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한밤중. 케이든이 찾는다는 연락을 받은 엘렌은 황급히 달려 내려갔다.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타다닥,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그대로 숨도 고르지 않고 케이든의 집무실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전하. 엘렌 에덴버입니다. 들어가도 될는지요?”
그녀의 목소리에 벌컥, 곧장 문이 열렸다.
“왔습니까.”
열린 문 사이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엘렌의 동공이 커졌다.
“일단 들어오지요.”
케이든이 애써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그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엘렌은 일단 불안을 뒤로 하고 걸음을 안쪽으로 옮겼다.
“전하. 무슨 일이신지…….”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후작.”
엘렌이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곧장 준비해서 수도를 포위, 함락시킬 겁니다.”
“예?”
엘렌이 화들짝 놀라서 반문했다.
“지금……이라고 하셨나요?”
케이든은 그녀에게 미안한 듯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그도 이렇게 말을 꺼내면 그녀가 놀랄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결정을 마친 뒤 따로 엘렌을 부른 이유는 단순했다.
클라우디스에게 엘렌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최소한의 호위 인력 외에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그는 평소라면 함께했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당혹스러울 건 압니다. 이제 다른 군사들을 이끌고 있는 타 지역 귀족들에게도 말을 전해야 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후작에게 먼저 말을 전하는 겁니다.”
“제게 먼저 말씀을 주셨다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2황자 전하의 접촉을 기다린다고 하시지 않으셨는지요?”
“그랬지요. 그랬는데…….”
케이든이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한 번 깊은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 자식이 전령을 보냈습니다. 대놓고 폐하의 신병을 가지고 장난을 치더군요.”
“전령을요? 대체 언제……?”
“몇 시간 안 됐습니다.”
케이든이 제 두 손을 꽉 맞잡으며 말했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됐었습니다만……. 실제로 그 상황을 마주하니 화가 나면서 생각보다 냉정해지더군요. 그대의 말대로 그 녀석이 폐하를 협상의 패로 쓰고 있는 이상, 아직 무슨 짓을 하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가 결심을 굳힌 듯하자 엘렌이 그의 뒷말을 거들었다.
“여기서 주춤하면 정말로 약점을 드러낸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이쪽에서 고심하고 있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할 때 허를 찌르는 것도 좋겠지요.”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대한 빠른 게 나을 겁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소용이 없으니.”
“네. 좋지 않은 여론이 퍼지는 시간도 빠를 테고요. 이해했습니다.”
엘렌이 안도의 한숨과도 같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별달리 걱정할 일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폐하께서도 무사히 구출되실 겁니다.”
무사히.
그 미소와, 박혀드는 그 말에 케이든은 갑자기 먹먹한 열기가 눈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를 다정히 품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나는 저 눈빛.
저 자수정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와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대로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렇게 꾹꾹 눈물을 참고 버티던 케이든은, 결국 그 눈물이 떨어질 찰나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제 얼굴을 숨겼다.
와락.
저를 안아오는 손길에 엘렌이 놀라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감정이 북받쳐오는지 살짝 흐트러진 그의 숨소리를 듣고는, 그녀는 손을 올려 그의 등 뒤를 감싸 안아 주었다.
‘안쓰러운 사람.’
뺨에 닿아오는 그의 가슴팍이 가쁘게 움직였다. 엘렌은 그것이 안타까워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케이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사히…… 모든 걸 무사히 끝내서, 반드시 그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겠습니다.”
“네, 전하.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내 사람들을 해할 수 없도록, 누구도 감히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그의 등을 토닥이던 엘렌은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작게 아, 하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황태자가 저질렀던 ‘황태자비’ 발언을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그런 논의쯤이야 다음에 해도 상관없지. 일단 이 사람이 괜찮아지면, 그때에.
그녀는 평소의 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결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눈물을 참는 그가 안쓰러워 그의 등을 토닥였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시간이 지나, 사위가 어두운 새벽.
피융, 피융, 피융―!
수도의 남문 근처 숲에서 세 개의 화살이 쏘아졌다.
타오르는 붉은 살들이 어두운 새벽의 하늘을 가르고 올랐고, 그 신호를 확인한 백여 명의 간자들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저희를 기다리는 곳으로 하나둘씩 녹아든 그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지축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성문이 내려갔을 때였다.
* * *
빛이 들지 않아 칠흑에 잠긴 황궁의 복도.
그곳에는 바삐 걷는 두 사람의 구두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있었다.
길리언은 이클립스의 손목을 붙잡고 서둘러 걸었다.
그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 이클립스가 휘청 넘어졌다.
“잠깐…… 아윽!”
쿵. 제 팔이 뒤로 확 당겨지며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길리언은 혀를 차고는 그녀를 당겨 일으켰다.
그가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자근자근 씹어 뱉듯 경고했다.
