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금단의 회의 (5)
(7/449)
7. 금단의 회의 (5)
(7/449)
7. 금단의 회의 (5)
2021.09.07.
“개발에 필요한 시간은…… 2년! 2년만 주시면 백신을 만들겠습니다.”
말을 내뱉은 뒤, 김성진은 킹메이커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에 오기 전, 원래 그가 요구하려고 했던 연구 기간은 5년이었다.
그 정도면 일개 박사에 불과한 그가 충분한 사회적 인맥과 금전적 지원을 확보할 만한 시간이라고 계산했다.
하지만 냉정한 킹메이커의 눈빛을 보면서 김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3년을 깎아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늘 당장 떨려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르륵, 대답을 기다리는 김성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2년이라…….”
김성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킹메이커가 뜸을 들였다. 그의 판결을 기다리는 매 1초, 1초의 기다림이 김성진의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
“나 같은 늙은이한테는 정말 긴 시간이네요. 그거 알아요, 김 박사? 나이를 먹으면 말이에요, 젊었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만한 일에도 종종 불같이 화를 내게 되더란 말이죠. 60이 이순이어서 성질이 누그러진다? 그런 거 다 거짓말이에요.”
설마 내가 제시한 2년도 너무 길다는 말인가? 나를 자르겠다는 건가? 김성진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초조하게 귀를 기울였다.
“음, 사실 난 김 박사에게 기대가 있습니다. 영하 55도까지 실험을 진행했던 상상력이나 뚝심은 아무에게나 있는 건 아니죠. 김 박사, 2년이라고 약속한 겁니다. 부디 내 믿음을 실망시키지 마세요, 전 그럴 때 화가 아주 많이 나니까요.”
됐다! 김성진의 머릿속에서 안도의 한숨과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원래 바랐던 연구 기간에서 절반 이상 줄어든 시간이긴 해도 막대한 자본이 투입될 이 중요한 프로젝트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게 됐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김성진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래야 할 거야.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투자한 거니까 말이야.”
교수가 말했다. 김성진은 자신에 찬 표정을 최대한 가장하며 대답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 진행하면서 필요한 경비는 저기 계신 최 의원님에게 청구하면 됩니다. 너무 얼토당토않은 요구만 아니라면 최대한 지원을 할 테니까, 필요한 장비나 시설이 있을 땐 주저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돈이나 땅…… 실험 대상이라도 말이죠.”
킹메이커가 구석 자리의 한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실험 대상…… 그건 곧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한다.
김성진은 새삼 자신이 무서운 게임 속에 뛰어들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런 것 때문에 위축되기보다는 오늘의 작은 승리를 자축하고 싶은 흥분이 더 컸다. 이제 그는 국가의 중요 인물이 된 것이다.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성진은 다시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하며 발표를 마무리 지었다. 노트북을 덮고 자료들을 정리하려는 순간, 군복이 그를 부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것 봐, 오늘 봤던 그 변종들 말인데…… 관리가 그렇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 돈은 좀 들더라도 변종 하나당 하나씩 개별 수용 시설을 만들어 관리하는 게 낫지 않겠어? 방 한두 개에 모두 몰아 넣어뒀다가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으면 곤란할 것 같은데?”
교수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군. 개체 하나당 하나의 수용 시설이 필요하겠어. 전부 귀중한 샘플들이니까.”
아, 그 이야기를 빼먹고 해주지 않았군.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김성진은 다시 마이크를 켜고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변종끼리는 서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김성진은 커피를 뽑아 들고 대기실로 가서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아까부터 견딜 수 없이 욱신거리며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멀었어.’
그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최고를 추구했으며, 남들을 딛고 올라가 정점에 서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 회의실에서 그 늙은 여우들을 만난 이후, 김성진은 자신이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 해도 그만큼의 교활함과 사악함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만큼 철저하게 타인을 도구로 볼 자신도 없었다.
오늘 김성진을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엄청나게 확산력이 강한 치명적 돌연변이를 말하는 내내 그 누구도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우습군. 이만하면 나도 충분히 나쁜 새끼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여기 있었군. 수고했네. 자, 여기에 서명하게.”
