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피와 좀비의 시간 (4)
(15/449)
15. 피와 좀비의 시간 (4)
(15/449)
15. 피와 좀비의 시간 (4)
2021.09.15.
민구는 혀를 찼다. 조금 전 물속에 던져 버린 부쳐 나이프가 너무도 아쉬웠다. 다리를 끌고 뒷걸음질을 치면서 민구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궁리했다.
일곱이나 되는 괴물을 모두 처치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뭔가 무기를 찾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사방엔 그저 온통 물, 물뿐이었다.
‘물?’
쓸 만한 전략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민구는 방향을 바꿔 수조가 있는 쪽을 향해 뛰었다. 두 개의 수조 사이에 놓인 좁은 복도에 이르자 민구는 발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달려오는 괴물들과의 거리는 이제 불과 5미터도 남지 않았다. 민구의 마음속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쉼 없이 질문을 던져 댔다.
만약 저것들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머리가 좋다면 어떡하지? 만약 저것들이 너를 따라 뛰어들지 않으면? 만약…… 그 모든 불안한 의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민구에게는 별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라아아악!
맨 앞에 선 괴물의 내뻗은 팔이 막 그의 몸에 닿으려 할 때, 민구는 왼편의 수조로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따라와라, 개새끼들아.’
그가 마음속으로 내뱉은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일곱 마리의 괴물은 일제히 수조를 향해 몸을 던졌다.
풍덩! 풍덩! 풍덩!
괴물들이 뛰어드는 소리가 물을 타고 꿈속처럼 둔하게 울리는 동안 민구는 잠수한 상태로 돌핀킥을 했다.
불안함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고개를 똑바로 한 채 허리와 발을 놀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수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민구는 숨이 차오르기 직전이 돼서야 수조 반대편의 사다리에 팔을 걸칠 수 있었다. 그는 오른팔에 온몸의 체중을 싣고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하아, 하아…….”
땅 위로 올라온 민구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수조 속의 괴물들을 바라봤다. 그가 예상한 대로 이 괴물들은 수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물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다.
반쯤 잠긴 채 개헤엄을 치는 것처럼 팔과 다리를 모두 휘젓는 괴물들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꾸르르륵.
벌려진 괴물들의 입으로 계속해서 물이 들어가는데도 놈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로지 민구와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열심히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무거운 장비를 잔뜩 달고 있던 경찰들보다 나머지 괴물들이 조금은 더 빨랐다.
“이제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벌어둔 약간의 시간 동안 그냥 달아날까 싶기도 했지만, 이놈들이 땅 위로 올라선다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속도에서 우위에 있을 때 처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민구는 양말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젖은 흙을 담기 시작했다.
흙을 삼분의 일쯤 채운 양말 끝을 밟고 한 손으로 꽉 묶은 뒤 가볍게 돌리며 민구가 주문했다.
“천천히 하나씩 와라.”
민구는 서두르지 않고 놈들의 몸이 반쯤 물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차례로 머리를 갈겼다.
양말 철퇴의 신축성은 정면에서 내려치면서도 놈들의 뒤통수를 노려 타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머리가 터진 괴물들은 녹색의 체액을 피와 함께 흘리면서 물에 둥둥 떠다녔다.
일곱 마리의 괴물 중 가장 마지막으로 사다리에 팔을 걸친 놈은 만배파 조직원이었다. 녀석은 코가 뜯겨 나가고 없었다.
“응? 이놈…….”
괴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놈이 어디서 코를 잃었는지 기억이 났다.
아까 칠성이가 괴물에게 울대를 물어 뜯겨 죽었을 때, 그다음으로 코를 물렸던 놈이다. 수직으로 양말을 휘둘러 녀석의 뒤통수를 박살 낸 다음, 민구는 피로 얼룩진 양말을 던져 버렸다.
수돗물이 될 물을 엉망으로 만들기는 했어도……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뭐, 지들도 눈깔로 볼 테니까 알아서 다시 소독하겠지.”
돌아서서 정수장을 빠져나오는 민구의 걸음은 꽤나 다급했다. 조금 전의 코 없는 녀석 때문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그를 서두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그는 괴물에게 물려 죽은 사람만이 괴물로 변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모양이다. 코를 물어 뜯겼던 녀석은 그때 분명히 죽지 않았었다.
‘만약에 단순히 물렸던 놈들도 괴물이 된다면 도대체…….’
민구는 오늘 밤 괴물들에게 살점을 내준 녀석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열 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 최성호도 지금쯤이라면 괴물로 변하기에 충분할 시간이 지났다. 한시라도 빨리 육만배와 부하들에게 이런 사실들을 알려야 한다.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키릭! 키리익!
