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헤지스는 길리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를 인정하지 않은 건, 네 어미를 인정할 수 없어서다.”
“……내 어머니를?”
갑자기 시작된 헤지스의 말에 길리언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하지만 헤지스는 그런 그의 혼란 같은 것은 고려치 않은 채 물었다.
“네 어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나?”
길리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그저 그런 시녀였기에 그렇게 해치운 게 아닐까 생각할 뿐.”
헤지스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이곳이 자신의 전장인 듯 결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네 어미는 마샬 백작가의 여식이었다. 제대로 된 귀족이었지.”
길리언은 제가 들은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귀족이었다고? 그보다 그런 백작가가 있었나? 마샬 백작가?
“하지만 그들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내가 없앴으니까.”
“……없앴다고?”
“그래. 네 어미만 빼고 말이다.”
순간 치고 올라온 생각들은 많았다. 하지만 길리언은 일단 그의 다음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헤지스는 그때의 불쾌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얼굴 근육이 전체적으로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이었다.
“지금의 귀족파가 형성되기 전, 마샬 백작은 실권을 잡아 보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내 주변을 매수해 제 여식을 내게 들여보냈다. 날 술에 절여서 말이야.”
“…….”
“내 침실이 그렇게 간단히 누군가의 침범을 허용한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 하지만 그때엔 그랬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하룻밤을 보냈고, 난 치미는 모멸감과 분노에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계획을 짰지.”
“…….”
“그렇게 마샬 백작가를 없앴다.”
헤지스가 입꼬리 한쪽을 비뚜름히 올리며 비소를 지었다.
“하지만 네 어미에게만큼은 손을 댈 수가 없었지. 일이 진행될 때쯤 임신 소식을 알게 되어서 말이다.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까지 죽여도 되는 건가. 정작 마샬 백작이 바란 게 이런 망설임과 특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그가 당시의 감정을 회상하듯 허공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녀를 숨겨서 출산일까지 내버려뒀다. 딸이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 받아들일 생각이었지. 그래도 내 핏줄이니까.”
핏줄. 길리언과 헤지스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헤지스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들이더군.”
그 한마디에 당시 느꼈던 헤지스의 감정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침묵하고 있는 길리언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그 시점부터는 살려둘 수가 없어졌다. 그녀가 몰고 올 파장은 지금 네가 벌인 일을 보면 알겠지.”
그것은 그랬다. 정식으로 혼인조차 하지 않은 여자와, 그런 여자에게서 난 첫아들.
듣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에 길리언은 물었다.
“……그러면 대체 나는 왜 살려둔 거지?”
“그게 내 일말의 자비이자 양심이었다. 그들의 욕심으로, 그리고 이성을 잃은 나의 잘못으로 생긴 아이니까.”
기만이다.
“차마 생명까지는 빼앗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내 형제에게 맡긴 거다. 개중 가장 신분이 높고, 믿을 만한 자에게.”
길리언은 그의 이야기를 긍정해야 할지, 부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황제로서의 행동으로는 옳다고 할 수밖에 없는 처사다. 그의 말대로, 살아남은 사생아는 나라에 전란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적자로서 컸다면 자신이 이런 일을 꾸밀 일도 없었다.
그런데 그 외에는 그로서도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황궁에서 자란다면 정말 아무 혼란 없이 평화적인 나날이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그런 가정에 대해서는 말이다.
황후와 황후의 이른 죽음으로 중앙에 자리를 잡게 된 후궁. 사생아인 첫째 황자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불협화음이 날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없는 지금도 이미 그러하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황제의 비호하에 황궁에 있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사실을 꺼냈다. 그러니 이제 말해. 케이든이 이곳에 왔고, 나는 인질이 맞나?”
길리언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헤지스가 재차 말을 꺼냈다. 그 말에 길리언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끌려 들어왔다.
결국 자식 취급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케이든 한 명뿐.
그래. 강제가 아닌 선택이다. 자신이 부인도 잃고 가문도 잃은 결과가 자신의 책임이듯, 이 혼란은 결국 그 모든 상황에서 선택권을 갖고 있었던 황제 헤지스 이스타지오의 책임이다.
길리언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알아서 생각하도록. 내가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지.”
그러자 헤지스가 저를 뒤로하고 걸어가는 길리언의 등에 대고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길리언 크렘벨―!”
벨……. 벨…….
폐쇄된 지하 감옥 안으로 헤지스의 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길리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횃불 사이사이를 지나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지하 감옥에는 헤지스의 분노어린 외침만이 남게 되었다.
* * *
“뭐?”
크레센트가 탕, 하고 의자를 밀어젖히며 일어났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무슨 소리야!”
늦은 밤.
길리언에게 수도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던 크레센트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그야말로 경악해서는 소리쳤다.
“확인…… 확인은! 확인은 누가 한 거지?”
“간수의 보고로…….”
