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바로크 일가와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의 처형이 결정되었다.
황녀의 증언 아래, 20여 년을 수많은 귀족들 위에서 군림해 온 바로크가는 그렇게 끝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클립스 이스타지오는 말했다.
비록 본인이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나 혈연의 죄에 깊이 책임을 느끼며, 감히 제가 이 황궁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자신의 직위와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이곳을 나가겠다고.
재판장에서 끌려 나가는 내내 헤모니 바로크는 허망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벨라테스 이스타지오는 제 아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이제 그들의 역사는 바뀌었다.
크렘벨은 2대에 걸쳐 황실을 노린 반역자들이 되었고, 바로크는 황위에 욕심을 내 나라를 팔고 황제까지 시해했으나 장렬히 실패한 이들이 되었으며,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는 그들의 모든 야욕의 구심점으로서 남게 되었다.
기록으로 남은 죄는 그것이 소실될 때까지 영원을 이어갈 것이다.
그들의 최후까지 담아서, 아주 오래도록.
* * *
“축하드립니다, 전하.”
재판장을 나선 케이든에게 모리스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평소 표현이 많지 않은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로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숙원을 이루셨습니다. 참 오래 걸렸군요.”
“그러게. 오래 걸렸지.”
케이든이 픽 웃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말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과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군.”
생각이 복잡한지 걸어가는 그의 걸음이 느렸다.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던 모리스가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몰아쳐서 그러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는 것은 분명 기뻐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케이든은 그의 말에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일단 결과를 후작에게 전해주어야겠어. 후작이 있는 곳으로 가지.”
그는 그리고는 별다른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줄곧 마음에 담아왔던 모친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혔다.
자신을 줄곧 괴롭히고 견제해 오던 골칫거리 바로크를 치웠다.
저를 위험하게 만들었던 크레센트 역시 사라졌고, 비록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백성들도 지켜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쌓아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새로운 시작이라며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몇 안 되는 것이라도,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잃은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컸다.
아버지.
그 넓고도 허한 빈자리.
절친했던 친우의 배신과 상처. 허무.
물론 그 끝에 얻어낸 저만의 사람이 있었다.
그 배신이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 사람. 하나를 잃었기에 제게 찾아올 수 있었던 그런 사람.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슬픔도 잠시 잊혀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보고 있을 때뿐.
이렇게 잠시만이라도 틈이 생기면 다시 우울감이 물밀듯 밀고 들어와 감정이 정신없이 너울지는 것이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표정은 잘 관리해야 해. 모두가 불안하지 않도록, 내가 잘…….’
케이든은 제 뺨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녀가 저를 보고 걱정하지 않도록, 침대에 누워 편히 몸 회복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자신이 잘 균형을 잡아야 했다.
* * *
엘렌의 상태를 보러 들른 케이든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했다.
엘렌, 무슨……
들어 봐요, 테드. 이건……
“이게 무슨 소리지?”
바깥으로 들려올 정도로 두 사람 다 소리가 높았다.
케이든이 묻자 모리스는 글쎄요, 하는 작은 대답과 함께 방에 노크를 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오가던 소리가 뚝 멎었다.
곧 테리어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 전하. 오셨습니까.”
“잠깐 진행 상황을 전할 겸 들렀네. 후작이 깬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그의 물음에 테리어드가 말도 말라는 듯 폭 한숨을 내쉬며 문을 활짝 열었다.
“전하. 일단 들어오셔서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엘렌이 도통 말을 듣질 않습니다.”
“후작이?”
케이든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방 안에 발을 들였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엘렌이 환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전하.”
참 눈부신 웃음이었다. 방금까지 우울감에 젖어 있었던 케이든은 그녀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후작. 몸은 좀 어떻습니까.”
“제법 괜찮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것을요.”
“다행이군요. 사실 걱정도 좀 했었는데 말입니다.”
케이든이 침상 곁에 있는 스툴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엘렌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전하께서요. 무엇을 말씀인지요?”
“몸 상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그대이니, 지금도 몸 아픈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움직이려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그의 말에 엘렌의 눈가가 움찔했다. 그녀는 곧 아하하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전하. 아닙니다. 아무리 저라도 몸이 상할 정도로는―”
“아니긴!”
테리어드가 냅다 끼어들어 말했다.
“전하. 글쎄 엘렌이 뭐라는지 아십니까?”
“테드.”
엘렌이 그의 입을 막으려 불렀지만 테리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전하의 즉위식은 본인이 준비하고 싶답니다!”
“뭐?”
케이든의 고개가 엘렌이 있는 쪽으로 홱 돌아갔다.
“설명이 필요할 듯한데요. 후작.”
