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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23화 (123/128)

<123화>

엘렌이 눈을 뜨자, 그곳에는 테리어드가 있었다.

“……엘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얼굴빛이 바뀌며 그녀를 불렀다.

“정신이 드니?”

“네. 여기는……?”

테리어드가 화색이 만연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많이 갈라지는구나. 물부터 조금 마시는 게 좋겠어.”

그가 옆에 준비되어 있던 물병을 들어 잔에 물을 조금 따른 뒤, 엘렌의 입가에 가져다주었다.

“고마워요. 테드.”

“이런 일로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구나.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지, 정말 너는…….”

그는 처음의 안도가 벌써 다했는지, 어느새 표정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혼내기 시작했다.

“네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니? 나는 듣고 졸도하는 줄 알았다. 세상에, 애는 배를 찔렸다지, 심지어 그걸 또 스스로 뽑았다지!”

“아하하……. 미안해요.”

“듣기만 한 나도 가슴이 철렁하는데, 그걸 눈앞에서 보고 있었던 이들은 심정이 어땠겠니. 세상에, 나는―”

“정말 미안해요, 테드. 그런데 그보다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엘렌이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물었다.

테리어드의 잔소리 버튼이 눌린 것은 알았지만, 당장 이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의 말들을 받아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가 무사한지, 일은 무사히 끝났는지 확실히 들어야만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조금 씁쓸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테리어드는 곧 환히 웃는 표정으로 낯을 바꾸며 대답했다.

“그럼. 전하께서는 무사하시지.”

“엘은, 아버지와 동생은요?”

“무사하고말고. 나머지도 거의 정리가 됐단다. 이제 공식적 절차만 밟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다행……이네요.”

엘렌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침대에 편히 기대 누웠다.

끝났어.

끝났구나.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높은 천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처음 돌아와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토록 간절히 갈구했던 이날.

엘렌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바꿨어. 바꿔냈어. 내가 해냈어.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한 눈물이 그녀의 눈꼬리를 따라 베개 위로 떨어졌다.

테리어드는 그런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다, 이내 침대 옆 협탁을 뒤져 작은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고생했다.”

조곤조곤한 테리어드의 말에 엘렌의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테리어드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기보다 그저 가만히 우는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렇게 울던 그녀의 눈이 조금 발개졌을 때쯤.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케이든이 들어왔다.

“후작!”

그는 정신없이 달려온 듯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달려와 본 것이 그녀의 우는 모습이었다. 케이든은 더욱 패닉에 빠져서는 물었다.

“후작……? 많이 아픕니까? 괜찮습니까? 이보게, 체셔 경. 지금 대체―”

케이든이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오른손으로 제 눈가를 가린 엘렌은 왼손바닥을 들어 그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엘렌은 슥슥, 테리어드가 쥐여 준 손수건으로 제 눈가를 닦고는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조금 감정이 북받쳐서…….”

케이든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대는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저도 될 수만 있다면 날렵하게 검날을 쳐낼 수 있는 멋진 기사님이 되고 싶었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케이든이 또 농담을 던지는 그녀에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외쳤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그대는 그냥 내가 찔리게 두었어야 했습니다. 그대의 목숨을 담보로 살아남아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요!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겠지요.”

엘렌이 슬쩍 그의 말을 이어받으며 말했다.

“저도 전하가 다치는 걸 볼 수가 없어서……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모리스는 흘끗 테리어드의 눈치를 살폈다.

지그시 엘렌을 보고 있던 테리어드가 그런 모리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오가는 화제가 내밀한 남녀의 이야기로 번질 것 같았다. 모리스는 그에게 밖으로 나가자며 조용히 고갯짓을 했다.

조용히 제 친우를 바라보던 테리어드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를 내보낸 모리스가 나가며 방의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방 안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조용한 공기만이 흘렀다.

엘렌은 부드러운 눈길로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케이든이 얼굴을 붉히고는 물었다.

“그대의 그 말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습니까? 그러니까―”

“네.”

엘렌이 대답하며 살포시 웃었다.

“저도 몰랐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이제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지요.”

케이든이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제 마음 또한 전하와 같답니다.”

“―!”

