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크레센트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한참을 씩씩대다가, 결국 제 방에 놓인 물건들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우당탕!
쾅!
그렇게 한참 동안 던질 수 있는 물건을 모두 바닥에 내던진 그는, 온 방 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서야 비로소 진정이 되었는지 헐떡헐떡 입을 열었다.
“트리발로스에게는 뭐라고 하지? 그들이 우릴 도와줄까?”
크레센트가 제 구명줄이었던 트리발로스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미뤄놓고 싶었던 방법을 써서라도 이 자리를 사수해야만 했다.
자신이 직접 그들의 공주와 혼인해 황실에 그들의 피를 섞는 방법도 있었고, 혹은 그들의 속국이 되는 대신 이곳에서의 자치권을 보장받아 왕 노릇을 하는 방법도 있었다.
모두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치워 놓았던 안들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그의 실낱같은 기대마저도 곧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길리언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한 것이다.
“그들의 군사를 잃은 시점에서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력이 없어 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제기랄!”
크레센트는 또다시 그가 잘 입에 담지 않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한바탕 분노가 지나가고 나자 이제 초조함만 남은 모양이었다. 크레센트는 정신없이 방 안을 왔다 갔다며 말했다.
“무언가 방법이 없나? 형님만, 형님만 꺾으면 되는 거잖아.”
이게 어떻게 손에 넣은 자리인데!
그는 애타는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자리에 앉아 모든 귀족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권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쟁취해 낸 나의 자리인데, 이렇게 잃을 순 없어!’
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본디 더 높은 자리를 위해 황후를 살해한 모친과 그의 외조부를 경멸했던 그였다.
이유야 단순했다.
그들의 욕심으로 자신은 평생 벗을 수 없는 약점 하나를 얻고 만 것이다.
어떻게 손을 써서 황후를 죽였지만, 그럼에도 여태껏 후궁에 머무르고 있는 모친이었다.
어차피 얻지도 못할 자리, 그냥 처음부터 그런 짓만 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약점 없는 황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지금껏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그 모든 일이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때. 그리고 갈림길이 눈앞에 닥쳤을 때, 누가 시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 위치를 타고났기에, 올라갔을 때의 희열을 알지 못했기에 그들을 멋대로 그리 평가했던 것뿐이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는 경험은 정말이지 중독적이었다.
모두를 자신의 발밑에 놓았을 때의 그 쾌감이란.
한참 방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그가 제자리에 멈춰서서는 말했다.
“어머니를 뵈어야겠다. 바로크 후작도. 당장.”
* * *
바로크 삼대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약 십 년 만의 일이었다.
“네가 우리를 부른 것은 처음이구나.”
크레센트의 친모, 벨라테스 이스타지오가 정말 새삼스럽다는 듯 말했다.
크레센트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제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말했다.
“어머니. 지금 그런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미안하구나. 퍽 감회가 새로웠던지라.”
벨라테스가 고아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톡 쏘아붙였다.
그녀는 평소 제 아들을 귀히 여겼지만, 정작 그 아들인 크레센트는 제법 머리가 크고 나서부터는 그다지 제 어미에게 살가운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그 이유를 정확히 크레센트 본인의 입으로 들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내심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녀에게 권력에 눈이 먼 독한 여자라 손가락질하던 여타의 귀족들과 제 아들이 저를 똑같은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 이 상황이 저만의 바람입니까? 여기까지 저를 몰아넣은 당신들의 책임도 있습니다.”
크레센트가 답답했는지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자 벨라테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누가 들으면 내가 너를 나 몰라라 키운 줄 알겠구나.”
“어머니!”
두 사람의 언성이 올라가자, 분위기가 험악해질 것 같았는지 바로크 후작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전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바로크 후작이 나서자 크레센트는 한 번 크게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벨라테스는 마지못해 져 주는 척 찻잔을 들어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좋아. 그럼 말씀드리지요. 케이든 황태자가 살았습니다. 심지어 트리발로스가 대패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런……!”
잔을 내려놓던 벨라테스가 손에 힘이 풀리면서 찻잔을 놓쳤다.
쨍!
잔과 소서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대체 어떻게?”
벨라테스와 바로크 후작 모두가 크게 놀라 크레센트를 바라보았다.
크레센트는 체념한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엘렌 에덴버가 도망쳤고, 그녀가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황태자의 원군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은 제정신이 박혀있다면 그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향해 진격해 오는 중이겠지요.”
군사들이 진격해 오고 있을 것이라는 소리에 벨라테스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크레센트의 손을 덥석 잡고는 말했다.
