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군대가 올라가는 길은 꽤나 요란했다.
악대들의 축연 소리, 백성들의 함성.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러 가는 그들이었지만, 당장 최대의 업적인 트리발로스와의 전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적국에게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군대. 모든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했으며 거리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너도나도 영웅 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그 명예로운 군대가 밤이 되고 술이 들어가면 토로하는 것은, 승리의 기쁨 대신 전투의 절망이었다.
원군도 오지 않는 사지에서의 시간.
그렇게 묘사되는 로에리의 전장은 그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문을 남겼다.
그들은 왜 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왜 수도에서의 2차 파병 소식도 없이 북부군이 그곳까지 갔던 걸까.
소문은 입과 입을 건너 퍼져나갔고, 그것은 곧 사람들이 하나의 결론에 다다르도록 만들었다.
‘황위 싸움’.
지금 크레센트 황자가, 황태자 케이든을 죽이고자 원군 요청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 백성들은 당연하게도 분노했다.
황위 다툼이란 명목으로, 자신들을 지켜주어야 할 황족이 나라를 팔아넘긴 것이다.
원군을 보내지 않고 일부러 성이 함락당하게 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가뜩이나 수도 봉쇄 소식이 들려오며 흉흉해진 민심은 그렇게 크레센트에게서 완전히 돌아서게 되었다.
믿을 수 없는 군주에게 복종할 백성은 없었다. 그런 민심에 힘입어 케이든의 군대는 편안하게 행군을 마쳤고, 그들은 수도의 남문 앞 슈탓트펠트 령에 다다르게 되었다.
상황에 대한 보고를 듣고 온 슈탓트펠트 경이 말했다.
“여전히 문은 봉쇄되어 있습니다. 진입하려면 안에서 열어주든지 저희가 부숴야 합니다.”
“다른 진입로는 없나?”
그의 물음에 엘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템트항을 통해 나왔기에 그곳도 확인을 지시했습니다만, 군대가 진입을 하기엔 적절치 못하다는 보고입니다.”
엘렌이 다른 가능성은 없음을 못 박자, 케이든은 입가를 매만지며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크레센트 측에서의 접근은?”
“없습니다. 다만…….”
슈탓트펠트 경이 제게 들어온 소식 중 한 가지를 전했다.
“브리스타 가에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너무 대놓고 움직이기에 이상해서 체크는 해 두었습니다만.”
그의 말에 엘렌이 외쳤다.
“브리스타! 어디에 있나요?”
“예? 영지 내 적당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습니다만…….”
슈탓트펠트 경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대답했다.
반면 엘렌은 온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직 그들이 슈탓트펠트 령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녀는 곧장 일어서더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후작?”
케이든이 의아한 낯으로 그녀를 불렀다.
“전하. 병사들을 푹 쉬게 하시고 잠시 기다리시지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대가 브리스타에?”
“네.”
곧장 대답하는 그녀는 살짝 흥분한 것이 무언가 기대에 젖은 기색이었다. 그녀가 조금 빨라진 어투로 말했다.
“브리스타는 엘시어가 수도를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이입니다. 어쩌면 황녀 전하의 전언을 들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보고도 있었지요.”
케이든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언짢은 기색이었다.
“황녀 전하의 기사인 셰일 경과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셰일 경은 데리고 가되, 슈탓트펠트 경도 함께 가지요.”
그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미래 황태자비의 안전을 다른 이의 기사에게만 맡길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예고도 없이 떨어진 말에 엘렌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비?
그리고 물론 당연하게도, 그녀의 놀라움만큼이나 주변에서 함께 듣고 있던 이들도 난리가 났다.
황태자비래!
결국 진짜였군!
누구보다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슈탓트펠트 경 또한 은근히 신나서는 말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비…… 후작 각하.”
그는 실수인지 의도인지 모를 말을 던져놓고는 제가 다 설렌다는 얼굴로 앞장을 섰다.
아, 저 사람이!
엘렌은 대체 언제부터 이 혼약이 태자비의 자리를 놓고 한 것이었는지를 따져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여러 기사들의 앞이야. 지금은 참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를 건네야 해.
그녀는 후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짚고 가리라 다짐하며, 얼굴만 터질 듯 발갛게 붉힌 채로 종종 자리를 빠져나갔다.
* * *
브리스타 자작은 이 어지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귀족 중 하나였다.
일단 그는 지금 실권을 잡고 있는 바로크에게 사돈이 되는 이였다.
또한 그는 긴 시간 동안 별다른 활동 없이 살아왔으며, 무엇보다 남겨진 후계가 없어 권력 암투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보인다는 점까지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는 데 작용하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가면 아래에서, 브리스타 자작은 조용히 자신이 길러 놓았던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수도에 한차례 불길을 수놓을 그만의 군대. 그의 복수를 화려하게 피워줄 노력의 결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 그는 한 가지 신호를 정해두고는 성 밖으로 나왔다.
남쪽 하늘에 불화살 세 개가 뜨거든 곧장 행동을 개시하라.
