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롤로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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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롤로그 (2)
2021.09.02.
부하 놈 하나가 테이블을 끌어다가 유리문 앞에 막아 세웠다. 죽어보자는 거다. 그러자 지금껏 별 반응이 없던 7번 테이블의 세 친구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빠져 있어. 이따가 입영해야지.”
유빈이 진우에게 말했다. 진우는 있지도 않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인마. 이렇게까지 됐는데 어떻게 두고 보냐? 뭐, 사실 오늘 군대 가기도 영 싫었고.”
하긴…… 유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둥근 철제 의자 두 개를 집어 하나를 진우에게 건넸다. 이런 상황에 아주 익숙한 모습이다. 친구들이 준비를 마친 것을 보자 보안관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야, 뭐해? 말싸움으로 죽이려고 그랬어?”
“……뭐라고?”
이쪽에서 죽어라 위협을 가하는데도 이빨이 들어가지 않자, 실크남방은 분을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보는 눈이 많아서 영 껄끄럽기는 하지만, 이 지경까지 왔으면 피를 보고 끝내야 한다. 그래야 내일도 조폭으로 살아갈 수 있다.
“쳐!”
실크남방이 발에 걸린 철제 의자를 걷어차 올리며 외쳤다.
부웅― 날아간 의자는 커다란 창문을 박살 내버렸다.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나머지 세 놈도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제 동시에 달려들려던 순간!
“앉아! 이 등신 같은 새끼들아!”
나지막한, 그러나 꽤나 박력이 있는 목소리가 그들을 제지했다. 욕을 먹은 조폭들은 즉각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얼른 의자를 찾아 앉았다. 네 친구의 시선이 명령을 내린 녀석을 향해 옮겨갔다.
그 남자는 테이블 가장 안쪽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턱을 당기자 얼굴을 가로질러 나 있는, 길고 커다란 흉터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칠성이!”
흉터사내가 부르자 실크남방이 고개를 조아린다.
“네, 넷! 형님!”
“너, 이 멍청한 새끼.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애들이 저런 핏덩어리한테 맞고 다녀? 응?”
“죄, 죄송합니다, 형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대 일로도 못 이겨서 다구리를 놓으려고 해? 안 쪽팔려?”
“죄송합니다!”
“운동 안 하고 돼지 새끼들처럼 뒹굴기만 하더니, 참 꼴좋다. 너희, 사무실 가서 보자. 내가 할 이야기가 참 많을 것 같다.”
흉터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폭들은 순한 양처럼 고개만 계속 주억거렸다. 심지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두 놈까지도 자세를 고쳐 앉은 채 땅에 대가리를 처박는다. 어지간히 겁이 나는 모양이다.
에에에엥∼ 위잉∼ 위잉∼
저 멀리서부터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뭐, 교육은 교육이고…… 피 흘린 값은 받아내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흉터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보안관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야! 고릴라! 이리 와, 이 새끼야.”
“뭐어? 고릴라? 이런 미친…….”
보안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쉽게 흥분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재주다. 싸움이 더 크게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유빈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기…… 이제 그만하시죠. 경찰까지 바로 문 앞에 왔는데…….”
흉터사내는 그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온다. 짭새가 떴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피값을 받아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단 몇 초! 그거면 충분하다. 만배파 조직원의 피를 흘리게 한 놈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멀쩡히 걸어 나가게 할 수는 없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죽일 수는 없겠지만, 힘줄 한두 개쯤은 끊어둘 생각이었다. 법적인 문제는 우려할 필요 없다.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잠시 감옥에 갈 놈이 일곱이나 있으니까……. 그게 이쪽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흉터 사내의 차가운 눈은 보안관에게만 꽂혀 있다.
보안관 역시 흉터 사내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녀석의 오른손이 등 뒤로 돌아가 있다. 양복 재킷이 들려 있다. 그렇다는 것은…….
“유빈아!”
놈의 의도를 깨달은 보안관은 황급하게 유빈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둥근 철제 의자를 집어 올렸다. 쿵, 쿵!
경찰들이 테이블로 막아놓은 유리문을 밀치는 소리가 들린다. 조폭들은 줄지어 늘어서서 안쪽의 풍경을 가렸다.
