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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27화 (127/128)

<127화>

이스타지오의 수도 이스타잔.

많은 일이 있었던 그곳의 풍경은 알게 모르게 제법 바뀌었다.

“어이, 디디!”

“이봐, 함부로 그렇게 하면 디디 님께서 우릴 혼내신다고. 이제 단델리온 아그람 남작님 아니야.”

하역장의 인부들이 치는 장난에 단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냥 뭐든 하나로 통일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정말 혼내드릴지도 모르니까.”

“어이쿠, 죄송합니다. 남작님!”

단델리온이 농담처럼 날리는 일침에 하역장의 인부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걸어갔다.

모리스와 아카데미 동기였던 단델리온은 작위를 얻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승진에 관한 논의도 나오게 되었다. 그 소식에 단델리온은 아주 반색하며 달려들었는데, 그에 대해 모리스가 나중에 넌지시 말하길 그는 전부터 제게 심상찮게 구는 상사들에게 어떻게든 한 방을 먹일 궁리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잡은 이 금동앗줄에 아주 만족하고 있다고.

크라이언트의 후원 아래 공부를 하던 그의 여동생 또한 공신 가문의 혈족이 되며 아카데미에서 나름의 위치를 확보했다.

그녀는 메이 아발란쉬가 가끔 주최하는 크고 작은 파티에 초대되며 사교계에서의 입지를 다져갔고, 행정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이후 자신도 오라비처럼 수도에서 제 자리를 일구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수잔은 트리발로스에 넘어가 있던 아카데미 동기 켈리를 만났다.

“켈리!”

“어머, 수잔.”

배에서 막 내려 손에 온통 짐만 들려 있었던 켈리는 제게 달려와 폭 안기는 수잔의 모습에 여전하다는 듯 픽 웃었다.

기존 정보실은 엘렌이 크라이언트의 이름을 달고 꾸렸던 이들이었다. 때문에 일이 마무리된 지금 조직은 크라이언트와 에덴버로 이분되는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켈리는 트리발로스로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었다.

제 아래로 보이는 앙증맞은 정수리를 보고 있던 켈리는 곧 제 양손의 짐을 모두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녀가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수잔을 마주 안아 주며 말했다.

“다녀왔어. 수잔. 넌 어떻게 된 게 그동안 하나도 크질 않았구나.”

“네가 보내는 그 수많은 보고들을 누가 처리하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니, 그거?”

“물론. 그 누구보다 디저트에 사족을 못 쓰는 네가, 입에 먹을 걸 주렁주렁 달고 했겠지.”

“넌 그 깐족대는 입만은 놓고 왔어야 해.”

수잔이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자 켈리가 크게 웃어젖히며 화제를 돌렸다.

“아, 정말 숨 막히는 날들이었지. 이곳은 괜찮았어? 듣자 하니 여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던데.”

“아휴, 말도 마. 난 처음에 정말 꼼짝없이 잡혀 들어가는 줄 알았다니까.”

두 사람은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이스타잔에서의 새 터전으로 향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조직의 기틀을 잡은 뒤, 그곳의 수장으로서 에덴버의 한 축을 맡을 것이다.

새로운 바람.

귀족과 평민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이 새로운 바람을 반겼고, 그렇게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케이든 이스타지오 황태자는 즉위식을 준비하게 되었다.

* * *

엘렌이 들고 있는 서류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의전관.”

“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의 흔적 따위 찾아볼 수 없도록, 유례없는 규모의 즉위식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 그리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예. 각하. 충분히 염두에 두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엘렌이 언짢아 보이자 의전관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시작이시군.

그는 이것이 최선임을 어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각하. 모두 말씀하신 대로 최고급입니다. 보시면 이 디자이너의 안 같은 경우엔 블레미쉬 산 최고급 실크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수놓을 금사는―”

“아니, 아니. 블레미쉬 산인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제조사를 보세요. 블랑 사가 아니잖습니까.”

엘렌은 제가 보고 있던 기안을 의전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예복은 얼마가 들든 간에 최고급으로 하세요.”

“각하. 저도 블랑 사부터 알아보았습니다만, 이미 물량 마감이 되어서 이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

“그 마감된 물량을,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의전관.”

엘렌이 딱 잘라 말하자 의전관은 하소연을 시작했다.

“각하. 저라고 제가 모실 군주의 즉위식을 대충 치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했다간 분명 다른 곳에서 예산이 부족해질 겁니다. 전하께서는 의복에 쓰는 돈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백성들에게―”

“그 부족한 돈은 얼마가 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일단 무조건 최고급으로.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각하.”

의전관은 고개 숙여 대답했다.