그렇게 그는 슈탓트펠트 령의 황태자군을 맞이했다.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안 슈탓트펠트를 향해 브리스타 자작이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소영주님이 직접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슈탓트펠트 경.”
“예. 이리 뵙는 건 사실 처음인 것 같군요. 이안 슈탓트펠트입니다.”
그는 브리스타 자작에게 악수를 건네었다.
손을 마주 잡고 두어 번 흔든 그는,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에 아직 경계를 늦추지 않고는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곳엔 무슨 용무로 계시는지.”
“아, 그건 경과 함께 오신 후작께서 설명을 해 주실 듯합니다.”
브리스타 자작이 딸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렌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는 엘렌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각하.”
그의 인사에 엘렌도 반가운 미소로 답했다.
“이곳에 있단 소식에 놀라 달려 나왔답니다, 자작.”
“정말 여기까지 당도하셨군요.”
“덕택이지요.”
그런데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본 슈탓트펠트 경이 끼어들어 말했다.
“자작. 예비 태자비십니다. 조금만 더 예의를 갖춰 주시지요.”
한 번 생사를 나누는 약속을 나누었다고 나름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던 자작은 그 말에 깜짝 놀라 엘렌을 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이안과 엘렌을 번갈아 보던 그는, 이윽고 엘렌이 마지못해 끄덕이는 고개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제국에 홍복이 왔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드립니다.”
엘렌은 애써 웃어 보이고는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저 사람이 여기서 그런 얘기는 왜 꺼낸 거람!
당혹과 부끄러움으로 살짝 붉어진 귀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이렇게 소개를 해 버리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자칫 내부 결속의 문제로 비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들을 이끌어야 할 황태자의 위신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가 되니 말이다.
엘렌은 민망함을 속으로만 삭이며 생각했다.
그래. 이 기사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나.
따지자면 이것은 황태자가 요즘 적극적으로 치대는 것을 알면서도 미처 이야기를 정리해 두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그러나 정작 슈탓트펠트 경의 발언은 엘렌의 생각처럼 실수가 아니라, 제 나름의 속내가 따로 있는 것이었다.
엘렌과 제 주군의 결합이 이후를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이러한 사실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말을 꺼낸 것이다.
여기저기 소문을 내놓아야 이 선언이 기정사실이 된다. 그것이 그간의 황태자와 엘렌의 공방을 지켜봐 온 그의 판단이었다.
첫 인사가 어찌 되었든, 그들은 본래의 목적을 위해 자작이 머무르는 방으로 올라갔다.
* * *
브리스타 자작은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현재 수도 안에는 제가 일생에 걸쳐 모은 정예 일백이 있습니다.”
많다고 하기도, 적다고 하기도 애매한 숫자였다. 이안 슈탓트펠트가 고민하는 듯 되뇌었다.
“일백……. 일백이라.”
그의 중얼거림에 브리스타 자작이 덧붙였다.
“비밀리에 수도에 정착해야 했던 이들이라 인원이 많지 않지요. 하지만 어디 한 곳의 혼란을 일으키기엔 충분할 겁니다.”
“확실히 어디 한 군데를 타깃으로 움직이기엔 충분한 인원이지요.”
“예. 제가 신호를 보내면 그들은 즉시 모여 성문을 공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이안이 반색하며 물었다.
“예. 역시 지금 상태에서는 진입이 가장 큰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현명하시군요.”
계속 고민 중이던 부분이 해결됐다. 이안은 얼굴이 한층 밝아져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묻기 시작했고, 브리스타 자작은 제가 두고 온 안배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그들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녀의 기사 셰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는 어찌 되시는 겁니까. 그분의 근황은 알고 계십니까?”
“아, 황녀 전하라면…….”
자작이 슬쩍 눈치를 보다 말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만나 뵙기가 어려운 상태이십니다.”
“알현이 안 된단 말입니까?”
“그것을 안 된다고 해야 할지.”
셰일이 긴장과 우려가 역력한 목소리로 묻자, 자작은 잠깐 고민하며 말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바깥을 나서기가 두려우시다며 칩거 중이십니다. 손수 발탁하신 기사들 외에는 거의 만남조차 가지지 않으신다는 이야기가 파다하지요.”
“전하께서…….”
셰일 경이 주먹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이런저런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겠지요. 저희가 탈출했음이 명백해졌으니 누군가 배신자를 색출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수밖에요.”
엘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자, 셰일 경이 불안해졌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전하께서는 확실히 무사하신 겁니까?”
브리스타 자작은 그런 그를 곤란하다는 얼굴로 잠시 보고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건 제가 뵙지 못해 장담은 드리지 못하지만, 황궁에서 별다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황녀 전하께서는 트리발로스와 혼약을 맺게 할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함부로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트리발로스의 장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음.”
브리스타 자작이 유감을 숨기지 못하고 침음성을 뱉었다.
마냥 좋아하기도 침묵하기도 어려운 말. 현재 황녀의 위치만큼이나 애매한 소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당장 뱉을 수 있는 최선만을 입에 담았다.
“황궁 진입 시 황녀의 위치부터 파악할 수 있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 지휘는 경께 맡길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셰일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결의가 모인 결전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