그의 눈초리에 엘렌이 조금 난처한 눈치로 웃으며 말했다.
“저도 무리하고 싶지 않아 빨리 이야기를 꺼낸 것이랍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시간을 들여 준비를 마치고 싶은 것이지요.”
“그대가 즉위식 준비에 손을 보탠다는 것부터가 무리가 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계속 누워만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휴식을 취하는데―”
“누워 있어야만 마이너스가 제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케이든의 일침에 엘렌이 슬며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런 그녀를 봐주지 않고 말했다.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즉위식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드린 후 의전 담당이 된 이에게 준비를 이를 거고.”
“하지만―”
갑자기 엘렌이 그의 손을 덜컥 잡아 왔다.
예고 없이 닥쳐온 스킨십. 케이든의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속으로 외쳤다.
이, 이 사람이 겁도 없이 무슨!
“하지만 제가 준비해드리고 싶어요. 국장만으로도 충분히 힘드실 텐데, 축하받으셔야 할 일까지 스스로의 손으로 하게 두고 싶지 않아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더더욱요.”
그녀가 그를 애틋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들어오기 전 했던 감정의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의 심장은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알고 이러는 것이다. 이 철저한 사람 같으니!
케이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을 바르작대었다. 하지만 엘렌은 그런 그의 손을 놔 주지 않고 오히려 더 꼭 붙잡으며 말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전하께서 서 계실 공간의 꽃잎 한 장까지 모두 완벽하게 준비해 드리고 싶어요.”
“안,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그곳에서, 제게 청혼해 주세요.”
“어찌 아픈 이의 손을 빌려서…… 뭐, 지금 뭐라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그 어떤 여인도 받아보지 못했을 청혼을. 그곳에서 제게 해 주세요.”
엘렌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케이든은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청혼?
엘렌은 조금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따지자면 청혼은 이미 받은 것이긴 하지요. 하지만 전 전하께서 제게 애정을 담아, 우리의 목표가 아닌 절 생각한 청혼을 해 주셨으면 좋겠답니다. 그래도 안 될까요?”
그는 계속해서 제 심장을 때려오는 그녀의 말 탓에 황망하게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제 손으로 전달되는 말랑한 촉감과 끊임없이 옆통수를 자극하는 저 가녀린 여인의 눈빛이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청혼. 청혼.
애정을 담아 청혼.
즉위식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게 이 여인에게 내가.
우리는 결혼할 것이라고, 모두의 앞에서……!
케이든은 오른손도 마저 들어 그녀의 손을 붙잡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 모든 마음을 담아 그대에게 이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청혼을, 반드시 멋지게 해 보이겠습니다.”
“전하!”
옆에서 듣고 있던 테리어드가 외쳤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케이든은 엘렌을 보았다가, 테리어드를 보았다가, 다시 엘렌을 보았다.
상큼하게 웃고 있는 낯이 참으로 어여뻤다.
하지만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테리어드의 눈빛이 퍽 매서워 그는 큼큼 목을 다듬은 뒤 한 가지 당부를 덧붙였다.
“다만 정말 건강에는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대가 쓰러지는 날이 내가 쓰러지는 날입니다.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는 그대도 알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럼요. 저도 제 몸 아까운 줄은 안답니다.”
엘렌은 쿡쿡 웃으며 그의 손등에 촉, 짧은 키스를 남겼다.
케이든의 얼굴이 시뻘겋게 터져나간 것은 그다음이었다.
* * *
반역에 연루되어 신병을 구속당한 귀족들의 처분이 모두 결정되었다.
꿈에 부푼 도전에 실패한 자들은 그 대가로 저희가 가진 것들을 남김없이 내놓게 되었다.
지위, 재산. 마지막엔 그 목숨까지.
졸지에 모든 것을 잃게 된 그들은 처절한 절규를 부르짖었고, 그렇게 기존 귀족들의 약 3분의 1이 작위 강등 혹은 박탈, 재산 몰수, 사형 선고 등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클립스 황녀가 완벽하게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지리멸렬한 공방이 펼쳐졌을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황궁을 나가겠다는 선언을 마쳤다.
이제는 이클립스 이스타지오 황녀가 아닌 그저 이클립스가 된 것이다.
그녀는 에덴버령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며 한시 빨리 황궁을 나가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다만 그녀의 출발 전 에덴버 후작이 제안하길, 자신의 몸이 좋지 않으니 자신을 도와 태자 전하의 즉위식을 준비한 후 영지로 떠나자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클립스의 출신 탓에 반대하며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도 그것이 대외적으로 포용력 있는 진정한 군주임을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이 된다는 설득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고, 그렇게 시일이 지나 공개처형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