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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22화 (122/128)

<122화>

푸욱.

단단한 검날이 여린 살을 갈랐다.

제가 찔릴 것을 예감한 케이든은 그대로 힘을 주어 검을 내리그었다.

서걱, 길리언의 어깨가 베여 나갔다.

“크윽……!”

고통에 찬 길리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케이든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마찬가지로 파고들 검날을 생각하며 긴장하고 있던 그는, 길리언과 달리 저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음을 깨닫고는 의아함을 느꼈다.

케이든은 저를 찌른 손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후작!”

뚝. 뚝.

단검을 타고 내려온 피가 길리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가…… 분명히 지갑은 될지언정 호위는 못 되노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

옆구리를 찔린 엘렌은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얼굴도 목소리도 온통 일그러져 덜덜 떨려 나오고 있었다.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길리언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 단검이 찌르고 있는 대상을 본 그의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케이든의 가슴을 노리고 밑에서부터 짓쳐 들어가던 단검은 중간에 끼어든 엘렌으로 인해 미처 올라가지 못하고 그녀의 복부에서 멈추어 있었다.

케이든이 질겁을 해서는 외쳤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옵니까! 지, 지혈을……!”

“검을 놓치지 마십시오, 전하!”

엘렌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신이 팔린 케이든 대신 길리언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목도 내어줬는데 이깟 자상쯤이야…….”

“하지만―”

“그보다 앞에 주의하십시오, 전하!”

그녀가 이를 악물고 뱉는 말에 케이든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와 검을 번갈아 보다 검을 잡았다.

반면 그녀를 마주보고 있던 길리언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고통에 젖은 엘렌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 검을 뽑으면 저 여자는 당장 죽는다.

이대로 네가 죽으면 나도 괜찮아질까.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보고 있는 길리언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결국 제가 준비한 검을 스스로 포기하고는 손을 놓았다.

스르륵. 길리언의 손이 내려가자 엘렌은 그를 향해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결국 제가 끝을 맺어야만 하는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야만 이 악연이 끝난다는 것이겠지요.”

길리언은 제 벌어진 어깨를 부여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제게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렌이 제 옆구리에 박혀있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길리언이 눈을 크게 떴다.

안 돼.

그의 시선이 그녀의 복부에 박힌 듯 붙들렸다.

엘렌이 단검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제이시?]

[각하. 이제 탈출하시고 나면 언제나 곁에서 각하를 호위해 줄 인력이 없습니다.]

[그건…….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다만 각하께서도 만일의 순간에 도망치실 수단 한 가지 정도는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고 도망치셔야 해요.]

[내가 다른 기사들처럼 한 방에 목을 날릴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단검을 이렇게 잡고―]

푸욱.

길리언의 목과 쇄골 사이로 온 힘을 다해 내려친 엘렌의 단검이 박혀 들었다.

그녀가 찌른 검을 놓고 비틀비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길리언 크렘벨.”

“…….”

“계속 당신이 죽길 바랐지만…… 사실 죽이고 싶지는 않았어.”

길리언은 저도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나오지 않는 말들을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왜? 왜 너는 날 죽이고 싶지 않았나.

너도 나처럼 이성을 좀먹는 무언가에 침식당하고 말았던 건가. 너도 나처럼 미쳐가는 기분을 느꼈던 건가. 그래서 너도 나처럼―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의 마지막 희망까지 부수고 말았다.

“당신과…… 똑같아지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날 죽이러 올까 봐.”

“―!”

“시간이 다시 돌아가지 않길 빌자. 당신도 나도…… 이젠 쉴 수 있게.”

시간이 돌아가?

죽여?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한 번 너를 죽였고, 시간이 돌아가 너는 날 죽이러 왔다는 소리라도 하는 건가.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챙강.

길리언이 고통에 검을 놓쳤다.

엘렌의 당부 탓에 검을 놓지 못하고 있던 케이든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들고 있던 검을 내팽개치고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후작―!”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제 배를 움켜쥐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엘렌은, 그런 그의 부축에 힘없이 몸을 맡기며 쓰러졌다.

케이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를 안아 들며 외쳤다.

“후작, 괜찮습니까? 정신 차려요!”

“……전하. 제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었지요.”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알면서……!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나았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엘렌이 힘에 부치는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을 할까 봐, 그게 겁나서…….”

“그대가 이럴 줄 알았다면 그딴 말은 안 했을 겁니다! 제발, 정신 차려요, 제발! 곧장 치료를 하러 갈 테니―”

케이든이 그야말로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며 그녀를 불렀다.

