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피와 좀비의 시간 (1)
(12/449)
12. 피와 좀비의 시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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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와 좀비의 시간 (1)
2021.09.12.
강서 정수장 숙직실에서 잠들어 있던 임수정은 다급하게 울리는 경보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삐잉! 삐잉!
책상 위에 붙은 빨간색 조명이 번쩍거리면서 계속 높은 경고음을 연발한다.
아직 잠을 다 떨쳐 버리지 못한 임수정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경보 스위치를 끄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몇 차례 비볐다. 붉은 LED 시계가 표시하는 시간은 새벽 3시 반이 막 지나 있었다.
‘이 새벽에 경보라니…….’
이곳에서 근무한 지 올해로 4년이 되었지만, 자신이 숙직을 설 때 오늘처럼 경보가 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임수정은 웃옷을 걸치는 것도 잊고, 잠들 때 입었던 탱크톱과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한 층 아래의 경비실로 뛰어 내려갔다.
세 명이 있어야 할 경비실에는 야간 경비원 한 사람만이 서서 눈가를 찌푸리며 빗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창밖을 노려보고 있었다.
“경보 듣고 내려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정수 과정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숨을 헐떡이며 임수정이 물었다. 경비원은 임수정을 한눈으로 힐끔거리면서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아, 예. 그건 아니고요, 정문 쪽입니다. 누가 정문에 차를 들이받았는가 봐요. 문이 부서지면서 거기 붙어 있는 센서가 작동을 해서 경보가 울린 겁니다. 지금 차 주인 잡으러 우리 경비원들이 출동했어요.”
임수정은 경비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수장 건물로부터 40여 미터 떨어진 정문이 기우뚱하게 기울어 있고, 웬 사내 하나가 차 지붕을 밟고 힘겹게 철창문을 넘어서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 바로 아래에서는 우의도 걸치지 못한 경비원 둘이 손전등으로 사내를 비추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머, 저 사람 웬일이야……. 이거, 무슨 테러나 그런 걸까요?”
임수정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경비원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한국에 테러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테러하는 놈이 저렇게 대놓고 정문에다가 차를 들이받겠습니까? 딱 보면 음주 운전하다가 사고를 낸 게 분명한데, 뭐한다고 저기는 저렇게 기어 올라오느라고 애를 쓰는지 참. 술 먹은 개라는 말이 딱이에요……. 뭐, 잡아와 보면 어떤 놈인지 알겠죠.”
“하여튼 정수 과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니까 다행이네요.”
“예,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큰일은 아닙니다.”
긴장이 풀린 임수정의 입에서 하품이 새어 나오는 동안 정문의 사내는 결국 비틀거리며 힘겹게 철문을 넘어서서 정수장 내부로 뛰어내렸다.
착지를 제대로 못 해 빗물이 가득 고인 땅 위를 대굴대굴 구르는 사내를 보면서 임수정은 약간의 동정을 하기도 했다.
‘정말 술에 취해 있나 보다…….’
기다리고 있던 경비원들은 호각을 불며 땅에 넘어진 사내에게로 뛰어갔다. 떨어질 때 다친 것인지, 사내는 다리를 절면서 팔을 감싸 쥐고 일어났다.
경비원들이 다가오자 사내는 그들을 거칠게 밀어내면서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거리가 있어 내용이 들리지는 않지만, 굉장히 다급한 몸짓이었다. 경비원들은 다시 한 번 사내에게 달려들어 두 팔을 붙잡았다.
‘이제 이 새벽의 활극도 끝났구나…….’
임수정이 안심을 하려던 바로 그 순간, 사내는 오른손을 좌우로 빠르게 휘둘렀고, 동시에 그를 제압하려던 경비원 두 명은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내는 쓰러진 경비원들의 허리춤을 뒤져 곤봉을 빼앗아 든 뒤, 불편한 다리를 끌며 임수정이 서 있는 정수장 건물을 향해 열심히 걸어왔다.
“아니, 저…… 저런 쌍놈의 새끼가! 국가기관 경비원을 폭행하네? 이 새끼, 가스총 맛을 봐야 정신 차리지!”
임수정과 함께 잠시 멍하니 동료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지막 경비원은 위풍도 당당하게 성질을 내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스총을 꺼내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휘잉!
열린 문틈 사이로 불어 들어온 서늘한 비바람이 맨 팔과 다리에 닿자 소름이 끼친다. 임수정은 두려움과 서늘함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떨며 경비원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너 뭐야! 이 새끼야!”
경비원은 근무 수칙을 무시하고 경고 없이 바로 사내를 향해 가스총을 발사했다. 치익―! 가스가 사내의 얼굴을 향해 분사되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보다 더 빨리 몸을 돌려 가스를 피했다.
“어라? 이게 피해? 이래도 안 맞아? 이래도?”
흥분한 경비원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연신 가스총을 쏴댔다.
하지만 사내는 한쪽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그것을 모두 별 어려움 없이 피해냈다. 부웅―! 거리를 좁힌 사내의 곤봉이 경비원의 손목을 내려쳤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임수정의 귓가에 울렸다.
