닌데?”

멍청한 새끼……. 조각보다도 아름다운 삼식이의 얼굴을 보며 유빈은 분노와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그렇게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폭탄들에게만 꽂히는 걸까?

‘어째서 신은 저 새끼에게 저런 외모를 주시고 또 저런 눈깔을 주셨단 말인가.’

187센티의 키, 호리호리한 몸매, 결이 고운 갈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찰랑거리고, 무엇보다도 얼굴이 정말 기가 막히다. 구멍 난 면 티 쪼가리에 낡은 청바지만 입고 있는데도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겉모습만 따진다면 삼식이는 이 세상 0.0001퍼센트의 남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겐 몇 가지 치명적 결함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여자 보는 눈이 지극히 낮다는 점이 특히 큰 문제였다.

“유빈아, 배고프지? 커피 한 잔 마시고 해.”

“지금 일이 너무 밀려서 그럴 여유가 없는데…….”

“커피 마시고 내가 도와줄 테니까 그건 걱정 말고. 너무 허기지기 전에 이거라도 좀 마셔둬. 자, 신입도 한 잔 하셔.”

유빈과 신입에게 캔 커피를 건넨 뒤, 삼식이는 바닥에 앉아 자신의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먼 하늘을 보고 혼잣말을 했다.

“오늘 헬리콥터 엄청 날아다닌다. 국군의 날인가?”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수송 헬기 다섯 대가 편대를 이루어 남쪽으로 날아간다. 유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이 7월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민방위 훈련이나 뭐, 그런 거겠지.”

“민방위 훈련?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네. 동네 쪽에서 사이렌 소리도 간간이 들리고 그러는 걸 보면……. 그건 그렇고, 배고프다.”

삼식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유빈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 진상 신입에게 시달리느라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게. 지금 점심 먹을 시간 지났지?”

이마의 땀을 훔치며 유빈이 물었다.

“응. 아마 30분도 더 지났을걸?”

“뭐지? 황 씨 아저씨네 새참 사러 간 지가 언젠데…….”

배달 짜장면을 물리도록 먹은 다음부터 이 공사장에서는 11시가 좀 지나면 두 명씩 당번을 두어 점심과 새참거리를 사 온다.

짓고 있는 건물이 워낙 외진 곳에 뚝 떨어져 있어서 그것도 꽤 귀찮은 일이었다.

전용 함바집을 두면 편할 텐데, 요즘은 일하는 사람이 열 명도 안 되니 그나마도 어렵다. 오늘은 황 씨 아저씨 일행이 다녀올 차례였다.

“보나마나지. 엊그제 월급 받았겠다, 날도 이렇게 푹푹 찌겠다. 안마방이나 그런 데 가서 재미 좀 보는 중일 거야. 그러고서는 허겁지겁 밥을 사 온 다음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이놈의 동네는 차가 너무 막혀서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고.”

“대낮부터? 아니, 낮도 아니야. 열두 시에 그런 데가 열기나 하냐?”

유빈이 어처구니없어하자 삼식이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빈 군, 아직 어리군. 낮에 가면 말이야, 갓 잠에서 깬 여자의 그날 첫 남자가 될 수 있거든. 한 여자에게 첫 남자가 된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법이지.”

“뭔 등신 같은 소리야, 이 삼식이 같은 새끼야!”

유빈이 발끈하자 삼식이가 두 팔을 벌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왜 대낮부터 그런 델 가느냐고 물었을 때 황 씨 아저씨가 나에게 해줬던 말이니까.”

두 친구가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을 때, 신입이 홀린 것처럼 삼식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근데, 이분은 뭐하시는 분…….”

유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뭐긴, 얘 복장 보면 모르겠어? 너랑 똑같이 노가다 판에 돈 벌러 온 애지. 장갑 끼고, 목에 수건 두르고, 먼지가 꼬질꼬질하잖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신입이 물었다.

“아, 아니……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모델로 나서면 떼돈을 벌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삼식이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뿜으며 웃었다.

“풉! 크큭, 어이쿠! 내참, 모델은 아무나 하냐? 모델이 되려면 얼마나 멋있어야 하는지 모르나 보네.”

삼식이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건 듣고 있는 쪽이다. 신입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다급해져서 설득을 시작했다.

“아, 아니, 그쪽 무지하게 잘생겼어요. 길 다니다 보면 누가 명함 주고 가거나 한 적 없었어요?”

삼식이가 턱을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명함이라…….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길에서 명함도 참 징그럽게 많이 받았었지. 그거 주는 새끼들 하는 이야기도 늘 뻔해. 연예인 할 마음 있으면 찾아오라고.”

“그, 그런데 왜 안 갔어요? 남들은 그런 기회를 못 만나서 안달인데.”

“허, 이 사람 참 큰일 날 사람이네.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 순진하게 그런 데 찾아가면 곧바로 바닷가로 끌려가서 설탕 밭 노예가 되는 거라고. 돈도 못 받고 평생 설탕만 캐다가 죽는 거지.”

말을 마친 삼식이는 커피를 마저 쭉 들이켠 후, 손을 툭툭, 털고 철조망 더미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무슨 소리인가 알아듣지 못해 혼란스러워진 신입이 입을 뻐끔거렸다. 삼식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아마 염전이었을 거다.

근데 그게 저 조막만 한 머릿속에서 ‘소금 = 하얀 가루 = 설탕’, 이 순서로 바뀌어 설탕 밭이 된 거다.

삼식이에 대해서는 이미 달관의 경지에 오른 유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은 신입의 입을 막았다.

“됐어, 됐어. 안타까운 네 마음이야 알겠는데, 얼굴에 속지 말고 그냥 포기해. 얘는 그냥 이런 애야. 그리고 얘는 뭐든지 마이 페이스라서 모델이든 배우든 제약이 많은 건 아무것도 못해.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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