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깜짝 놀란 엘렌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포개진 케이든의 입술이 따듯하고도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훑어왔다.
수줍은 듯 조심스레 움직이던 그의 입술은 곧 장난스레 그녀의 아랫입술을 건드려 오기 시작했다.
살짝 당기며 떨어졌다가, 놓치면 아쉽다는 듯 다시 붙어왔다가.
전해지는 온기와 눌려오는 입술의 촉감.
따듯하고도 말캉하게 그녀를 감싸오는 그의 입술에 그녀가 어깨를 떨자, 그 작은 흔들림을 알아챈 케이든이 촉,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감각이 사라졌다. 엘렌은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었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부시게 푸른 아콰마린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애틋한, 벅찬 기쁨이 담긴 눈동자.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던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그대의 모습은 모두 그것이 두 번째였기에 나온 것이라고 했지요.”
엘렌은 그 말에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가 아는 그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케이든은 예전의 기억을 상기하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
“그대는 무척이나 강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자신을 던져 넣길 주저하지 않지요. 아주 용감하게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입가는 엷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행복을 그리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로서는 걱정되기 그지없는 부분이지만 그런 강단이 있는 그대이기에 나는 그대를 경애하고 있습니다.”
촉.
케이든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 위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경애의 키스.
“내가 아는 그대는 아주 다정하지요. 가족에게 각별하면서도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는 날 안아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포근하고 따듯한, 내겐 단 한 사람뿐인 안식처였으니까요.”
그는 부드럽게 풀린 눈꼬리로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함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눈을 맞춰오는 그의 시선에 엘렌은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언제나 저를 향한 칭찬에는 ‘맞아. 난 그런 사람이지.’라며 당당히 받아들여 왔었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는 진심 어린 고백에는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케이든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는 참 현명합니다. 예상치 못한, 그리고 겪어보지 못한 미래를 가게 되더라도 그 모든 것을 성공까지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지요. 나는 그런 그대에게 새삼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케이든이 이번에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남겼다.
촉, 제 뺨에 닿아오는 감촉에 화들짝 놀란 엘렌은 제가 얼굴을 돌렸던 이유도 잊고는 홱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귀 끝부터 뺨까지 온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엘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요. 계속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게…… 아니요.”
엘렌은 짧게 대답만 남기고는 저를 지그시 마주 봐오는 케이든의 눈을 피했다. 그녀의 뺨이 당장이라도 쏘아 올려질 밤의 불꽃처럼 불타올랐다.
케이든이 작게 쿡쿡 웃고는 말했다.
“그럼 다시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
“내가 아는 이 모든 그대는 그대의 두 번째 생이었기에 가능했던 모습입니까?”
엘렌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아.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정한 사람.
그가 이야기하는 내내 당혹감에 애꿎은 이불만 쥐고 있던 엘렌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는 방울방울 눈물진 눈가를 곱게 접어 말했다.
“아니요. 전하께 마음을 내준 제 진심이랍니다.”
저도 제게 손 내밀어 주신 전하가, 그 어렸던 날 제게 숨 쉴 틈을 내어 주신 전하가 가장 특별해요.
제 모든 걸 내어 주어서라도 온전하길 바랄 만큼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당신이 통치하는 세상을 바라요. 당신의 삶을 지켜보고 싶어요. 당신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당신이 웃었으면 해요.
당신이에요. 당신이어야만 해요.
그들은 더욱 깊게, 서로를 삼킬 듯 숨을 나누었다.
* * *
달칵.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온 케이든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군.”
“후작은 어떻습니까?”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모리스가 물었다.
“잠들었지. 안색이 제법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약이 잘 듣는 모양이더군.”
그는 멍하니 제 두 손을 내려다보다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제 입술께를 눌렀다.
출혈량이 많아 하얗게 질렸던 입술 위로 제법 돌아온 옅은 분홍빛 혈색.
색색 작은 숨소리가 날 때마다 움직이던 가녀린 가슴과 어깨.
그가 돌연 꽈악 주먹을 쥐고는 말했다.
“당분간 후작은 절대안정이네. 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얘기도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해. 알겠나?”
그가 모리스를 보며 신신당부하자 모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체셔 경도 말이야.”
“당연하지요. 제가 알아서 잘 자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서야 케이든은 깊은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뱉었다.
후우―.
“그럼 이제…… 이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으러 가자고.”
케이든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다시 공석에 몸을 드러냈다.
그동안의 침묵이 무색하리만큼, 나타난 그의 행동은 아주 빠르고 단호했다.