“당장 짐을 싸. 도망쳐야 해, 크레센트!”
크레센트는 제 붙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가 나직이 물었다.
“정말 더는 여력이 없습니까?”
“……뭐?”
벨라테스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바로크 후작이 말했다.
“트라이아의 군사들이 돌아오면 그래도 승산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엘렌 에덴버에게 붙잡혀 현재 황태자군에 예속되어 있지.”
“그게 무슨?”
바로크 후작이 놀라 눈을 홉뜨자, 크레센트가 그 반응을 확인하고는 망연히 말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군. 없는 거야.”
“전하. 트라이아 공작이 배신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에덴버 후작이 모든 군사를 이끌고 갔다고 했잖아. 배신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중요한 건 믿었던 서부군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거지.”
그는 킥킥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말해보게, 후작. 소위 귀족파로 불리는 나의 지지자들, 그 군사들! 모두 관리했던 것은 후작 아니었나?”
“설마 오세먼도…….”
“그들은 황태자와 직접 맞닥뜨렸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전략이 역으로 뒤집혀 우리 목을 조르고 있는 거라고.”
크레센트가 힘없이 말을 늘어놓다 점점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황태자를 고립시키고 수도를 차지해, 주변 귀족들을 천천히 장악한다는 그 작전. 역으로 수도가 고립되고 국경에서 결집한 귀족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고 있다고!”
그렇게 외치는 그는 반쯤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바로크 후작의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땀방울이 흘렀다.
그런 제 아들의 모습을 보던 벨라테스가 나직이 한 마디를 뱉었다.
“……없진 않지.”
“어머니?”
그에게 도망칠 것을 종용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는 방법이 있단다. 크레센트는 표정을 굳히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제 모친을 보았다.
“네가 어떻게든 부딪쳐야겠다면, 방법은 있단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 낯빛이 좋지 않았다.
결국 조급해진 크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황제가 우리의 손안에 있으니 그걸 인질로 협박하든지, 정말 내전을 벌여 저쪽이 먼저 고개를 숙이게 만들든지. 둘 중의 하나는 선택해야 해.”
그 말을 들은 크레센트의 표정도 굳었다. 무엇도 그리 쉬운 단어는 아니었다.
인질이나 내전이라.
“하지만 둘 다 위험해. 네가 황제를 인질로 삼은 게 알려지는 순간 네 명분은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정말 내전을 벌이는 것도 그렇지. 이건 네가 안전한 길이 아니라, 황태자에게 우위를 주지 않는 길일 뿐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벨라테스는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권력을 위해 결혼하고 그것을 위해 아이를 낳았다. 권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였고, 그것이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달도 중요했지만 그만큼이나 제 자식의 목숨도 소중했다.
적어도 다른 이를 죽여 없애서라도 사수해야 할 만큼은.
“하지만 전 그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할 겁니다.”
크레센트가 입가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쪽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것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은 인질이나 내전이고.”
“그래. 그리고 이 나라를 생각해 황위를 달라고 하는 거다. 가지지 못한다면 공멸하겠노라고.”
그것을 슬픈 눈으로 보고 있던 벨라테스가 입을 열었다.
“다만 반드시 이것만은 잊지 말려무나. 너는 반드시 평화적인 제안을 건넨 쪽이고, 그것을 거절한 것이 황태자 쪽이 되어야 한다는 걸.”
* * *
해가 진 저녁.
식사를 위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병사들 사이로 커다란 간이 천막들이 하나씩 서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깔끔하고 쾌적한 막사 안.
지휘관들이 쓰는 곳이라 제법 그럴듯한 탁자와 간이 의자까지 갖춘 이곳엔, 단둘이서 식사 중인 케이든과 엘렌이 있었다.
“오늘은 메뉴가 제법 괜찮습니다. 고기도 있고.”
그가 탁자 위의 그릇들을 엘렌의 앞으로 놓으며 말했다.
“살이 많이 내렸던데, 좀 잘 챙겨 먹어야지요.”
평소 같으면 어불성설이라며 거절했을 엘렌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달랐다.
“그럼 감사히.”
그녀가 냉큼 접시를 받아들며 말했다. 아주 천연덕스러운 것이 예절을 엄격히 찾던 평소와는 제법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와 달리 케이든도 조용히 그녀를 지켜만 보는 것이었다.
‘아, 이게 정답이었네.’
엘렌은 내심 만족해서 생각했다.
확실히 눈앞에서 거절하면 거절하는 만큼 더 하는 사람이었다, 이 남자는.
그녀는 몇 번의 실랑이 과정에서 거절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결과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철면피다. 같이 밀어붙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