방금 그 결정으로 의전관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의 절반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솔직히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저걸 처음부터 다시 알아보라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전관은 막상 그 어떤 불평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사실 그로서도 그런 기안을 올리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알아보는 물건들이 없을 때마다 즉위식에 사용되는 물건의 질이 내려가는데, 그런 상황이 기쁠 턱이 없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니 가능한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후작이 나타나서는 모두 알아서 해 줄 테니 그냥 원하는 만큼 돈이나 쓰란다.

그렇다면 원하는 만큼 사치나 부리면서 우리 전하를 최고로 만들어 드리면 되는 게 아닌가.

그 어떤 귀빈도 감히 시도해보지 못할, 그런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서 말이다.

‘전하, 기다리십시오! 제가 세상 최고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의전관은 실실 웃으며 바삐 발을 놀렸다.

* * *

의전관을 보낸 엘렌은 황궁 도서관의 서고에 들렀다.

“그보다 각하. 일단은 수여식이 문제입니다.”

“수여식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관을 내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황실에는 선대도, 선선대도, 심지어 태후도. 혹은 4촌 이내의 손윗사람조차도 없습니다.”

“……이건 전하와 상의가 필요하겠군요. 의전관은 내가 체크해놓은 부분을 확인하도록 하지요. 이에 관해서는 내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엘렌은 즉위식 외의 행사에서 비슷한 선례가 없었는지를 찾는 중이었다.

기록 속에서 황실의 행사를 어떻게 치러냈는지를 확인해, 관을 수여할 대체자를 찾는 것이다.

엘렌은 자신이 혼인 쪽을 볼 테니 이클립스 황녀에게는 장례 쪽을 확인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산더미 같은 책들을 모두 꺼낸 그녀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각자 독파를 시작했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집중해서 자료를 훑고 있는 그녀의 뒤에서 스윽 인기척이 나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적당히 하라고 말했었는데. 내가 온 줄도 모를 정도는 너무한 것 아닙니까?”

엘렌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전하?”

케이든은 어딘가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자그마한 트레이에 허브용 티 세트를 들고 서 있었다.

달칵. 트레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그는 손수 찻주전자에 가져온 허브를 넣더니 쪼르륵 차를 우려내었다.

은은한 자스민의 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가 그녀의 앞에 찻잔을 내려주고는 눈을 샐쭉하게 뜨며 말했다.

“적당히 한다더니. 아무리 봐도 쌓인 책으로 누구 하나는 족히 압사시킬 양인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행히 그런 사람은 나오지 않았지만요.”

엘렌이 쿡쿡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러자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케이든이 또 샐쭉해져서는 말했다.

“정말 한 마디도 지질 않는군요.”

“제가 원체 승부에 강해서요.”

그녀의 말에 결국 케이든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한바탕 쿡쿡 웃은 그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옆자리 의자를 빼 앉았다.

“됐습니다.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기록이요. 전하께 관을 드릴 사람이 없더군요.”

“아…… 그렇지요. 지금은 부황께서 계시지 않으니.”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그래서 적당히 혈연으로나마 손윗사람 되는 이를 찾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여의치 않더군요. 그래서 혹 이전에 다른 선례는 없었는지를 찾아보고 있었지요.”

“그래서 책이 이렇게…….”

그가 질린 얼굴로 책상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엘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뒤져서 성과만 나온다면 얼마든지 할 만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케이든은 그녀의 태도가 감동이라기보다는 영 못마땅한 듯 아주 불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몸이 먼저라고 몇 번을 말해도 그대는 어째 듣질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게 제 마음대로 되질 않아서 저는 전하께 제 마음을 내어드린 것이니까요.”

또 예고 없이 고백이 날아왔다. 서슴없이 날리는 그녀의 선언에 케이든은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엘렌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 웃었다.

어머. 귀여워라.

케이든은 홧홧하게 열이 오른 제 귓바퀴를 숨기지도 못한 채, 저를 뚫어져라 보는 엘렌의 눈빛에 괜히 찔끔해 물었다.

“가, 갑자기 왜 이렇게 봅니까?”

“글쎄요.”

엘렌이 장난기 머금은 얼굴로 웃으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은 돌리지 않자 케이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봤다가, 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이게 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일이란 것은 압니다. 알지만 조금만 더 조심해 달라, 그런 말이에요. 그대를 나무라는 게 아니라…….”

“맞습니다. 제가 전하를 이렇게나 생각하는 게지요. 그런데 그럼 그에 마땅한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케이든은 부끄러움을 넘어서 정말로 당황하고 말았다.

보답? 갑자기 무슨 보답?

국고보다 더 크고 넓은 것이 제 창고면서…….

케이든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엘렌의 대담한 한 마디가 떨어졌다.

“키스는 안 해 주시나요?”

키스?

덜컹,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또다시 얼굴을 화르륵 붉힌 케이든은, 제 얼굴만큼이나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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