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강탈자들의 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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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강탈자들의 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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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강탈자들의 밤 (2)
2021.09.09.
검은 양복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바짝 다가와 있는 사내의 모습! 빗물에 젖은 얼굴의 흉터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검붉게 반짝인다.
검은 양복은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거의 동시에 민구도 등 뒤에 위치해 있던 오른손을 휙― 하고 내휘둘렀다.
뭔가 반짝인다고 느낀 순간, 검은 양복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털썩, 안전장치가 미처 풀리지 않은 MP5를 꽉 쥔 채 검은 양복은 쓰러져 버렸다. 쿠크리 나이프에 깊게 베인 그의 목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져 흘렀다.
비스듬히 서 있는 자동차와 열린 트렁크 문에 가려져 나머지 요원들이 몸을 숨긴 위치에서는 검은 양복과 민구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구는 순간, 그 피투성이가 된 목과 창백한 얼굴, 홉떠진 눈은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억, 최 팀장님!”
자신들의 남은 총알을 모두 쏟아부어 가며 엄호했던 기관총 조달역이 허망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곁눈질로 목격한 요원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야아아아! 방패를 든 조폭들은 이쪽의 총질이 뜸해지자마자 또다시 기세를 올려 칼날을 번뜩이며 뛰어온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신호를 교환한 요원들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쇠파이프와 사시미 칼들을 집어 들었다. 모두 아까부터 계속 방패 뒤에 숨은 놈들이 던진 것들이다.
그리고 무기를 손에 넣은 네 사람의 요원은 1호차의 트렁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도 1호차 주변을 지키고 있는 것은 저 흉터 진 놈 하나뿐이다. 4대1이라면 충분히 놈을 제압하고 기관단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진즉에 여기를 노렸어야지, 새끼들아. 너무 늦었어.”
트렁크 앞에 버티고 서 있던 민구는 두 팔을 벌리며 네 명을 맞았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카본 쿠크리의 날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빛났다.
요원들 중 가장 앞서 달려든 것은 숱이 유난히 많은 곱슬머리였다. 휘익, 곱슬머리의 사시미 칼이 민구의 목을 향해 휘둘러진다.
그와 거의 동시에 두 번째 요원은 민구의 옆구리를 노리고 식칼을 찔러 넣었다. 고개만 까딱해서 사시미 칼을 피한 민구는 곧바로 몸을 틀며 두 번째 요원의 오른손을 쿠크리로 내리찍었다.
터엉!
쿠크리의 칼날이 차체를 치며 커다란 쇳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몸 전체가 찌릿해지는 엄청난 고통! 두 번째 요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얼른 오른팔을 거둬들였다.
그런데…… 손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잘린 손목 끝에서는 피가 솟아오른다.
끄아아아-!
두 번째 요원의 비명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전에 민구는 다시 몸을 틀어 나이프로 붓질을 하듯 곱슬머리의 양 겨드랑이와 허벅지를 빠르게 그었다.
“으윽!”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곱슬머리의 멱살을 잡은 민구는 한 발 뒤에서 뛰어오는 세 번째, 네 번째 요원을 향해 밀어 쳤다.
두 놈이 피투성이가 된 동료의 시체를 옆으로 뿌리치는 동안 민구는 팔목이 잘린 두 번째 요원의 턱을 걷어찼다. 그러고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부우웅―
세 번째 요원이 휘두른 쇠파이프가 민구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허공을 가른다.
민구는 그의 가슴 안으로 파고들어 왼손으로 양복 깃을 잡아당기며 오른손으로는 배 속 깊숙이 쿠크리를 찔러 넣은 후 가로로 쭈욱 훑었다.
촤아아악―
쿠크리가 빠져나간 세 번째 요원의 오른쪽 옆구리에서는 피와 체액이 섞여 왈칵왈칵 쏟아져 내린다. 민구가 왼손에서 힘을 빼자 세 번째 요원은 복부를 움켜쥐며 쓰러져 버렸다.
“이제 너밖에 안 남았네?”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민구가 맨 뒤에 서 있던 네 번째 요원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건 악마인가……. 네 번째 요원은 지난 몇 초 동안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까다로운 기준을 통해 선발된 경호 요원들이다. 다들 십 년이 넘게 무술을 익혔고, 나랏밥을 먹은 이후에도 매일 훈련을 받아왔다.
그런데…… 한꺼번에 달려든 세 명이 이놈의 옷자락조차 베지 못하고 모두 명을 달리해 버렸다.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빠르다. 그리고 잔인하다. 네 번째 요원은 이미 숨을 거둔 다른 요원들보다 자신이 결코 나을 게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쨍강, 네 번째 요원은 들고 있던 사시미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부들거리는 두 손을 들었다.
