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맛있네요. 요 며칠보다 질이 눈에 띄게 올라갔는데요?”
엘렌이 한 스푼 떠먹으며 감탄하자, 케이든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네. 아무래도 제 식사라 신경을 많이 쓰신 모양이군요.”
“그것도 있고…… 예?”
케이든이 말을 하다 말고 당황해 반문했다. 엘렌은 그것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고기가 많아진 게 퍽 마음에 드는군요. 제가 기본적으로 육류는 좋아하는 편이라.”
“아…….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케이든이 살짝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다 그녀와 탁자의 접시들을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이내 슬며시 웃어 보이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대를 생각해서 먹이고 싶은 대로 식사를 챙긴다면 이런 곳의 식사를 가지고는 터무니없이 모자라지요. 황궁이라면 모를까.”
응?
엘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돌아가면 제 궁의 주방장에게 일러놓겠습니다. 그대는 육류를 좋아하고 디저트에 관심이 많으니 특별히 신경 쓰라고.”
“태자궁 주방장이요.”
“예. 곧 모시게 될 이이니 미리 파악해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싱글싱글 웃는 낯의 그는 어째 조금 얄미운 구석까지 보였다.
‘저게 틀린 말은 아닌데.’
제 생각과 반대로 튀어버린 그의 모습에 엘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렇죠, 돌아가면. 머지않은 이야기네요.”
엘렌은 고민했다.
그 고백만 없었어도 그의 저런 말들에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무슨 행동이든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건가? 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한담.’
그녀로서도 케이든이 눈에 밟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직 사랑에는 조심스러울 뿐.
마음이 간다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기에는 한 번 겪은 일들이 두려움을 남겼다. 마음을 내주고 나면 자신이 또 어찌 될지 몰랐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망설임에 불과할지라도 그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 걱정에 한사코 거절하던 것을, 속도 모르고 그저 무작정 달려들기만 하니 그녀로서는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홧김에 시도한 ‘너도 한 번 당해봐라.’의 맞불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황태자가 당황하기는커녕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바람에 대차게 실패하고 말았고, 그렇게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나저나 다행입니다. 이제 그대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한 것 같아서.”
케이든이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엘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반문했다.
“네?”
“이제 들어가면 곧 우리의 혼사도 추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충분한 개연성을 쌓고 가는 게지요. 그래, 그대에게 쥐여 줬던 그 반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케이든이 눈짓으로 그녀의 목 언저리를 가리켰다.
아, 이번엔 이건가.
엘렌은 제 목에 걸린 묵직한 반지를 쥐었다.
그녀가 아직 황태자에게 꺼내지 못한 두 가지 이야기 중 가장 큰 비밀.
전부터 고민이 깊었던 문제였다. 회귀를 비롯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기적들을 설명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건 모두 이 반지의 힘으로 보였다. 주변에 그런 기적을 발휘할 만한 물건이 달리 없는 만큼 그녀는 이미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물건이니 앞으로를 위해서도 말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가 믿을까.
그런 망설임이 있었지만, 오늘 혼사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연달아 화제가 터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오늘이 그 이야기들을 밝혀야 할 날이었던 모양이었다.
케이든은 즐겁게 제가 오늘 들었던 이야기들을 꺼내고 있었다.
“아발란쉬 후작이 근래 기사들 사이에 이야기가 돈다며, 이렇게 재밌는 일이 또 없었다고 어찌나 캐물어대던지―”
“전하.”
그녀는 한참 떠들고 있던 케이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케이든의 눈썹이 살짝 하늘을 향했다. 엘렌은 들고 있던 식기를 조용히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전부터 이에 관해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전부터?”
그의 시선이 식기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을 향했다. 이윽고 그는 살짝 긴장한 듯 표정을 굳히더니, 목울대를 한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엘렌이 제 목에 걸려 있던 반지를 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 반지―”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가 반지를 제대로 확인시키기도 전, 케이든이 표정을 굳히더니 그녀의 말을 자르며 말하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 후작.”
“……?”
“그러고 보니 아발란쉬 후작이 대책 회의의 골자를 조금 빠르게 잡아달라고 했던 것을 잊었군요.”
갑자기?
엘렌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까까지는 천연덕스럽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밀어붙이던 남자가, 여기서는 갑자기 돌변해서는 말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답지 않은 다급함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그 이야기부터 나눕시다. 지금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이야기니까요.”
“아……. 네.”