스릉∼
쇳소리는 울렸지만, 식당 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흉터사내가 언제 칼을 뽑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두 뼘가량 되는 쿠크리였다. 사내는 오른발을 내디디며 벼락처럼 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그가 목표로 하고 있는 길목에 웬 얼빵한 놈이 끼어들어 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저놈도 고릴라 녀석과 한패. 함께 베어버리면 교훈도 두 배가 될 테니까.
서걱.
둥글게 휜 칼날이 옷을 베는 소리. 보안관이 힘껏 잡아당겨 준 덕에 쿠크리는 유빈의 뱃가죽 대신 낡은 셔츠를 가르고 지나쳤다.
꽈당, 뒤로 당겨진 유빈의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흉터사내와 보안관은 서로를 향해 일격을 내질렀다.
흉터사내는 공중에서 칼날의 방향을 고쳐 잡고 백핸드 스윙을 했다. 보안관은 철제 의자의 다리를 잡고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 낼 기세로 후려쳤다.
채앵!
쇠와 쇠가 맞부딪치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
교차한 두 사람 모두의 눈에 동일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걸 피했어?
그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서로를 향해 돌아서려는 순간, 고깃집의 유리문이 벌컥 열리며 경찰들이 뛰어들었다. 삐삑― 호각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어허∼! 이거 봐라, 이거. 쯧, 백주 대낮에 이게 무슨 난리야? 점잖은 사람들이…….”
젊은 의경들을 앞세우고 들어온 중년의 경찰이 식당의 꼴을 보고 혀를 찬다.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식당 종업원과 손님들은 경찰복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흉터사내는 얼른 등 뒤로 칼을 숨겼고, 보안관은 의자를 내려놓았다.
조폭들이 다가가 흉터사내를 둘러싸고, 시야를 가린 채 그에게서 칼을 받아 바닥에 밀어버린다.
“어이, 스톱! 동작 그만! 왜 자꾸 움직여, 아저씨들. 응? 수상하잖아. 싸운 거 누구야? 누가 싸웠어?”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백발의 경찰이 조폭들을 하나씩 뜯어본다. 러닝셔츠와 금목걸이, 잉어문신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엄청 두드려 맞았군. 백발의 경찰은 생각했다.
때린 범인이 누구인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온몸이 근육인 것처럼 덩치가 커다란 놈과 얼굴 전체를 가로질러 험악한 흉터가 있는 놈. 이 두 놈 중의 한 녀석이 가해자일 테지.
“어이, 당신 피해자네. 누구한테 맞았어?”
흉터사내의 눈치를 힐끗 본 금목걸이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의 보복을 경찰한테 맡길 수는 없다.
“맞기는 누가 맞았다는 거요? 애초에 싸움이 없었는데.”
백발경찰은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아저씨, 거울을 보고 말해. 지금 아저씨 코가 피투성이고 주먹만큼 부었는데, 그럼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음료수 가지러 갔다가 엎어져서 그런 거니까 신경 끄슈. 할 일도 어지간히 없나 보네.”
“그럼 저 문신한 아저씨는? 어이쿠, 저것 봐. 얼마나 세게 두드려 맞았으면 아직도 일어나지를 못하네.”
“내가 넘어지면서 저 사람한테 부딪친 거요. 그러니까 선량한 시민 그만 귀찮게 하고 그냥 가쇼.”
“선량한 시민이라…… 그렇게 거짓말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면 안 되지이.”
백발의 경찰이 조폭들의 주의를 끄는 동안 중년의 파출소장은 고깃집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물론 한눈에도 누가 말썽꾸러기들인지는 알 수 있었다. 나 조폭이오, 하고 알리기라도 하듯 시꺼먼 양복바지를 입은 놈들이 여덟이나 떼로 모여 있으니까. 문제는 나머지 놈들도 개입되어 있는가 하는 거였다.
저 안쪽의 사람들도 관련이 있어?
파출소장이 눈짓으로 물었다.
아냐, 그 사람들은 그냥 둬.
고깃집 사장이 미세하게 고개를 저어 답했다.
그럼, 이 어린애들 네 명은 뭐야?