“하, 항복한다. 목숨은 살려줘.”
응? 민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 바닥에서 사시미 칼을 주워 요원의 손에 다시 쥐여 줬다.
“항복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잘 좀 해봐.”
네 번째 요원의 눈이 흔들린다. 공포, 당혹감, 수치심, 그리고 기회를 맞았다는 설렘. 이 모든 감정이 한데 섞여 그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의 손에 칼을 다시 쥐여 주기 위해 흉터 진 사내는 지금 아주 바짝 다가와 있다. 심지어 거의 무방비인 것처럼 보였다.
“으아아아!”
네 번째 요원은 전력으로 사시미 칼을 내지르며 좌우로 빠르게 그었다. 닿을 것 같다. 이 거리라면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구는 가볍게 허리를 틀고 스텝을 밟아 물러서면서 대여섯 차례의 칼질을 모두 흘려 버렸다.
“어라? 이 새끼 봐라? 한 번 더 항복하면 살려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을 노리고 막 칼을 휘두르네?”
“닥쳐! 이 개새끼야!”
놀림을 받은 네 번째 요원은 악을 쓰며 다시 칼을 내질렀다. 풀쩍 뛰어 공격 범위를 벗어난 민구는 목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느려. 그렇게 잔뜩 힘이 들어가 가지고 되겠냐? 이 등신아.”
그래, 저 새끼 말이 맞아. 힘을 빼. 넌 지금 너무 겁을 먹었어……. 네 번째 요원은 이를 빠드득 갈며 마지막 남은 용기를 바닥까지 쥐어짜서 사시미 칼의 날이 아래로 향하도록 고쳐 쥐었다.
침착하자. 저 새끼가 방심하고 있는 그 틈을 노리고 들어가자……. 검은 양복은 숨을 고르며 자세를 잡았다. 놈이 내지르는 그 순간을 노리기로 했다.
찔러 들어오는 나이프의 날을 몸을 틀어 피하고…… 칼을 아래로 내리그어서 놈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지게 만들고, 그다음에 겨드랑이 안쪽까지 파고들어야지……. 네 번째 요원의 머릿속에서는 쉐도우 파이트가 복잡하게 벌어졌다.
“그게 준비 다 한 거야? 그럼 들어간다?”
민구가 도발적으로 물었지만, 네 번째 요원은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볍게 첫발을 뗀 민구가 갑자기 몸을 낮추면서 쭈욱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의 오른팔이 채찍처럼 길게 뻗어 오는 것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방울 사이로 금속 특유의 섬광이 번쩍거린다. 찌르는 공격이다.
미리 계획했던 것과 같다! 네 번째 요원은 자신의 작전대로 허리를 비틀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사시미 칼을 쥔 오른손의 팔꿈치를 살짝 들어 올리며 시선을 자신의 허리 앞쪽으로 돌렸다.
이제 놈의 손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중력의 도움을 받아 찌르면 된다……까지 생각했을 때, 겨드랑이 안쪽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네 번째 요원의 얼굴에 일그러졌다.
‘뭐였지?’ 하는 의문이 답을 구하기도 전에 민구의 쿠크리는 다시 그의 어깨와 옆구리, 허벅지, 그리고 숙여진 뒷목을 차례로 베고 지나갔다.
눈이 화등잔만 해진 네 번째 요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통나무처럼 쓰러져 버렸다. 그의 심장이 뛸 때마다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하여간에 저놈은 타고났어. 총알 사이로 뛰어가래도 갈 놈이야.”
멀찍이 떨어진 자동차 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육만배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최성호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만큼 커버린 민구가 못마땅했지만 육만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함께 억지웃음을 지었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빨리 내려서 트럭 접수해!”
최성호는 공연히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옛!”
만배파 행동대원들이 트럭으로 달려들어 강제로 문을 뜯어낸 뒤, 타고 있던 운전사와 안경잡이 하나를 끄집어 내렸다. 둘 다 극심한 공포에 질려서 구역질까지 할 만큼 떨고 있었다.
칠성은 다른 덩치들 두어 명과 함께 연장을 들고 자물쇠를 끊기 위해 트럭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밴에 타고 있던 놈들은 마이크로웨이브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X―Net과 스파이크 스트립을 다시 거둬들였다. 뒷문을 살펴보던 칠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어? 형님, 이거 자물쇠가 아닙니다!”