“으악!”
경비원이 비명을 지르면서 허리를 굽혔다. 사내는 고개를 숙인 경비원의 뒤통수를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빠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경비원을 대신해서 그의 두개골이 끔찍한 소리를 냈다. 경비원은 가스총을 떨구고 통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아아악!”
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임수정의 입에서는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임수정을 돌아보는 사내의 눈빛이 섬뜩하다.
사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임수정이 서 있는 건물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겨…… 겨…… 경찰을 불러야 해.”
임수정은 황급하게 전화기를 찾아 경비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손이 너무나 떨려서 수화기를 두 번이나 떨어뜨린 다음에야 겨우 귀에 가져다 댈 수 있었다.
“외부 전화가 몇 번이었지?”
내선이 아닌 외선으로 전화를 돌리기 위해 눌러야 하는 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다.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무섭다는 것뿐이었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야……. 전화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잠시 멍하니 생각을 하던 임수정은 감전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서 다시 현관문을 향해 뛰었다. 문을 잠가야 한다. 사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꺄악!”
어느새 건물 바로 앞에까지 걸어온 사내를 보고 임수정은 또 한 번 쇳소리를 내질렀다.
로비의 조명에 환하게 비춰진 사내의 얼굴은 임수정이 먼발치서 보았을 때보다 몇 배나 더 끔찍한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내의 얼굴을 가로질러 나 있는, 넓고 깊은 흉터에는 지독한 비바람에도 씻겨 나가지 않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 악마 같은 모습에 임수정은 다리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여야만 했다.
‘저 문만 잠근다면…….’
특수 강화유리로 제작된 유리문은 곤봉을 휘두르는 정도로는 금방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엔 스테인리스 셔터를 내리면 된다.
임수정은 현관문의 바닥에 장치된 자물쇠를 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것을 본 사내도 다급히 몸을 날렸다.
쿵!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유리문에 부딪쳤다. 하지만 몸무게를 유리 전체에 실어 밀친 임수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었던 사내는 곤봉을 든 한쪽 팔만을 겨우 문틈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사내의 덜렁거리는 왼쪽 어깨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우직, 하는 소리를 냈다.
피가 묻은 곤봉의 끝에 걸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대치 상황을 맞이했다.
몸으로 문을 막아선 임수정은 쐐기처럼 끼워진 곤봉을 걷어내지 못했고, 한 팔을 쓰지 못하는 사내는 그저 곤봉을 꼭 잡고 버티는 것 외에는 다른 수를 낼 수 없었다.
“이익!”
임수정은 어떻게든 곤봉을 걷어차 보려 했지만, 숙직실에서 신던 슬리퍼 바람이라 도무지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이봐, 아가씨!”
곤봉 끝을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임수정에게 사내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큰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임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사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러고 있다간 너도 죽고, 나도 죽어. 아니, 우리 둘만 죽으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몰라. 저 새끼들이 오면 그 정도로 안 끝날 거야.”
사내는 임수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새끼들’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사내의 떨림이 임수정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의 마음속에 의문이 들었다. 이처럼 무서운 사내조차 두려워하며 말하는 ‘저 새끼들’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뒤에서 무거운 빗소리를 뚫고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끄라아악! 크르르…….
난생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울부짖음은 동물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름이 돋을 만큼 섬뜩한 소리였다.
그라악!
소리가 빠른 속도로 가까워져 온다. 그녀가 눈동자가 불안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사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절대 해치지 않을게. 이 강민구가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하는 거야. 물론 저 새끼들한테서도 지켜줄게. 아가씨, 마지막 기회야. 이 문 열어.”
왜 그 말을 들으면서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는지는 그녀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민구라는 사내의 제안은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조금 전에도 그가 한 사람을 잔인하게 내려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때맞춰 들려온 괴성은 그녀의 마음속 깊이 감춰져 있던 원시적인 두려움을 끌어냈다. 임수정은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기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 약속을 믿고 싶어졌다.
“끄응!”
문을 밀던 임수정의 힘이 약해진 찰나를 놓치지 않고, 민구는 비명에 가까운 기합과 함께 재빨리 문을 밀치며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기세에 밀린 임수정은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민구는 재빨리 자물쇠를 누르고 셔터를 당겨 내렸다.
쫘르르르륵!
문이 잠겼다. 길게 늘어선 유리문들을 일일이 점검해 보며 민구가 물었다.
“아가씨, 또 잠가야 할 문이 있나?”
겁에 질린 임수정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민구의 얼굴을 쳐다봤다.
방금 사람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한 이와 살이 맞닿을 거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임수정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거기에 흉터가 나 있는 민구의 피투성이 얼굴도 한몫했다.
임수정의 대답이 늦어지자 민구는 다짜고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그녀를 쏘아보는 민구의 눈빛은 조금 전 문을 마주하고 설득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타고난 포식자의 냉혹한 표정. 바로 그 섬뜩함이 민구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왔다.
“아! 아악! 주,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머리채를 잡힌 임수정은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감싸며 애원했다. 바보처럼 문을 열어줬다가 결국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져 죽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구가 대답했다.