먼저 트리발로스의 상황을 확인한 그는 모든 군을 급히 재정비해 곧장 리넥스의 국경지대로 군사를 보냈다.
그다음은 수도 내부의 정리였다.
다행히도 수도를 비롯한 중앙부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무력 충돌은 있었으나 전투 자체가 정복 목적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대규모 군대의 출정을 보게 된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그는 그런 분위기를 풀기 위해 크레센트가 내려놓았던 수도봉쇄령을 철회시켰다.
수도의 재개방.
불온한 분위기를 풍기며 도시를 돌아다니던 군인들이 그 필요를 잃으며 거리에서 사라졌다.
고립의 공포가 가시고 외부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익숙함을 찾은 거리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다시 활기를 띠고 움직이며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스릴 백성들도 중요했지만, 귀족들의 사회 질서를 잘 확립해 두는 것이 사실상 이번 사건의 끝맺음이라고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부황인 헤지스의 시신을 잘 보존할 것을 명한 그는, 모든 것을 정리 후 부황께서 편히 눈감으실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장을 미룰 것을 발표했다.
그렇게 귀족들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케이든은 엘렌의 안배를 아주 충분히 이용해 줄 생각이었고, 그의 부름으로 재판장에 선 이클립스는 말했다.
나, 이스타지오의 황녀이자 바로크의 피를 이은 이클립스 이스타지오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의 죄를 고하노라고.
* * *
황궁에 마련된 재판장.
그곳에서는 수많은 승리자와 패배자들이 서로 극명한 온도 차를 보이며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있었다.
케이든이 헤모니 바로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른 할 말은 없는가?”
“…….”
“그대가 그토록 부인하고 부인해왔던, 반역과 더불어 아주 끔찍하기 그지없는 황족 암살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역사에 그대의 변론 한 줄 기록되지 않게 할 셈인가?”
그러자 바로크 후작이라 불렸던, 이제는 그저 왜소한 노인에 불과한 남자가 말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결했다.
그곳에 자리한 귀족들은 모두 케이든의 심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10대 시절의 황태자를 기억하는 이들의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나도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는 없겠지.”
케이든이 꼬고 앉은 다리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리며 말했다.
“바로크 일가 전원,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판결이 떨어졌다.
사형.
결코 가벼운 벌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놀라지도 않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황실과 관련해 얹힌 죄목이 하나만 있어도 목이 날아가기 마련인데 이 경우엔 무려 두 개.
기록에 따르면 시신을 효시해 두는 것이 일반적일 정도의 중죄였다.
“그대가 이 모든 일의 주모자인 것은 명백하다. 예전 기록을 따라가자면 사지를 잘라 버리는 것이 마땅하나, 나는 단두대에서의 공개처형을 명하겠다.”
공개처형.
모든 귀족들이 가장 비참한 말로라고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제게 닿을 수 없는 존재라 여기던 평민들이, 처참한 몰골을 한 제게 욕을 갈기고 더러운 것들을 던지길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헤모니 바로크는, 제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선고에도 그저 조용히 먼 바닥을 응시했다. 빳빳하게 고개를 들지도, 지나치게 숙이지도 않은 그저 담담한 눈빛.
그러나 벨라테스는 달랐다.
“벨라테스 이스타지오.”
그의 부름에 벨라테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정면의 케이든이 아닌, 측면 증인석에 있는 제 딸이었다.
벨라테스 이스타지오가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클립스, 네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다만 시선만 제 딸에게 고정한 채로 혼잣말을 했다.
네가 왜. 대체 왜.
그러나 마찬가지로 제 모친인 벨라테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클립스만은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작은 흐느낌에 이클립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폐가 짓눌리는 듯 무거운 고통이 가슴을 뭉개왔다. 그녀는 제 명치와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그 어떤 비극도 없이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만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상황이, 욕심이 마음만 생각할 수는 없게 만들었다.
이미 저지른 죄는 그녀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클립스는 눈을 질끈 감고 제 어미에게서 눈을 돌렸다.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대 또한 마찬가지다. 황실의 일원이면서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너무 많이 저질렀지. 부황 폐하와, 내…… 어머니까지.”
황녀는 길리언의 시신에서 빼낸 것과 엘렌에게 받은 두 종류의 편지를 합쳐 두었던 종이 뭉치를 증거로써 보였고, 거기에 그녀의 증언이 더해지며 크렘벨과 바로크 일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클립스 황녀의 손으로 공개된 황후 암살과 반역의 죄.
“그대에게도 바로크 일가와 같이 단두대에서의 처형을 명하지.”
황태자의, 10여 년을 기다린 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