“그럼 뭔데?”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민구는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 왜, 아파트 현관에 붙은 오토 락 안 있습니까? 그것처럼 생겼습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건가 본데, 어떻게 합니까?”
“칠성이, 이 답답한 새끼야. 너, 대가리는 괜히 달고 다니냐? 이 새끼야, 트럭 비밀번호를 내가 더 잘 알겠니, 아니면 원래 그 트럭에 타고 있던 저 새끼들이 더 잘 알겠니? 응?”
담배 연기를 후우, 내뿜은 민구가 턱 끝으로 무릎 꿇려진 운전기사와 안경잡이를 가리켰다.
칠성은 아하, 하는 표정을 짓더니 허리를 꾸벅하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칠성은 솥뚜껑만 한 손바닥을 들어 다짜고짜 둘의 따귀부터 연신 갈겼다.
“비밀번호 대, 빨랑.”
운전기사가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저, 전 몰라요, 선생님. 진짭니다. 저는 그냥 일개 운전수예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래?”
칠성은 안경잡이에게 고개를 돌린 후, 또 따귀를 후려쳤다.
“그럼 너는 알겠네. 이 새끼, 어디 보자.”
칠성은 안경잡이의 멱살을 당긴 후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뒤적였다.
“응, 그래. 국방연구원 김성진. 수석 연구원이라…… 어쩐지 먹물 좀 들어간 새끼 같더라. 야, 김성진이! 비밀번호 뭐야, 이 새끼야!”
안경이 박살 나고 입안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김성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몰라! 트럭 열고 닫는 건 저 경호원들이 한다고! 그래서 비밀번호도 저 사람들밖에 몰라! 그런데 조금 전에 당신들이 다 죽여 버렸잖아!”
말을 끝마치기 전에 칠성은 구둣발을 들어 김성진의 얼굴을 세게 걷어찼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악을 바락바락 질러? 이 개새끼, 눈깔을 확!”
“몰라…… 흑흑, 모른다고……. 당신들이 죽인 저 사람들이 알고 있었어. 으흑.”
울음이 터져 버린 김성진을 내버려 두고 칠성은 황급히 민구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어쩌죠, 형님? 비밀번호 알던 새끼들이 다 뒈져 버렸다는데요?”
칠성의 귓속말을 듣던 민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연신 피식거렸다. 민구는 쓰러져 있는 검은 양복의 요원들 중 하나에게 걸어가 머리를 밟으며 말을 걸었다. 팔목이 잘린 두 번째 요원이었다.
“야, 야. 죽은 척하지 마. 살아 있는 거 다 아니까. 아까 딱 계산해서 안 죽을 만큼 그었어.”
팔목을 잘린 요원이 신음을 토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으…….”
“킥킥. 아나, 겸손한 새끼. 바라는 것도 참 소박하네. 그래, 살려줄게. 살려줄 건데, 그전에 저기 서 있는 트럭 문이나 따보자. 비밀번호 대.”
“나, 난 몰라요.”
트럭 문을 열라는 말에 검은 양복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어쭈, 이 새끼가 갑자기 입에다가 지퍼를 채우네?”
민구는 나이프 끝으로 사내의 잘린 손목을 후벼 팠다.
“으아악!”
사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민구는 동요하지 않고 계속 힘을 주어 나이프를 돌렸다. 드득, 드득, 뼈가 갈리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으윽! 정말이야. 제발…… 으아악! 그만, 그마안! 비밀번호는 저기 무릎 꿇고 있는 저 안경잡이가 압니다! 끄아아악! 그만!”
너무 아파서 의식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숨이 끊긴 것인지 커다란 비명을 마지막으로 남긴 사내는 눈을 뒤집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민구는 바닥에 침을 탁 뱉은 후 나이프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김성진에게 다가갔다.
“야! 안경잡이! 와, 너 씨발, 생긴 거답지 않게 무지하게 잔인한 새끼다?”
민구는 부하들에게 김성진을 잡아 단단히 고정시키게 하고 초승달처럼 휘어진 나이프의 끝을 김성진의 눈에 가까이 댔다.
“으으으…….”
머리채와 눈꺼풀, 양팔, 허리까지 붙들린 김성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부들부들 떨며 다가올 극심한 고통을 예상하는 것뿐이었다.
눈물과 콧물, 침이 범벅이 되어 빗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써서 온통 빨갛게 물든 민구의 얼굴은 지옥에서 온 악귀, 그 자체였다.
“네가 엉뚱한 놈 지목하는 바람에 사람이 죽었어, 이 새끼야. 응? 저기 저 새끼,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아, 씨발. 죄 없는 사람 죽였더니 기분 존나게 더럽네. 야, 이걸 어떻게 책임질래?”