부우웅.
강서 정수장을 나선 민구는 문이 열린 채 세워져 있던 경찰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타고 이동할 만한 수단이 그것밖에 없었다. 어서 열려 있는 가게나 아무라도 전화를 가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저 안에 있는 건 욕심내지 마요. 저건 너무 위험해……. 당신들이 컨트롤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문이 열린 채 길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트럭을 지나칠 때, 아까 안경잡이가 했던 경고가 자꾸 떠올라서 민구의 운전은 한층 더 거칠어졌다.
끼이이익.
민구가 탄 경찰차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빠르게 코너를 빠져나갔다.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여름 아침인데도 여전히 거리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
이등병의 편지
보고 싶은 내 친구, 유빈아.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낸다.
우리 넷은 언제나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국가의 신성한 부름을 받아 너희와 떨어져 지낸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다 되어가는구나. 7월인데도 이곳은 아침저녁엔 아직 서늘해. 강원도는 원래 그렇대.
다른 애들 어떻게 지내는지 내가 맞춰볼게. 보안관은 여전히 성질 건드리는 놈들마다 다 두들겨 패고 다니겠지. 삼식이는 어디서 지지리도 못난 여자애들만 골라 놀아나고 있겠지.
훗, 철없는 놈들. 유빈이 네가 그놈들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일지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런데 왜 그때가 이렇게 그리워지는 거지?
그간 나는 체계적인 훈련과 훌륭한 후생 덕에 더 건강해지고 강인해졌단다.
이렇게 좋은 곳인 줄도 모르고 입영 전야에 너희와 함께 술에 쩔어서 가기 싫다고 울던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대한민국 군대 정말 좋아. 너희도 꼭 와라, 빨리 와라……는 개뿔.
하아, 진짜…… 앞으로 450일 남았다. 눈앞이 캄캄하다.
여기 오니까 사회에 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던 것들까지 미치도록 그리워.
특히 치킨! 치킨이랑 시원한 맥주! 너무 먹고 싶어. 여기도 닭고기를 주긴 하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맛이 나오는 건지…… 진짜 말을 말아야지.
짜장면이랑 탕수육이랑 냉면도 먹고 싶어. 족발이랑 소주 한잔하고 싶다. 아, 먹는 이야기 그만 써야겠다. 괜히 침만 고인다. 씨발, 휴가 나가기만 해봐. 초코파이 한 박스 사 가지고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그리고…… 쪽팔리지만 여자가 너무 그리워. 좋아하던 여자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너무 오래전이어서 이제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초등학교 동창 여자애들도 다 한 번씩 생각나.
하다못해 삼식이가 꼬셔와서 우리가 질겁하던 폭탄들까지도 보고 싶어. 지금 이 자리에 걔네들이 있으면 난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결혼해 버릴지도 몰라.
아, 써놓고 보니 내가 미쳐 가는 건 아닌가 싶다. 하여간 여자 생각이 계속 나. 유빈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밝히는 스타일이 아니잖아. 그치?
찌질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놨지만, 좋은 소식도 있어. 나 특등 사수 됐다! 휘장도 있어. 나중에 휴가 나가면 보여줄게. 너도 잘 알겠지만, 난 내가 뭔가를 특출 나게 잘할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운동은 했다 하면 보안관한테 깨지고, 얼굴은 삼식이가 있어서 명함도 못 내밀고, 물론 공부도 중간보다 아래였지. 근데 있지, 여기 오니까 내가 정말 잘하는 게 있더라고! 그게 사격일 줄이야!
처음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쐈는데, 옆에서 자꾸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기분이 묘해.
어제는 대대장님이 직접 지켜보시는 앞에서 250미터 전방 표적지에 20발 다 꽂아 넣었어. 야간에! (구라 아님) 난 그냥 느낌으로 쏘는 거니까 잘 모르지만, 이게 엄청난 거래.
대대장님이 나한테 뭐라고 하셨느냐면, 9월에 있을 사단 사격 대회에서 1등만 하면 앞으로 군 생활 꿀 빨게 해주시겠대. 아, 1등하고 싶다.
한참 써놓고 보니까 내 이야기만 잔뜩이네. 뭐, 너희는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더운데 일하느라 너무 무리하지 말고, 보안관 새끼 성질 좀 죽이라고 하고, 삼식이한테도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 줘.
더 자세한 이야기는 곧 있을 휴가 때 만나서 하자. 벌써부터 그때가 너무 기다려진다. 유빈아, 정말 보고 싶다.
그럼 이만 안녕.