길리언은 그 모든 장면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케이든이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코앞인데도 멀게 들려왔다.

쏟아진 피의 양이 너무 많았는지 곧 시야까지 점멸하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케이든이 달려가는 것 같았다.

하얗고 까맣게 흐려진 세상 속에서, 길리언은 생각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에서라면 난 적어도 한 번은 성공한 거로군.

그리고 끝내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해 버리고 만 너는, 나의 이 죽음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하겠지.

저 황태자는 너를 볼 때마다 너를 상처 입힌 오늘을 떠올릴 거다.

너희의 삶에는 나의 피로 씻을 수 없는 흔적이 남았지. 너희는 나를 평생 곁에 두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난 실패한 게 아니다.

버림받은 게 아니야.

난, 버림받지, 않았어…….

그렇게 차츰 꺼져가는 불꽃처럼, 길리언의 의식은 저 아래로 꺼졌다.

* * *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바로크 일가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크레센트의 목을 보고는 투항을 선언했고, 지휘할 후작과 벨라테스가 의지를 잃고부터는 나머지 병력들도 자연스럽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신병이 구속되어 있던 황제파 귀족들은 모두 자유를 되찾았으며, 그중에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포트 공작도 있었다.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끝까지 황제에게 충성한 그의 명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높았다.

황태자의 군대는 진군하는 내내 연행해 왔던 트라이아 공작을 비롯, 이번 일에 가담했던 귀족들은 모두 도망을 치거나 신병을 구속당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앞에는 이클립스 이스타지오가 있었다.

본래라면 황태자이자 이 세력의 핵심축인 케이든이 나서서 해야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황녀 이클립스의 권한을 보증할 이로 포트 공작만을 붙여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황태자의 행방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할 일이 없음을 확인한 황태자는, 그 길로 사라져서는 바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 *

“아버지가…….”

“예. 시신 수습도 미처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케이든은 망연히 제 부친인 헤지스 이스타지오가 누워 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면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왜 싸워야 했던 겁니까.

사랑하는 당신을, 이제는 볼 수 없는 겁니까.

전 누굴 증오하면 되는 겁니까…….

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헤지스의 주검은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케이든을 보던 슈탓트펠트 경이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다른 외상은 없으셨습니다. 스스로 결정하신 일입니다.”

케이든은 그저 조용히 관 속에 누운 헤지스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전하께 부담을 주고 싶으시지 않으셨던 듯합니다.”

그의 말에 케이든이 중얼거렸다.

“정말 알 수 없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시선도 표정의 동요도 없이 그가 말했다.

“본인은 나름 만족을 할 테니 그 희생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것을 지켜볼 이를 생각지 않은 행동에 화를 내야 할지…….”

슈탓트펠트 경 이안은 그 말에 대번에 엘렌 에덴버 후작을 떠올렸다.

태자 대신 상해를 입었다고 들었다. 꽤나 중상이라고.

예비 태자비라 공언하고 직접 구애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저 같아도 그런 사람이 저로 인해 그렇게 누워 있다면 미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는 황태자의 마음이 이해가 될 듯해 차마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덧붙이지 못하고 가만히 케이든의 옆을 지켰다.

“두 사람 다…… 정말 내가 감사합니다, 하고 기쁘게 웃으며 잘 살리라고 생각한 걸까.”

케이든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슈탓트펠트 경이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저 전하께서 그러하시듯 자신보다는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더 중히 여기셨던 것뿐일 겁니다.”

“내가 분명히 말했었거든. 그대의 몸을 아껴달라고, 부디 안전하게 있어 달라고…….”

그런데 또.

내 앞에서 또.

케이든은 허탈히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더 미치겠는 건 뭔지 아나?”

슈탓트펠트 경은 그저 묵묵히 그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상황을 초래한 게 결국 나의 부주의라는 거야.”

“전하.”

“그런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 제발, 나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그녀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아버지가, 돌아왔으면, 그러면…….”

그의 목소리가 떨리며 잦아들었다.

슈탓트펠트 경은 생각했다.

에덴버 후작 각하. 제발 빨리 정신을 차려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 무너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케이든이 헤지스의 관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을 때였다.

문 너머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지.”

그의 허락에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온 모리스가 말했다.

“전하.”

케이든이 맥없이 고개를 돌렸다. 마주 보이는 모리스의 얼굴이 제법 밝았다.

“에덴버 후작이 깨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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