파출소장의 시선이 이번에는 7번 테이블의 네 친구에게 향했다.
으음……. 잠시 망설이던 고깃집 주인은 이번에도 가볍게 머리를 흔든다. 연행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얘들은 신분 확인만 한 뒤 보내고, 저 조폭 놈들만 데리고 가서 약식 조사하면 되겠군.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 파출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낮은 목소리로 보안관의 이름을 불렀다.
“남광훈 씨?”
“네?”
보안관이 대답했다.
“보아하니까 힘깨나 쓰나 본데, 나이도 어린 양반이 너무 성질대로 살지 마요, 응? 그런 사람 많이 봤는데, 보통 끝이 영 안 좋습디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는 겁니다.”
그렇게 경고를 한 파출소장은 신분증을 돌려주고 여전히 조폭들과 말씨름을 하고 있는 백발의 경찰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뭐, 내비 두자고. 어쩌겠어, 자기가 안 맞았다는데. 그런데, 생활하는 아저씨들은 잠시 서로 같이 가주셔야겠어.”
“아니, 왜 우리한테만 그래! 외모 가지고 차별하는 거야, 뭐야?”
조폭들이 발끈해서 아우성을 친다. 목청 좋은 놈들이 한꺼번에 떠들어 대니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파출소장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았다.
“혼자서 넘어졌든 간에 어쨌든 기물 파손했잖아. 놀았으면 어지럽힌 값은 내야지. 자꾸 귀찮게 떠들면 공공장소 주취 난동 및 폭력으로 입건하는 수도 있어. 어떤 게 더 귀찮은지는 알지? 당신들 전부 몸으로 법 공부깨나 한 것처럼 생겼는데?”
수갑을 꺼내 보이며 파출소장이 빙긋 웃었다.
이렇게 해서 간단하게나마 조서 꾸미는 시늉이라도 하고 주민번호를 따두지 않으면 이런 놈들은 또 이 가게를 찾아와 왜 신고를 했느냐며 난동을 피우고도 남는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친척이고, 형님 아우 하며 사는 이런 중소 도시에서 외지 놈들이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
그래서는 면이 서질 않는다. 그런 생리를 잘 아는지라 조폭들도 더는 대들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천하의 만배파라지만, 어디까지나 서울과 그 부근에서의 이야기였다.
“저분들은 관계없어. 우리 여섯이 일행이니까.”
의경들을 따라나서던 금목걸이가 실크남방과 흉터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 딴에는 윗사람을 보호한다고 꾀를 내본 것인데, 평생 이 짓으로 뼈가 굵은 백발의 경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자꾸 떠들면 지문 조회까지 하는 수가 있어.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차에 타. 선수끼리 왜 이래?”
그래서 여덟 명은 꼼짝없이 한 묶음으로 끌려 나갔다.
흉터사내는 문을 나설 때까지도 그 얼음 같은 시선을 보안관에게 고정시킨 채 쏘아보고 있었다. 물론 보안관 역시 조금도 지지 않고 호랑이처럼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보았다.
경찰차 세 대에다가 놈들이 타고 온 세 대의 고급차까지, 모두 여섯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떠나자 고깃집 주차장은 순식간에 황량해졌다.
“어, 형님. 피가…….”
파출소로 향하는 순찰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실크남방이 흉터사내의 손등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응? 그제야 흉터사내는 자신의 손등에서 실처럼 가늘게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그저 날카로운 단면에 살갗이 찢긴 정도. 고릴라 같은 놈이 휘두르던 의자가 떠오른다.
젠장, 그딴 핏덩이한테……. 사내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는 닳고 닳은 프로였다. 백주 대낮에 경찰차 안에서 차를 돌리라고 난동을 피울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후우우∼ 사내는 감정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고 자신에게 굴욕감을 안긴 그 애송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마. 송충이 같은 눈썹, 고릴라 같은 근육, 삐쭉삐쭉한 고슴도치 머리, 단단하게 각진 턱. 놈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시 한 번만 더 만난다면……. 사내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놈을 죽일 것이다. 비명 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못할 때까지, 쉬지 않고 괴롭히다가 아주 천천히 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