강원도 화천읍 노신로 사서함 308―15―9호
제3XXX―3XX 부대, 5중대
이병 박진우
P.S. 1. 보내준 핑크 펀치 화보집이랑 CD 잘 받았어. 제니 진짜 죽음이더라. 테라파인 너를 배신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군대에 오니까 청순보다 섹시가 훨씬 더 훌륭한 가치라는 걸 깨닫게 됐어.
P.S. 2. 혹시 공사 현장 옮기게 되면 미리 알려줘. 엉뚱한 데로 편지 보내기 싫으니까.
***
점심 먹을 때가 된 걸까? 보안관은 슬슬 배가 고파졌다.
오늘은 스트레스도 적잖이 받았기 때문에,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달콤한 음식이 먹고 싶다. 아침도 부실하게 먹었다. 삼식이, 그 띨띨한 새끼 때문이다.
오늘 아침 일곱 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세 친구는 현장 근처의 단골 국밥집에서 해장국을 먹고 있었다.
노가다를 뛰려면 아침밥을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 요즘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엔 특히 더 그렇다.
“보안관! 유빈아! 이것 좀 봐봐! 오늘 찍은 거래!”
막 두어 숟갈을 뜰 때였다. 삼식이가 핸드폰을 얼굴에 들이대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SNS를 통해 받은 영상의 배경은 녹사평역 거리였다.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경리단길에서 건물 신축 공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눈에 익은 곳이다.
영상의 내용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팔과 얼굴, 목에 상처를 입고 피를 뚝뚝 흘리는 사람들이 지하철 역 밖으로 뛰어나온다.
부상자들 중에는 미군으로 보이는 덩치 큰 외국인들도 섞여 있고, 개중에는 내장을 덜렁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까지 보인다. 폭주하던 자동차가 고압 배전반을 들이받자 스파크가 튀고 자동차는 곧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피투성이가 된 여러 명의 미군들이 미군 부대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롸아아아― 어디선가 포효가 울리자 카메라는 급하게 그 방향을 비춘다.
달아나던 남자를 붙잡은 피투성이의 여자가 남자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는다. 찌이익, 남자의 목에서 분수처럼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 그만 찍어! 가자, 씨발!
남자의 목소리.
― 하아, 하아, 뭐지? 자기야, 이거 뭐야?
당황해하는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영상은 끝났다. 각도로 보아 누군가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찍은 것 같다. 선지가 듬뿍 들어간 해장국을 먹으면서 볼만한 화면은 절대 아니었다.
“치워, 이 새끼야. 밥 먹는데 왜 이딴 걸…….”
보안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밀어냈다.
“밥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사람 잡아먹는 거 봤지? 그리고 그…… 내장 튀어나온 사람이 뛰어다니는 것도…… 이거 진짜라는데, 믿어도 돼?”
삼식이는 여전히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유빈이 단호하게 말했다.
“야, 믿을 걸 믿어. 그런 거 다 노이즈 마케팅이야. 광고라고.”
“광고?”
“그래. 여름이잖냐. 그러니까 공포 영화 광고하는 거야. 너 같은 새끼가 ‘우와, 진짜인가 보다’ 하고 계속 검색하면 검색어 순위 1등 하고, 그러면 또 화제가 될 테니까. 걔네 수법 뻔하지.”
“영화라고? 이게? 너무 리얼한데? 이 내장 봐봐.”
삼식이는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두 사람의 얼굴에 들이댔다. 겨우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고 있던 보안관은 선지와 밥알을 튕기며 버럭 성질을 냈다.
“야이 씨, 너나 보라고! 그런 거는!”
그걸로 아침 식사는 끝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더 열 받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전화도 안 돼, 인터넷도 안 터져……. 뭐, 그냥 먹통이네. 이래서 사람은 변두리에 살면 안 돼요. 쯧, 여기가 말이 서울이지. 에이 씨, 오늘 중요한 연락 올 거 있는데 이게 뭐야? 아, 그리고 너 그거 아냐? 오늘 아침에 여기저기서 대형사고 엄청 터졌대. 뭔 일이었는지 좀 보려고 해도 이건 뭐……. 썅, 좀 터져라, 터져.”
보안관을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게 만들었던 장본인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신입 녀석이다.
신입은 아예 일손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 스마트폰을 조물락거리며 연신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껄여 댄다.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며 오늘 처음 공사장을 찾아온 이놈. 어째 영 꽝이다. 가뜩이나 날도 더워 짜증스러운데, 거슬리지 않는 구석이 없다.
성질대로 하면 벌써 턱주가리를 돌려도 여러 번 돌려 버렸을 놈이지만, 데리고 온 작업반장의 얼굴을 봐서 참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참을성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걸 느끼며 보안관은 입을 뗐다.
