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포위망을 펼치고 있던 크라이언트가의 병사들이 숲속으로 숨어들려는 길리언과 이클립스를 향해 달려왔다.
“저기다! 05시 방향에서 나온다!”
한 병사가 외치는 소리에 모든 사람의 주의가 삽시간에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모였다.
쯧. 혀를 한 번 찬 길리언은 곧장 지형지물을 이용해 숨어들려 몸을 날렸다.
삐이익―.
어둠 사이에서 재차 호각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하나둘씩 재빠르게 위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쪽으로 숨었어! 너희는 저쪽으로 가!
왼쪽도 놓치지 마! 수색해!
스산한 바람과 수많은 병사들이 사방에서 버스럭 수풀 스치는 소리를 울려댔다.
그들이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하자 길리언의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횃불들이 모여 밝아진 사위는 지나치게 밝았다. 한 번 노출되면 다시 어둠으로 숨어들 길은 요원해 보였다.
길리언은 결국 횃불들을 피해 원래 가려던 길에서 진로를 수정했다.
갑자기 뛰어가는 방향이 바뀌자 당황한 이클립스가 물었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거죠?”
“조용히 하고 뛰어라!”
길리언은 그녀에게 그저 서두를 것을 종용했다. 이클립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들켜야 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해!
그녀는 길리언의 눈을 속일 수 있도록 두 입술을 꾹 다물고 오른쪽 발목을 꺾었다.
풀썩.
균형을 잃은 그녀가 또다시 넘어지자, 팔이 뒤로 당겨지며 멈춰 서게 된 길리언이 그녀에게 역정을 냈다.
“이런 멍청한! 똑바로 뛰지도 못하나?”
“미안……해요. 하지만 드레스와 구두로는―”
드레스와 구두가 뛰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평생 동안 걸치고 살아온 것들이었다.
어떤 상황에도 넘어지지 않고 우아한 몸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해왔던 나날이었는데.
하지만 이클립스는 울상을 지어 보였다.
길리언은 급한 와중이라 차마 무어라 더 말을 하지는 못하고, 짜증 섞인 몸짓으로 그녀를 확 당겨 일으킨 뒤 말했다.
“다리에 힘 똑바로 줘. 한 번만 더 날 방해했다간 네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테니. 알겠나?”
흠칫.
이클립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깃든 것을 확인한 길리언은 다시금 그녀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방 또한 정신없이 그들을 쫓고 있는 와중 1분 남짓한 시간은 굉장히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달려가던 크라이언트 병사들의 반대편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쪽이라는 것 같습니다!”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포위망을 전개 중인 듯하니 우리는 역으로 펴지. 지금부터 이 숲을 수색한다!”
크게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
‘케이든 이스타지오……!’
멈추지 않고 달릴 것만을 종용하던 길리언이 스스로 우뚝 멈춰 섰다.
앞도 뒤도 막혔다. 진퇴양난의 상황.
그 순간이었다.
바람결에 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클립스 황녀를 찾지 못했으니 황녀의 신병 또한 유의해서 수색하게!”
엘렌의 목소리.
엘렌.
마지막 순간까지 황태자의 옆에 서 있는 엘렌. 곧 죽어도 자신의 곁에는 서지 않겠다던 엘렌.
엘렌. 엘렌. 엘렌.
그런데 그때 그의 뒤에서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익―!
“여기다!”
화르륵, 횃불들이 그의 발치를 비추었다.
“……!”
길리언의 시선이 빛이 있는 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의 전신이 빛 아래에 노출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황녀도 같이 있다! 여기다!”
발각당했다.
길리언은 잠깐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칫, 낮은 신음을 내뱉고는 그대로 이클립스를 끌고 달렸다.
그러나 병사의 수는 충분했다. 그 말인즉 병사들의 포위망은 한 번 불빛 아래 노출된 그를 놓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촘촘했다는 뜻이었다.
“이쪽으로 온다! 놓치지 마라!”
크라이언트의 병사들은 소리치며 그를 추격했고, 그 소란을 눈치챈 케이든 측의 병사들 또한 반대편에서 점점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리가 그를 중심으로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고, 한 병사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의 칼끝이 그들을 향했다.
“투항해라, 반역자 길리언 크렘벨!”
속속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병사들과 횃불 아래 노출되어 목 아래 칼끝이 드리운 자신.
그리고 저벅저벅 들려오는 발소리.
저 뒤편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인영이 보였다.
케이든 이스타지오, 그리고 엘렌 에덴버.
길리언은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 * *
황녀궁으로 향했던 셰일 경은 당혹에 젖었다.
그곳에 찾는 이클립스는 없고, 덩그러니 버려진 크레센트의 시체만 있었던 것이다.
그 보고는 곧장 중앙의 케이든과 엘렌에게 올라갔다.