뻐끔뻐끔 입술만 달싹이던 케이든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엘렌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어머. 막상 대답을 들으니 썩 내키지 않으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버린 케이든이 당황해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아직 준비한 말이 다 끝나지 않았던 엘렌은 눈썹 사이를 모아 애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신가요? 하지만 전 전하께서 이 말까지 다 듣고 나시면 그러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답니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케이든은 방금까지 휘두르고 있던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엘렌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대의 생각을 가급적 존중하려 노력하지만 방금 그 말은 속상하군요.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확신을 주지 못했나 조금 자괴감도 들고 말입니다.”

“음, 저도 보통의 평범한 일로는 전하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엘렌이 말을 하다 말고 하하,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이건 조금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될 거라서요. 어쩌면 전하께서 받아들이지 못하실 수도 있답니다…….”

엘렌의 목에 걸려 있던 붉은 루비 반지가 툭, 옷깃 바깥으로 굴러 나왔다.

* * *

엘렌의 이야기를 끝까지 전해 들은 케이든이 멍하니 정면의 이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반지가 정말로 무언가 능력이 있었단 말입니까?”

“네.”

“게다가 이전의 과거에서 나는 길리언에게 죽었고, 그대는 길리언과 한 편이었고. 크라이언트 일가는 어째서인지 배신당해 죽었고……?”

엘렌이 아프게 웃으며 말했다.

“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제겐 전하가 필요했고, 저는 전하를 만난 그 순간부터 오늘을 그려 왔지요.”

그녀의 말에 케이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쩐지…… 그대가 갑자기 변했다고도 생각했고, 분명 내게 어떤 목적을 두고 접근한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엘렌은 그런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있었다.

케이든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춰왔다.

“그럼 그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하고 온 겁니까?”

“그렇게 되겠지요.”

그녀의 대답에 케이든의 표정이 다시금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 다정한 사람.

엘렌은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실망할 거야. 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사람이라고 온 마음으로 부딪쳐 왔는데, 정작 나는 이런 속물적인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오며 말했다.

“많이…… 고통스러웠겠습니다.”

케이든은 그녀의 손을 당겨 그녀가 저를 쳐다보도록 하고는 말했다.

“지금은 무사히 내 눈앞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지만 지금 그대의 모습을 보면 그런 내 생각은 모르는 듯합니다.”

케이든과 엘렌의 눈이 마주쳤다. 엘렌은 살짝 눈동자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는 말했다.

“……전하께서 아는, 모든 것을 척척 해결하는 엘렌은 모두 그것이 두 번째였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전하의 편을 드는 엘렌 또한 첫 번째 생을 실패했기 때문에 나온 인물이지요. 저는―”

케이든이 왼손까지 마저 올려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엘렌이 이야기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아무리 급박한 와중이었다 하더라도 그대가 한 이야기를 잊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그러는 겁니다. 목도 내어줬는데 이깟 자상쯤은 괜찮다고.”

엘렌이 흠칫 놀라 말했다.

“제가…… 그랬군요.”

“워낙에 다들 격앙되어 있던 때이니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단 말입니다.”

그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애써 침착한 척 말을 하고는 있지만 그로서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인 듯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물을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사고가 있었던 걸까, 다른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걸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렇게 지나갔단 말입니다.”

“……그랬군요.”

“로에리로 와 준 것 또한 그랬습니다. 정말 어쩌면 그렇게 기적적인 타이밍에, 그것도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된 일처럼.”

그가 엘렌의 목에 걸린 반지를 손에 쥐었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케이든이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그때 반지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던 게…….”

“네. 이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제 회귀에 관해서는 오늘처럼 모든 일이 다 끝난 날, 그때 말씀드릴 생각이었죠. 미리 말해봤자 불안만 가중될 테니.”

“……그랬습니까.”

케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엘렌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야기는 모두 들었으니 이제는 내 차례군요. 그렇지요?”

“네. 하실 말씀이 있다면 얼마든지.”

케이든은 대답하는 엘렌의 눈을 보았다. 드물게도 긴장이 어린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맞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물기 어린 눈가를 닦아주었다.

“전하……?”

엘렌이 불안이 깃든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그대로 손을 옮겨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따듯한 손바닥의 온기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 그는, 그대로 엘렌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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