“그래, 해치지 않아. 이름을 걸고 약속을 했으니까. 지금부터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다 너를 살려주려는 거니까 믿어도 돼. 하지만 걸림돌이 된다면 이야기가 또 다르지. 다시 물어볼게. 잠가야 할 문이 더 있나?”
“어…… 없어요. 야간에는 여기가 유일한 출입문이에요.”
그제야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민구가 다시 확인했다.
“확실해? 정신 바짝 차리고 빨리 대답해. 저 새끼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또 ‘저 새끼들’인가……. 임수정은 민구에게 도대체 저 새끼들이란 게 뭘 말하는 거냐고 묻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쿠웅!
유리문을 두드리는 엄청난 소리에 임수정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쿠웅!
한 번 더 세차게 유리문이 울렸다. 그리고 또 한 번! 점점 더 강하게 문을 들이받고 있는 것은 덩치가 커다란 남자들이었다.
목이나 얼굴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남자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쿵!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피부가 벗겨진 남자들의 이마와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유리문에는 길고 붉은 핏자국이 남았다.
그라아악! 그들은 울부짖고 돌진하고 또 울부짖은 뒤, 문을 들이받았다.
“저, 저게 뭐예요?”
저절로 뒷걸음질을 친 임수정이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물었다. 민구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오늘 처음 봤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알지. 이 괴물들은 죽을 때까지 포기 안 해.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 이 건물 안에서 칼을 좀 구할 곳이 있을까?”
“칼을? 칼보다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편이…….”
“경찰은 별 도움이 안 돼. 저것들이 경찰이 처리할 수 있는 놈들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도 않지. 지금 들이받은 저놈 옆구리에서 뭐가 덜렁거리는 거 보이지? 내장이야. 살이 찢어져서 내장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데도 저렇게 기운이 넘쳐.”
“하지만…….”
임수정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민구가 말했다.
“널 죽이려고 하는 거라면 칼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아. 그런 걸로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조금 전 민구는 맨손으로도, 또 곤봉으로도 사람들을 쉽게 쓰러뜨리고 죽였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여전히 괴물들은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들이받고 있었다. 확실히 저런 것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곤봉보다는 나은 무기가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칼…… 주방이라면 있지 않을까요?”
임수정의 말에 민구가 반색을 했다.
“주방이 어디야? 안내해.”
“잠시만요.”
임수정은 경비실 벽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그녀가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식당에 도착해 임수정이 열쇠로 문을 여는 동안 민구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어떻게 이 건물을 잘 알지?”
뜬금없는 질문이어서 임수정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직장이니까요.”
“직장이라고? 의외구만, 뭘 하는데?”
“수질 관리 연구원이에요. 의외라뇨?”
“그런 차림으로 일하는 연구원은 처음 보는군. 하긴, 연구원이나 뭐 그런 가방끈 긴 사람들을 만날 일도 별로 없었지만.”
민구의 이야기를 들은 임수정은 새삼 자신이 헐렁한 탱크톱에 짧은 반바지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맞는 열쇠를 찾던 그녀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가슴께를 가리려 하자 민구가 한마디 했다.
“이봐, 나 같으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그런 거 신경 안 쓰겠어. 조금 전 1층에서 유리문에 피 칠갑하면서 박치기하던 놈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런 말을 들어도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어찌 됐든 임수정은 주방 문을 열고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파팟, 소리를 내며 100명이 한 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넓은 식당이 환하게 밝아졌다.
앞서 들어선 민구가 절룩거리며 주방으로 가 조리 기구들을 뒤지는 동안 임수정은 캐비닛을 여기저기 열어봤다. 조리사 가운이라도 하나 찾아 걸치고 싶어서였다.
“음, 이건 좀 너무 가벼운데……. 어디, 이건.”
민구는 조리대 칼꽂이에서 여러 자루의 칼을 꺼내 불빛에 비춰 보고 이리저리 휘둘러 보며 골랐다.
하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칼을 발견하지 못했다. 열 자루 이상의 칼을 죽 늘어놓은 뒤에 민구가 결국 집어 든 건 중국 식칼처럼 넓적한 부쳐 나이프였다.
뼈가 붙은 짐승의 고기를 토막 칠 때 쓰는 물건이다. 팔목을 놀려 칼을 몇 번 돌리던 민구는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했다.
“이만하면 날도 아직 서 있고, 괜찮을 것 같아. 문제는 이놈의 어깬데…….”
주변을 둘러보던 민구는 칼을 들고 식당을 가로질러 아직도 입을 만한 옷을 찾고 있는 임수정에게 다가갔다.
칼을 손에 쥔 그 모습은 곤봉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두려운 것이어서 임수정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찌지익! 찌익!
테이블 보 하나를 집어 든 민구는 그것을 칼로 찢어 20센티미터 넓이의 긴 끈처럼 만들었다. 그러고는 고통스러워하며 양복 웃옷을 벗어 임수정에게 건넸다.
“정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이거라도 걸쳐. 비에 젖어서 좀 차갑겠지만. 그리고 입고 나면 나 좀 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