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황태자가 이끄는 군대의 북상 소식이 수도까지 알음알음 퍼져오기 시작했다.
비밀리에 실행해야 했던 장악 계획이었기에, 완전 봉쇄가 가능할 정도의 물자 준비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수도를 오가는 화물 운송까지 막지는 못했고, 그것이 이 소문이 퍼져나가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크레센트가 내놓은 방책은 이것이었다.
바로 다른 대안을 없애는 것.
즉 케이든의 이름에도 일단 같이 먹칠을 해, 케이든과 자신 사이의 차이점을 없애 현상 유지를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크레센트는 말했다.
황태자가 전투 중인 국경을 뒤로하고 올라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적군이 아직 이 땅에 있음에도 여기까지 진군해 올라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가 제시한 이유는 이러했다.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는 황위를 위해 나라와 국민을 버렸다.
전쟁에 미친 그는 수도에서 자신을 몰아내고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유도하고 백성의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있다.
물론 그런 말이 얼마나 먹혀들어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분명 누군가는 혼란스러워할 것이고, 어차피 밀리기 시작한 크레센트로서는 그 정도라도 일단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손해 볼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렇게, 스산한 수도의 바람처럼 황태자를 칭송하는 말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 * *
그날 저녁.
슈탓트펠트 령으로 말을 탄 기사 하나가 도착했다.
“누가 왔다고?”
“클라우디스 바로크. 바로크 경입니다.”
케이든은 제 방까지 찾아온 소식에 급히 옷을 입으며 방을 나섰다.
클라우디스 바로크?
크을라우디스 바로크으?
그 남자는 크레센트 측에서 엘렌을 빼가려고 온갖 꼼수를 부릴 때 제일 앞에 세웠던 이 아닌가.
케이든은 가뜩이나 크레센트 탓에 좋지 않던 감정이 더욱 배배 꼬이는 것을 느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소 복장을 깔끔하게 갖추기로 소문난 모리스의 손을 거친 후 영주성 대회의장의 문을 연 그는, 짜증으로 잔뜩 무장한 채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지.”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근처의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클라우디스 바로크가 대회의장에 들어섰다.
“오랜만이군.”
케이든이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스는 그 정도쯤이야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동요 없이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직 그래도 나를 전하라 칭하기는 하는군. 아, 설마 그대의 사촌이자 내 이복동생께서는 이미 폐하라는 호칭을 쓰고 계시는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두 분 전하께서는 한 배에서 나지 않으셨을 뿐, 모두 자랑스러운 이스타지오의 황족이시지 않습니까.”
케이든이 눈앞에서 빈정대었지만 클라우디스는 침착히 말했다. 케이든이 코웃음을 치고는 물었다.
“그러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금 크레센트의 행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 황족 시해가 되나?”
“오해십니다. 크레센트 전하께서는 뒤늦게 알게 된 형제를 지키고자 결단을 내리셨을 뿐,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도, 그런 일도 전혀 없으십니다.”
오해는 무슨. 케이든은 그대로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떻게 이런 놈들은 꼭 눈앞에서 기만을 하려 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혀를 쯧, 차고는 말했다.
“되었네. 용건이나 말하지. 여기까지 굳이 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예.”
클라우디스는 짧게 대답하고는 들고 있던 통에 담긴 종이를 꺼내었다.
“크레센트 전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하지.”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우디스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그것을 펼쳐 들었다.
“내 형님이자 이 제국의 황태자 케이든 이스타지오에게 전한다.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협조를 구한다. 폐하께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셨으니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국정을 계속 폐하께 맡겨드릴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바깥이 전란으로 소란스러우니 내부와 외부의 일이 모두 다급하다.”
거기까지 듣던 케이든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가증스러운 자식!
“부디 내가 내부를 정리하는 동안 외부의 위협을 차단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폐하께서는 옥체가 미령하시고, 나 또한 혈육의 정을 저버릴 수 없으니 폐하께는 따듯한 남부에서의 휴식을 권해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형제이니 사사로운 욕심에 눈이 멀지 않고 뜻이 통하리라 믿고 있다. 부디 협력을 바란다.”
크레센트의 전언을 끝까지 읽어 내린 클라우디스는 쭉 뻗고 있던 팔을 내리며 말했다.
“……이상, 크레센트 전하의 전언입니다.”
그는 아무 말이 없는 케이든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제가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돌돌 말아 통 속에 넣었다.
이게 먹혀야 할 텐데. 그의 침묵에서는 그런 뜻이 읽혔다.
그것을 보고 있던 케이든은 애써 격앙되는 감정을 억누른 것이 역력한 눌린 목소리로, 핏줄이 불거진 손을 들어 말했다.
“……답신은, 내가 알아서 보내지. 그러니 당장 그대는 그대의 주군에게 돌아가도록.”
그의 진짜 분노를 처음 본 클라우디스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도 나를 살려 보낸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건가.