케이든은 크레센트의 시신은 이후의 일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니 수습하라고 지시하고는, 그길로 황녀궁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루트를 추적해 나갔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될 이클립스가 굳이 자리를 이탈했다는 건 누군가의 압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크레센트를 죽이면서까지 이클립스를 데려갈 사람은, 오직 길리언 크렘벨뿐.
평소 황녀의 최측근으로서 그녀를 보좌하던 셰ᅌᅵᆯ 경은 길리언이 나갔을 법한 통로를 짚어주었다.
테리어드와 모리스는 그중 하나씩을 맡아 병사들을 이끌고 흩어졌고, 케이든 역시 남은 하나를 맡아 길리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렇게 추적해 들어간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이미 그를 발견한 크라이언트군들이 호각을 불며 추적 중이었다.
포위당한 길리언의 앞에 선 케이든은 그가 검을 고쳐 쥐는 모습에 저도 검을 들었다.
“후작. 뒤로.”
그는 한 손으로 엘렌을 뒤로 보내며 검을 겨누었다.
으득. 길리언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검을 고쳐 쥐자 주변에 그를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검을 더 바짝 들어 올렸다.
“투항해라.”
케이든이 말했다.
그러나 길리언은 다시 한번 검을 더 굳게 쥘 뿐, 다른 행동은 일절 취하지 않았다. 그가 당치 않다는 듯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투항해도 어차피 죽지 않나? 그런데 순순히 내려놓는다면 그게 바보가 아니고 뭐겠나.”
그의 말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클립스가 두려움에 젖어 엘렌을 쳐다보았다.
당장에 엘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엘렌은 보일 듯 말 듯 미미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지금 길리언이 그들이 내통한 사이라는 것을 알면, 그녀가 인질이 되어 오히려 어딘가 다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고개를 젓는 엘렌의 모습에 그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클립스는 두려움에 덜덜 떨리는 손을 혼자서 꽉 쥐었다.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마지막으로 말하지. 투항해라.”
케이든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그러나 길리언은 그럴 낌새는 전혀 없이 오히려 그를 도발했다.
“넌 어릴 적부터 날 이긴 적이 없다, 케이든.”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겨뤄본 적이 없지. 설마 그 어린애를 이겼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겠지?”
“혀가 길군.”
길리언이 빈정대었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게다가 황태자의 위신에 문제가 될 만한 말을 뱉은 길리언을 더는 둘 수 없었다.
케이든이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두 사람을 생포해라.”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 중 몇몇은 검을 놓고 두 사람을 포박하기 위해 준비했고, 나머지는 한 발짝씩 간격을 좁혀가며 길리언을 견제했다.
그들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병사들이 그를 묶기 위해 접근한 그 순간.
길리언은 섬광처럼 제 눈앞의 병사를 공격했다.
“커헉!”
앞의 병사가 그가 있는 쪽으로 쓰러져 내리자 길리언은 그 병사의 몸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뒤로 돌려 그를 제 등 뒤의 방패로 세웠다.
“어엇!”
검을 내지르던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동료의 등에 주춤하며 내지르던 검을 멈추었다.
그 찰나를 기회로 삼아 길리언은 제 앞을 가로막는 2차 방어선의 병사에게로 검을 뻗었다.
“으, 으흐아악!”
챙!
찔릴 뻔한 병사를 뒤로 젖히며 케이든이 그의 검을 받아내었다. 그가 굳은 얼굴로 길리언을 쏘아보며 말했다.
“끝까지 추하군. 투항했다면 그래도 끝만큼은 편안하게 내 주었을 것을.”
“퍽 자비로우십니다, 태자 전하.”
챙!
길리언은 다시 그를 향해 검을 뻗었다.
그가 노리는 바는 하나였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면, 상대가 원하는 바도 성취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즉 황태자 본인을 없애든가 혹은 엘렌을 죽이든가 둘 중의 하나는 달성해야 했다.
케이든이 그의 검을 받아내며 외쳤다.
“명령을 달리하겠다! 길리언 크렘벨은 죽여도 상관없다!”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길리언의 행태에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병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그러나 어차피 성공해도 실패해도 결과는 같기 때문일까.
길리언은 그런 상황에서도 놀라우리만치 냉정히 집중했다.
휙! 휙!
제게 내질러진 검들을 하나씩 피해 넘긴 그는 천천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목숨도 포기한 그의 정신은 지금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웠다.
그리고 발견한 아주 작은 틈새. 그는 그대로 케이든을 향해 짓쳐 들었다.
챙!
“크윽……!”
케이든의 잇새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달려온 힘이 거셌다.
조금 무겁게 그의 검을 받아낸 케이든이 그 검을 튕겨내려 힘을 준 찰나였다.
힐트를 쥐고 있던 길리언의 왼손이 아래를 향했다.
이쪽을 돕기 위해 달려오던 병사들을 보고 있던 케이든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 아래를 향했다.
“―!”
늦었다. 저건 못 피해.
길리언의 손에 들린 날이 짧은 단검이 그를 향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