“됐다! 지금 내가 직접 가지.”
보고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는지, 크레센트는 그길로 지하 감옥까지 한달음에 내려갔다. 그 뒤를 길리언이 조용히 따랐다.
그렇게 내려간 지하 감옥의 가장 깊숙한 곳.
정말로 황제는,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게 죽어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헤지스를 본 크레센트는 제 얼굴을 감싸 쥐고는 으아아악, 고함을 질렀다.
“안 돼. 제기랄!”
감옥에 유폐되어 있던 황제가 혀를 깨물고 자결하다니!
크레센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떡하지?
케이든을 막을 인질이 사라졌다. 하지만 당장에 그들이 밀고 들어오면 막을 방법은 없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렇게 한참 바닥을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익숙한 발치에 닿았다. 그 순간 그는 방향을 바꿔 길리언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길리언은 그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이 일은 몇 모릅니다.”
그는 주변의 인물들을 한 번 훑고는,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여봐란듯이 말했다.
“당장 입막음을 하시고, 황태자가 숙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하지만 크레센트는 그만큼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저 기다리고 있으라고? 지금 이 시점에?”
“그도 아니면 도망을 치시는 것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도망.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단어에 크레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눈동자를 굴리다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이클립스……. 이클립스는? 그 애가 필요해.”
크레센트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움직이더니 말했다.
“그 애에게 가야겠어. 너는 네 말대로 입단속을 하고 그곳으로 오도록. 알겠나?”
“……예. 그러지요.”
크레센트는 길리언의 사후처리를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두르는 듯 흔들리는 걸음으로 황녀궁을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길리언은 주변 간수들을 흘끗 보고 “들었으니 알아서 행동하리라 생각하지.”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는 마찬가지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는 그대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크레센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미행은 감옥을 지나 황녀궁까지 이어졌다.
쾅. 황녀궁의 문을 박차고 들어간 크레센트가 외쳤다.
“이클립스!”
“오라버니?”
그는 깜짝 놀라 저를 돌아보는 이클립스의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당장 나가야 한다.”
“오라버니, 무슨……?”
이클립스가 묻자 답답했던 모양인지 크레센트가 확 소리를 쳤다.
“황제가 죽었어! 우리는 당장 여길 나가서 트리발로스로 가야 해. 설명할 시간 없으니 어서 짐을 챙겨라, 이클립스!”
“하,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크레센트의 등 뒤를 향했다.
제가 아닌 등 뒤의 누군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한 그녀의 시선에, 이상함을 감지한 크레센트가 자신의 뒤를 쳐다보았다.
그가 제 뒤에 선 그림자를 의아하게 보며 말했다.
“크렘벨……?”
그의 뒤에 선 길리언이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대충 들었겠지? 나는 이대로 트리발로스로 가 후일을 도모할 거다.”
그는 더듬더듬 제 할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이클립스의 방에서 적당한 패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트리발로스가 마그놀리아를 안정화시키는 데 몇 년은 걸리겠지. 그동안 그곳에 망명해 있으면서 힘을 키운다. 그리고 그곳의 힘을 빌려 다시 돌아오면 되겠지.”
그 말을 들은 이클립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갑작스레 들이닥쳐 뭐라고 하는 건가 싶었는데, 비로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이대로 나도 끌고 갈 셈이야.
에덴버 후작이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해. 이렇게 갈 순 없어……!
그런 생각으로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길리언이 크레센트의 뒤로 다가오며 말했다.
“예. 확실히 그때쯤이 되면 트리발로스도 여력이 생기겠지요. 이스타지오를 발아래 두기 위한 황실의 핏줄도 분명히 탐이 날 겁니다.”
“그래. 이 이야기를 어머니와 가문에도 전해야 해. 그러니 지금 가서―”
“그리고 투자한 것이 아쉬워서라도 군사를 지원해 줄 겁니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리자 한참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짐을 챙기고 있던 크레센트의 손이 멈추었다.
크레센트는 그대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높게 매달린 샹들리에 아래. 촛불의 빛을 반사해 번쩍이는 검날이 보였다.
크레센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 하하. 크렘벨 공. 그게 뭐……하는 거지?”
“전하의 말씀대로, 트리발로스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입을 막는 겁니다.”
길리언이 한발, 한발 다가가자 크레센트가 질겁을 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슨, 무슨……!”
“황실의 핏줄이 둘씩이나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푹―!
길리언의 검이 그대로 크레센트의 가슴을 꿰뚫었다.
크레센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관통한 금속의 날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이게……. 크으아악!”
팍, 뽑혀 나간 날의 힘에 크레센트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바닥으로 털썩 무너져 내렸다. 계속 끄윽, 끅 대는 신음을 흘리던 그가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것을 보고 있던 이클립스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나도, 나도 죽을 거야.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길리언은 탁탁, 피를 털어 검을 집어넣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말했다.
“내게 협조해라. 그러면 살려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