“야, 신입!”
“으, 응?”
여전히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신입이 대답했다.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 일하러 왔으면 전화기 집어넣고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신입은 그리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넣고 멋쩍게 웃는다.
“에이, 왜 그래, 친구. 계속 바쁘게 일하다가 잠깐 쉬는 건데.”
“뭘 잠깐이야. 하루 종일 빈둥거리기만 하면서. 등짐 좀 지라고 하니까 허리가 안 좋네, 계단이 시원찮아서 무섭네, 툴툴대서 결국 이거라도 하라는 거잖아.”
“야, 좀 봐줘라. 난 너네랑은 다르잖냐. 나는 대학생이라서 이런 거 익숙하지 않다고.”
이 자식은 하나같이 다 이런 식이다.
처음 인사할 때부터 ‘난 대학 다녀. 이건 그냥 경험 쌓아보려고 하는 거야’ 따위의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하더니, 이젠 아주 그게 좋은 핑계가 됐다. 보안관은 화를 삭이면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너 대학 다니는 것도 알겠고, 곱게 자랐다는 것도 알겠어.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거 안 쳐줘. 여기는 하루 종일 빡세게 몸을 움직여야 10만 원을 주는 데라고. 내 말 알아먹었으면 빨리 움직여. 서로 짜증 날 일은 좀 삼가자. 응?”
“알았어, 알았어. 참, 너 잔소리 어지간히 한다. 근데 어차피 누가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오래하면 할수록 서로 이득 아니냐? 몸도 편하고, 돈은 따박따박 들어오고.”
“너는 며칠 농땡이 치고 가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우리는 네가 안 해서 밀린 일까지 다 해야 돼. 잔소리 그만하고, 이거 들어서 날라. 이거 오늘 내로 옮겨둬야 해. 괜히 여기 뒀다가 다치는 사람 나오면 골치 아파진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보안관은 돌돌 말린 채 바닥에 쌓여 있는 레이저 와이어 더미 두 개를 들어 올렸다. 레이저 와이어라고 하니까 거창한 것 같지만, 말하자면 날이 달린 신형 가시 철망이다.
“우와, 이거 날카로워서 무섭다. 그리고 무겁기는 왜 이렇게 무거워? 으어! 아, 씨발. 뭐야? 찔렸어! 아야, 아야!”
신입은 레이저 와이어 더미를 들다 말고 비명을 지르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철망은 땅에 한 번 부딪쳤다가 보안관 쪽으로 튀었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면도날들이 뒤돌아서서 걷고 있던 보안관의 다리를 향해 빙글빙글 돌면서 굴러갔다.
“음?”
이상한 기미를 느낀 보안관이 돌아보고 재빨리 옆으로 뛰어 피했다. 데굴데굴 구르던 철조망 더미는 벽에 부딪친 뒤에야 멈춰 섰다. 날이 선 철조망 가시들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인다.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다리에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깜짝 놀라 한숨을 쉬고 있는 보안관의 눈에 멋쩍게 히죽거리는 신입의 얼굴이 들어왔다. 거기까지였다, 그의 인내심은.
“야이, 새끼야! 다치는 사람 안 나오게 조심하라고 했지!”
보안관은 신입의 멱살을 잡고 벽에 몰아세웠다.
“그, 그래서 미…… 미안하다고 했잖아, 큭, 이것 좀 놔줘. 숨 막혀. 캑.”
헤헤 웃고 있다가 기가 콱 질린 신입은 하지도 않던 사과를 했다며 거짓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언제? 난 네가 미안하다고 하는 소리 못 들었어. 지금 그거, 나니까 피한 거지,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다리가 작살나서 병원에 실려 갈 일이야. 이 멍청한 새끼야.”
“컥, 안 다쳤으니까 된 거잖아. 그리고 나야말로 다쳤어. 이, 이거 봐. 손이 찢어졌다고. 부상당한 사람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
정말인가 싶어 신입의 손을 돌아봤더니 3밀.리. 정도 베인 가벼운 상처였다.
피도 그저 찔끔 솟았을 뿐이다. 남의 다리를 걸레처럼 찢어놓을 뻔한 주제에 그런 가벼운 상처에 엄살을 떠는 꼴이 그를 더 열 받게 했다.
“이게 부상이라고? 장난 치냐? 너 정말 오늘 부상이 뭔지 좀 알게 해줄까?”
보안관이 오른 주먹을 들어 꽉 쥐자 굵은 뼈마디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난다. 당황한 신입이 뭐라고 한 번만 더 어설픈 변명을 했다간 곧바로 날아갈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