“더 지체하면 살아남는다는 선지 자체가 없어지는 수가 있다. 똑바로 걸어.”
이클립스는 겁에 질려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일단은 일어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남자가 나를 어찌할지 몰라…….
그녀가 통증을 참고 일어서자 길리언은 그런 그녀를 확인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황궁 바깥을 향하면서도 생각이 많았다.
케이든에게 오늘 전령이 갔으니, 그런 협박을 보내자마자 황제에게 변고가 생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입단속을 시켜 놓았으니 내부에서 이야기가 빠져나가기까지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다.
그래. 아직 다음이 있다.
‘트리발로스로 가서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그쪽에서 세울 패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쪽엔 황실의 피를 잇는 남녀가 모두 있으니까.’
자신은 아직 젊다. 10년, 20년쯤 더 기다리면서 대계를 보는 것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 원래도 계획한 대로 되었다면 일을 실행하는 것은 지금보다도 최소 몇 년, 길게는 10년쯤은 더 뒤였을 것이다.
제 준비를 들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면 결국 엘렌은…….’
그녀는, 황태자가 갖게 될까.
길리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탓에 손목이 죄인 이클립스가 윽, 하는 신음을 냈지만 길리언은 신경 쓰지 않고 제 생각에만 빠져 성큼성큼 걸었다.
‘내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보여주었던 물건인데, 이래서는 그 효용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크레센트가 집권하더라도, 자신과 협력자가 되더라도. 언젠가 그녀의 목표인 크렘벨 제거를 위해서는 자신이 갖고 있는 편지까지 모아 완벽한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히 잘 굴러가고 있는 정권의 집권자를 몰아낼 수는 없다.
그렇게 평생을 해결되지 않을 목표를 위해 저를 갈구하며 살아가라 던진 편지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는―
그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우르릉.
와아아아―!
멀리서 굉음과 함께 아스라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
길리언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그 찰나의 시간. 도망치던 길리언과 끌려가던 이클립스의 낯에는 완전히 상반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길리언은 으득, 이를 갈고는 뛰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손길에 다시 끌려가다시피 뛰기 시작한 이클립스가 신음을 뱉었다.
“아흑, 잠깐……!”
“죽고 싶나! 빨리 달려!”
하지만 이클립스는 도저히 뛸 수 없는 척 휘청대며, 스스로 택했던 마지막 구원을 생각했다.
‘엘렌 에덴버. 제발……!’
모든 것이 끝나기 전에 내게 와 줘.
* * *
브리스타의 안배는 성공적이었다. 성문이 굉음을 내며 내려갔고, 그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의 앞에 커다란 길이 뚫렸다.
“진입한다!”
와아아아―!
선두에 선 케이든의 외침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성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중 황녀 이클립스의 기사 셰일 경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따라와라! 우리는 황녀궁으로 간다!”
그가 탄 말을 따라 우르르, 한 부대가 자리를 이탈했다.
셰일 경 외에도 각각 다른 임무를 맡은 기사들은 제가 맡은 병사들을 데리고 각지로 흩어졌다.
아발란쉬 후작은 바로크 일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떠났고, 슈탓트펠트 경은 황제를 구출하기 위해 갔으며, 본대는 크레센트와 길리언을 확보를 목표로 진군했다. 크라이언트는 혹시나 빠져나갈 중요 인물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깥 포위망을 좁혔다.
케이든이 테리어드와 모리스를 양쪽에 끼고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우리는 황궁으로 간다!”
히히힝―!
내리쳐지는 고삐에 말이 울었다.
* * *
헉, 헉.
턱 끝까지 차오른 숨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뒤로는 바짝 쫓아오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길리언은 이클립스를 보며 계속해서 빨리 뛸 것을 종용했다. 휘청휘청 위태하게 뛰는 그녀의 모습이 답답해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길리언의 머릿속 한편에는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한 생각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이렇게 붙잡히게 된다면 마지막엔 엘렌을 만나게 되는 걸까.
이번에 붙잡히면 틀림없이 죽음일 텐데, 그런데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난 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걸까.
그의 걸음걸음마다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내 목표는 무엇이었지?
난 엘렌을 손에 넣기 위해 이 자리를 붙잡고 있던 건가, 이 자리를 붙잡기 위해 엘렌을 손에 넣으려 했던 건가.
이렇게 되기 전에 저 여자를 죽여버렸어야 했다. 차라리 그날의 황실 대회에서 죽어버렸었다면…….
그렇게 다다른 황궁 뒤편, 기계적으로 발을 놀리던 그는 그런 혼란 속에서도 끊임없이 출구를 찾아 뛰었다.
뒤쪽으로 작은 숲과 그 뒤로는 너른 산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라면 군사가 진입해 들어오기 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던 이가 있었다.
“저기! 저기 사람이 있다!”
숲 방향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정도의 찰나.
삐이익―!
밤의 고요를 찢는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