복도를 걸어 다니며 김성진을 찾던 사내가 대기실에 앉은 그를 발견하고 네 장짜리 서류를 내밀었다. 조금 전 킹메이커에 의해 자금 관리 담당으로 임명된 최 의원이었다.
“아, 네. 외삼촌, 이게 뭡니까?”
김성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공손히 서류를 받아 들며 물었다. 넥타이를 매만지던 최 의원이 대답했다.
“또 외삼촌이라고 한다.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김 박사. 혹시라도 다른 분들이 들으면 공사 구분 못 한다고 싫어하신다고……. 아, 그리고 그건 비밀 엄수 서약서하고 케이온 계약서일세.”
“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 호칭이 입에 붙어서…….”
비밀 엄수 서약서라……. 김성진은 서류를 휙휙 넘기면서 빠르게 훑어보았다.
오늘 회의에서 듣거나 했던 말,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할 일들을 향후 15년간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젝트의 주체가 국방연구원이 아니라 민간 방위사업체인 케이온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케이온의 실질적인 지분은 오늘 이 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단순한 민간 회사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늙은이들은 변종에 관한 연구로 얻게 될 천문학적 이익을 자신들이 독점하려는 것이다.
국운이 상승하느니 뭐니 하는 말들은 그저 입에 발린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서류에 사인을 하면서 호기심이 생긴 김성진이 물었다.
“다른 분들께서도 저처럼 비밀 엄수 서약서에 사인을 하십니까, 최 의원님?”
“우리가?”
김성진으로부터 서류를 넘겨받으며 사내가 껄껄댔다.
“이깟 회의보다 오늘 모였던 사람들의 이름이 더 큰 비밀이야. 그런 서류 없이도 우리는 잘사니까 걱정하지 말게.”
김성진은 자신의 충성도를 의심받는 것 같아 억울했다.
“저, 저도 입은 무겁습니다. 이렇게까지 법적인 의무를 지우지 않으셔도…….”
그러자 최 의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잠시 김성진을 응시하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이야기했다.
“헛,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김 박사, 착각하지 마. 자네에게 지금 이 서약서에 사인하도록 한 이유는 비밀 준수의 의무를 법적으로 지우기 위한 게 아니야. 어차피 이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순간, 자네는 살아남을 수 없어. 저 방에 있던 누구도 자네가 그런 짓을 할 만큼 멍청이라고 보지는 않아. 이건 오히려 자네를 보호하기 위한 걸세. 여기에 사인을 함으로써 앞으로 자네는 이 일과 관련한 어떤 질문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거야. 그저 이렇게만 대답하면 돼. ‘저는 이미 그 일에 관해서 비밀을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증언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거란 말이야. 설령 이 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국가 자금이 낭비되고, 대참사가 벌어진다고 해도…….”
김성진은 조금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 의원은 빙그레 웃더니 김성진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성진아, 삼촌이 너한테 해될 일을 시키겠니?”
***
회의실에서 나온 킹메이커와 교수는 나란히 서서 VIP 전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소나기가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교수가 물었다.
“위에다가 얘기를 안 할 수는 없는데, 언제쯤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수의 질문을 받은 킹메이커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서 대답했다.
“아유, VIP께서야 이제 몇 년만 지나면 내려가실 분인데……. 그리고 안 그래도 국정을 돌보시느라 바쁘신 양반한테 이런 것까지 알려가며 골치 아프게 해드릴 필요가 있겠나요?”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 위를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
킹메이커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입을 벌리고 탄식했다.
“흠, 그러게요. 미국이라……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요.”
두 사람이 사이좋게 덕담을 나누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어두운 방에 숨어 몰래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하나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회의실 내에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접니다. 말씀드렸던 대롭니다.”
짧게 통화를 마친 사내는 의무를 끝마쳤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발아래 펼쳐진 어두운 밤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거세진 빗줄기가 창문을 타고 제멋대로 흐르며 바깥의 풍경을 뿌옇게 흐려놓고 있었다.