그는 그대로 깊이 인사를 올린 뒤, 누구의 배웅도 없이 회의장을 나섰다.
“크레센트, 이 개자식이 정말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군.”
케이든이 후, 크게 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브리스타 자작에게 연락하지. 우리는 지금 곧장 포위진을 펼칠 생각이니, 언제든 바로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으라고 해.”
* * *
뚜벅. 뚜벅.
묵직한 구두 굽이 차가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느릿한 걸음이 도달한 곳은 감옥의 가장 안쪽. 보통의 감옥으로 보기엔 그래도 제법 생활공간처럼 보이는 모양새를 갖춘 방이었다.
창살 너머 낡은 나무를 덧댄 침상 위로 얇은 모포가 널브러져 있고, 그것을 대충 둘둘 감은 채 엎어져 있는 한 남성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가 멎자 감옥 앞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이 자리를 비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포 속의 남성이 꿈틀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창살 바깥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길리언은 그런 헤지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봤으면 이야기를 좀 하지.”
“……여긴 무슨 일로 온 게냐.”
쿨럭, 헤지스의 목에서 힘 빠진 기침 소리가 나왔다.
일렁이는 횃불에 길리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당신에게도 내게도 마지막 기회다.”
“…….”
“황태자가 이곳 코앞에 와 있다. 그 목숨 부지해 아들을 만나고 싶거든 내게 협력하는 게 좋을 거다.”
그의 말에 헤지스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비웃듯 말했다.
“아직까지 죽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애초에 내 죽음에 계획한 바가 있는 게 아니었나? 그런데 갑자기 와서는, 이곳에 케이든이 와 있다고?”
“…….”
“그거 꼴좋구나. 크레센트도 꽤 당황했겠군. 그러니 너도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길리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헤지스는 더욱 진한 비소를 달고 말했다.
“내게 대체 무엇을 바라고 온 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네가 얻어갈 수 있을 성싶으냐? 내가 퍽이나 기쁘게 협력하겠구나.”
헤지스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의 말을 조용히 모두 들어 주고 있던 길리언은 처음과 그다지 변한 것 없는 어조로 말했다.
“대체…… 왜 그랬지.”
길리언이 조용히 묻는 말에 헤지스는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 본 길리언이 아주 조금, 분노가 묻어난 목소리로 제 속내를 뱉었다.
“나는 무엇이 문제였나. 무엇이 그렇게도 성에 차지 않아 나를 버렸던 거지?”
질문을 던지는 길리언의 낯은 그 고저 없는 목소리만큼이나 무표정했다. 그러나 점점 빨라지는 말에서 드러나는 흥분감까지는 미처 감춰지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가장 큰 원인.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자신에 대해 가져왔던 가장 근본적인 물음.
이만 됐다고, 그냥 놓아버리자고 속으로는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러나 결국엔 놓지 못하고 자신은 기어이 이곳을 찾아오고 말았다.
그로서는 인정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드는 묘한 초조함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당장의 황위는 다음을 모색한다 하더라도, 한 번 황제와 멀어지면 이젠 이에 대해서는 다시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황제가 만면에 비웃음을 띠고는 말했다.
“아직도 그게 궁금한가?”
“…….”
“내가 해 줄 말은 같다. 누구 좋으라고 그 궁금증을 풀어준단 말이냐.”
“케이든이.”
길리언이 입술을 떼었다.
“무사히 성도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지. 그 정도면 되나?”
“허!”
길리언의 제안에 헤지스는 진심에서 우러난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어처구니없음을 만면에 드러내놓고는 말했다.
“네가 보기엔 크레센트가 영 대책이 없는 거군?”
“…….”
“그래서 넌 이곳을 포기하기로 한 거야. 그렇지?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나를 찾아왔다……. 왜 굳이 나를 찾아왔을까.”
역시 눈치 채나. 길리언은 조금 짜증이 났다.
헤지스는 길리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제 추측을 이어갔다.
“내게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적당히 고문도 병행하면 그만인데 그러질 않지. 내게 하질 못하는 거야.”
“…….”
“날 해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며 즐겁게 비꼬던 헤지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내가 인질이로군. 케이든에게 날 두고 협상을 하는 중인 게야. 날 살려서 보내야만 하니 그러는 거지.”
그의 말에 길리언은 쯧, 혀를 찼다.
과연 황제는 황제. 정치판을 헛되이 구르지는 않았다. 꽤나 정확한 눈썰미였다.
길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낯을 유지하며 말했다.
“그게 망상일지 예측일지는 날이 지나 보면 알겠지. 내 용건이 무시당한 시점에서 네 질문에 답해 줄 생각은 없다.”
“말해라, 길리언 크렘벨! 내게서 들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기운이라고는 모조리 소진한 것 같던 헤지스에게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가 쩌렁 울려 나왔다. 퀭하게 죽어가던 그의 눈빛이 다시금 형형히 빛났다.
“내가 너를 인정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지. 답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