민구는 김성진의 눈앞에서 칼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휙 하고 내려 그었다. 김성진은 비명을 질렀다.
불타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왼쪽 볼 전체에 가득 퍼졌다. 길게 찢어진 김성진의 볼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긁힌 거야. 남자 새끼가 그 정도 가지고 엄살은…….”
민구는 칼끝에 묻은 피를 김성진의 턱에 대고 닦았다.
“빨리 말해 버리고 편해지자, 우리. 응?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고 그래야지?”
민구의 칼끝이 또 눈앞에서 춤을 춘다. 김성진의 확대된 동공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무서웠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이 압도적인 고통과 공포는 그를 약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저 트럭 뒷문을 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 안에 있는 건 욕심내지 마요. 저건 너무 위험해……. 당신들이 컨트롤할 만한 물건이 아니야…….”
“어이쿠! 이 새끼, 겉보기보다 참을성이 좋네? 한 번 더 그어주면 말할 거야?”
경고보다 빠르게 민구는 손목을 놀렸다. 서걱! 이번에는 오른뺨 깊숙이 칼날이 후비고 들어와 훑고 지나갔다.
그 고통은 조금 전의 것보다 몇 배나 큰 것이었다. 김성진은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발! 제발! 으으으…… 제발!”
김성진이 거품을 물어가며 애원을 했지만, 민구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극히 평온했다.
“조금 전 것보다 더 아프지? 지금 건 2단계였어. 난 말이지, 사람한테 칼을 넣어보면 그 사람이 얼마까지 참을 수 있는지 딱 알 수 있거든. 내가 보니까 넌 4단계까지는 무리 없을 것 같다. 자, 이번엔 3단계로 간다.”
“601864! 601864! 하지 마세요! 601864라고요! 비밀번호! 으흐흑!”
김성진은 통곡을 하면서 간절히 외쳤다.
자신의 선택 때문에 내일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 해도 지금 눈앞에서 춤을 추는 나이프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다.
“야! 민구야! 너 왜 이렇게 꾸물거리냐? 짭새 뜨기 기다려? 엉? 빨랑빨랑 물건 옮겨 싣고 출발해야지, 뭐하는 거야?”
언제 차에서 내렸는지 최성호가 다가와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민구에게 잔소리를 했다. 힐끔 최성호를 흘겨본 민구는 또다시 씨익 웃었다.
“하하, 하여간 우리 성호 형님 솔선하는 것 하나는 알아드려야 된다니까. 총 든 새끼, 칼 든 새끼 다 제꼈고, 비밀번호도 알아놨으니 이제 순 힘든 일만 남았는데 도와준다고 하시니까 고마워서 죽겠습니다. 601864랍니다. 형님네 빠릿빠릿한 애들 데리고 잘 여십시오. 얘들아, 어르신네들 일하시게 우린 빠져 드리자.”
민구의 비아냥을 애써 못 알아들은 척하며 최성호는 부하들과 함께 트럭 뒤로 걸어갔다. 비밀번호를 누르자 굳게 잠겨 있던 육중한 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비켜봐, 이 답답한 새끼들아. 내가 직접 올라간다.”
최성호는 컴컴한 트럭 뒤 칸에 재빨리 뛰어올랐다. 위험한 때에는 남들보다 두 걸음 뒤에 서고, 공을 세우는 자리에는 한 발짝 빨리 들이민다.
그것이 최성호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이고, 출세를 한 비결이었다. 어두운 밤거리에 있다가 들어섰는데도 트럭 짐칸은 한 치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손전등을 켜서 앞을 비추었다.
“이거구만!”
트럭 안에는 금속으로 된 길쭉한 상자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3중으로 상자를 단단히 밀봉하고 있는 걸쇠만 아니라면 죽은 사람을 위한 관이라고 해도 믿길 모양이었다. 크기도 딱 그 정도였다.
“도대체 이 안에 든 게 뭐기에 저렇게 많은 놈들이 목숨을 걸고 호위를 했던 걸까? 엄청나게 고가에 팔리는 기술인가? 하긴, 그 대단한 황 회장이 욕심을 낼 정도라면…….”
최성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황 회장에게 넘기기 전에 적어도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혹시 운이 좋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자그마한 팁을 훔쳐 내 다른 곳에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아둬서 손해 볼 일이야 없겠지.”
최성호는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걸쇠를 모두 밀어젖혔다. 그러고는 묵직한 금속 뚜껑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