***
김성진과 8인이 회의를 하고 있는 긴 시간 동안 밖에서는 헤드라이트를 끈 여섯 대의 검정색 대형 승용차와 승합차 세 대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건물의 차고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자동차에는 조직 폭력단인 만배파 행동대원들이 앉아서 대기하는 중이다. 가장 뒤에 주차된 차량에는 조직의 보스인 육만배와 2인자 최성호가 타고 있다.
“잘 보고 있지? 행여라도 놓치면 큰일 난다.”
육만배는 고급 승용차 좌석에 머리를 기대며 앞자리에 앉은 최성호에게 다시 한 번 단단히 일렀다.
최성호는 네, 대답을 하면서 손목에 찬 시계로 슬쩍 눈길을 주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2시를 훌쩍 넘었다. 방음이 잘된 고급 차인데도 빗방울이 차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그런데 이렇게 큰형님까지 직접 나서셔야 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최성호가 물었다. 러시아 마피아에게서 구입한 첨단 장비를 총동원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뭔가 심상찮은 냄새를 솔솔 풍겨댄다.
“음…….”
육만배는 대답 대신 신음 같은 낮은 소리를 내다가 두 손가락을 벌렸다. 눈치 빠른 최성호는 재빨리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후, 그것을 육만배의 손가락에 끼웠다.
“태양 그룹 황 회장 알지?”
담배를 깊이 한 모금 피운 뒤, 육만배가 운을 뗐다.
“네.”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태양 그룹 황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만배파가 전국 최고의 조직 폭력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도 다 황 회장의 막대한 자금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어저께 비서를 보냈었다. 그 비서라는 사람이 전하는 말이…… 오늘 이 건물에서 새벽에 트럭 한 대가 나올 거라고, 그러니 무슨 수단을 쓰든 간에 반드시 그 트럭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보하라고…… 그걸 몇 번이나 강조하더라 이 말이야. 무슨 수단을 쓰든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이 지랄을 하면서. 그러니 내가 신경이 쓰이지.”
“도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그렇게까지…….”
“그거야 뭐 상관이 있나? 우리 같은 놈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해주고 돈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또 깊이 알아봐야 골치나 아프지, 뭐 좋을 게 있겠어? 그러니까 성호, 너나 나나 잠자코 의뢰 들어온 대로만 하면 되는 거다.”
거기까지 말한 육만배는 담배를 비벼 끈 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주름진 입술 사이로 연기가 흘러나왔다.
더 말하기 싫다는 의미 같아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성호의 찜찜한 기분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부터 그들이 빼앗아야 하는 건 재계의 황제가 밤의 제왕에게 직접 명령을 내려서 얻으려는 물건이다. 뭔가 대단히 위험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중에 귀찮아지면 안 되는데…….’
까닭 모를 불안함에 속이 탄 최성호는 입술을 잘근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전방의 건물을 노려보았다. 최성호가 그렇게 초조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앞의 차에서는 느긋한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형님, 오늘 이거 끝나면 애기들 회식 좀 해주십니까?”
박박 깎은 스포츠머리의 운전기사가 고개를 돌려 물은 사람은 만배파의 행동대장, 민구였다. 커다란 칼로 손톱을 다듬고 있던 민구가 물었다.
“왜? 고기가 땡겨?”
“아이고, 형님도 참. 고기도 고기지만, 이렇게 땀 뺀 날은 역시 술이랑 이거 아닙니까.”
운전기사가 능글맞은 얼굴로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이자 민구는 껄껄거리며 그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크크크, 이 새끼가 일하러 와서 정신은 온통 구멍에만 가 있네. 너 그러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배때기 구멍 난다.”
“킥킥킥.”
차 안에 앉은 네 명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 사나운 생김새들이지만, 민구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특히나 얼굴 전체를 가로질러 나 있는, 깊고 넓은 흉터가 씰룩거릴 때면, 원래부터 날카로운 그의 인상이 한층 더 험악해 보인다. 3년 전, 그의 나이 불과 25세 때 육만배를 도와 서울 주먹들을 평정하면서 얻은 영광의 상처였다.
“형님, 나왔다고 합니다.”
귀에 리시버를 꽂고 있던 운전기사가 웃음기를 거두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그의 말처럼 건물 차고에서 여러 대의 차들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잇달아 빠져나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