그녀는 뒤늦게 대답했지만, 정작 그 대답을 들을 사람은 지도와 필요한 종이들을 가져오겠다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뒤였다.
엘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큰일 날 뻔했네.
케이든은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반지를 받는 순간부터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듯싶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어코 그것을 제게 돌려줄 요량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 번 그녀에게 준 반지를 되받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의도는 듣지 못했지만, 그게 무엇이든 반지를 돌려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묘했던 것이다.
직접적인 거절의 말은 없었지만, 무언가 그의 마음을, 그리고 나아가 그의 옆자리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행동이지 않나.
‘게다가 저 사람이 정말로 그 모든 위험을 뚫고 살아서 내게 왔다고. 그게 무엇 덕분일 줄 알고 저걸 돌려받아.’
보통 태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기겁하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누구든 그런 미신에라도 기대야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때였다.
그러니 괜찮아. 방금은 잘 도망쳤다.
그가 형식적으로나마 다른 말을 차단하며 지도를 펼쳤다.
“자, 이야기를 나눠 보지요.”
그의 말에 엘렌이 그를 한 번 물끄러미 보았다가, 곧 한숨을 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우리는 크레센트 황자와 협상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지요.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니.”
케이든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리고 그건 크레센트 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렌은 식사하던 것을 살짝 밀어 치우고 탁자에 놓인 핀들을 집어 탁, 탁 수도와 그 주변에 놓았다.
“우리가 살아 돌아온 이상, 그것도 이렇게 빨리 돌아온 이상……. 그의 계획과 이쪽의 병력이 크게 차이가 나게 됐어요. 그에게는 별다른 방법이 없죠.”
하지만 그녀가 놓고 있던 핀들을 물끄러미 보던 케이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글쎄요. 내 생각엔 없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탁의 구석에 놓여 있던 왕기가 그려진 가장 큰 핀을 들어 지도의 중앙에 올려놓았다.
“당장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폐하의 신병을 어떻게든 사용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엘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정당성이 성립하려면 결국 폐하를 해해야만 합니다. 협상의 패가 되지를 못할 텐데요.”
“그 녀석이 그래도 혈연이라고 나를 잘 알아서 말입니다.”
케이든이 고심하는 듯 말끝을 흐렸다.
“난 솔직히, 그 녀석이 폐하를 붙잡고 농성을 시작하면 그곳을 공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 녀석도 아마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2황자의 군사는 이쪽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입니다.”
엘렌이 말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겁니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애초에 그 녀석이 지금이라도 도망칠 줄 아는 녀석이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란 것.”
그리고 그랬다면 아마 그 녀석은 몇 년쯤 뒤 평화롭게 양위를 받고, 어쩌면 우리 모두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케이든은 뒷말은 제 속에만 두었다.
쓸모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늦었고, 이 이상 무언가를 봐 줄 여유도 없었다.
그는 사사로운 생각을 접었다.
“어쨌든 그러니 그 녀석이 도망을 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야기해 봅시다.”
그의 말에 엘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황위를 가지고 거래를 나누려 하겠지요. 전하의 말씀대로 도망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 제시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엘렌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질이겠지요. 그것이 폐하든, 귀족이든, 백성이든.”
그녀의 말에 케이든이 입술을 짓이겨 물었다.
“백성이라면…….”
“예. 내전입니다.”
후우. 엘렌의 말에 케이든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승산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시 트리발로스가 추가 파병을 한다면 어느 정도로 예상합니까.”
“그들은 앞으로는 참전하지 못할 겁니다. 사실 1만의 여력도 저였으면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판단할 정도니까요. 그들은 새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는 데도 급급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계속 굳어 있던 케이든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엘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힘주어 말했다.
“그는 폐하도, 백성도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어요. 그 순간 무너질 겁니다. 그걸 기억하세요.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한 가지를 물었다.
“그렇길 바라야지요. 그런데 그럼 그대가 들고 있는 편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고 있다가 상대가 방심하면 터뜨릴 겁니다. 그건 쐐기지 폭죽이 아니에요.”
확실히.
케이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밝히면 분명 크레센트에게는 타격이 있겠지만, 그것도 그를 처벌한 힘이 있을 때에나 그런 것이었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응징할 힘이 없다면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다.
“그러면 일단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겠군요.”
그의 중얼거림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 혹시 모를 도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포위망을 펼치고, 이후 협상에 임합니다. 올라가는 동안 원군을 보내지 않은 크레센트 정도는 소문내며 가면 좋겠군요.”
그것들이 모여 그의 목을 조르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