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나름 내로라하는 귀족가들은 다 모인 황태자 휘하의 이스타지오군.
그들은 수도에서의 전쟁을 준비하며 북으로 북으로 진군 중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쉼 없이 달려왔을 텐데. 힘들지 않습니까? 내 앞에 앉아서 조금 쉬엄쉬엄 가도 됩니다.”
케이든이 제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엘렌을 계속 곁눈질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유사시에 전하의 말은 힘이 빠져 있어선 안 됩니다.”
“그대 하나 더 오른다고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전하의 앞이라니요. 감히 전하의 등으로 보호를 받을 생각을 하다니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이 선두에서 말을 끌고 있는, 이곳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었다.
트라이아 공작은 지금 사실상 포로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현재 이스타지오군은 황족인 케이든을 필두로, 서부의 아발란쉬 후작과 동북부 에덴버 후작의 양두체제라고 보아야 했다. 그런데 그 우두머리들의 행동이 이렇게 심상치 않으니.
한 사람은 끝없이 밀어붙이고 한 사람은 그걸 또 기가 막히게 다 막아내고 있다.
이 미묘한 기류의 시작은 승전 파티 날, 몇몇 기사들의 목격담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세상에, 후작께서 직접 전하를 구하러 가셨을 때는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이었지!]
[그거 굉장했지. 전하께서 꽉 끌어안으셨을 때는 나도 살았다, 싶어서 울컥하더라니까.]
[그거 나도 봤지. 전하께서도 그런 면모가 있으셨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워. 퍽 정열적이셨으니 말이야.]
바로 이 기사의 한 마디였다.
[응? 너 무슨 소리 하냐?]
[뭐가?]
[정열적이라니. 그거 어감이 좀…….]
[그러게. 야, 너 말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함부로 끼워 맞추면 안 되는 거야, 인마.]
[아니, 진짜 그랬다니까? 그렇게 꽉 끌어안는데, 어우. 내가 다 감동적이었다고.]
그렇게 불붙기 시작한 그들의 ‘태자 전하의 마음의 향방에 관한 논의’는 그날 술판이 끝나도록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술김에 내기까지 벌이게 되었다.
[네가 아무리 여자를 못 만났기로서니, 적당히 좀 해라!]
[아, 두고 보라고! 그러면 알게 되겠지!]
그들은 서로 씩씩대며 숙소로 돌아갔고, 그렇게 출정을 나서게 된 다음 날.
이스타지오의 황태자는 세상에 다시없을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 말했다.
[아, 후작. 그대는 내 옆에서 함께 가면 됩니다.]
기사들의 귀가 쫑긋 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마치 그것을 알고 부추기기라도 하듯, 그가 계속해서 쏟아내는 대사 하나하나는 모두 굉장했다.
[후작. 바람이 제법 쌀쌀하니 이것도 위에 두르시지요.]
[후작. 식사는 내 막사에서 함께하시지요.]
[후작. 춥진 않습니까? 여기 화로가…….]
[후작.]
그런 황태자의 행동을 두고 그곳에 있는 이들이 떠올린 생각은 모두 똑같았다.
설마 태자 전하께서 에덴버 후작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시나?
이야기는 황태자가 직접 이끌고 있는 중앙군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글쎄 태자 전하께서…….
에덴버 후작 각하께서…….
기사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병사들에게로, 그리고 각 부대들을 이끌고 있는 귀족들에게로 퍼져나갔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리스는 그저 올 게 왔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테리어드는 초점을 흐리다가 이내 괜한 농담 몇 마디를 던지며 웃어 보였다.
그 외 다른 이들은 모두 제 주군 될 이의 구애에 가까운 행동들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고, 그렇게 그날 저녁.
그날도 어김없이 케이든은 식사 시간이 되자마자 엘렌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후작. 가지요.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전하.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저만 따로 전하의 막사에서 식사를 하는 건―”
“병사들이 칠 막사의 수를 하나 줄여주니 아주 귀감이 될 만한 행동이겠지요.”
케이든이 그녀의 말을 가로채 엉뚱한 말로 끝을 맺었다. 엘렌은 기가 막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잖습니까. 전하.”
하지만 그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대의 깊은 배려를 병사들은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그대의 현명함을 입에 담겠지요.”
“아니, 전하. 하지만 다른 귀족들에게 이건 공정한 처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들이 보기에 나는 아주 불편한 상사지요.”
케이든이 또 엘렌의 말을 슬쩍 가로막았다.
이것 봐라 싶었던 엘렌이 그를 흘겨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은근슬쩍 말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그대는 아니잖습니까. 그대는 나와 목표를 공유하는 동반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엘렌이 잠시 입을 닫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동안 부대낀 시간이 있어서일까. 이 남자는 자신이 어디서 약해지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닌가? 그냥 내가 이 남자에게 약한 건가.’
그녀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보라. 반박하면 서운해할 만한 말들만 끌어오니 무어라 말하기도 여의치 않다.
‘역시 아직 이렇게 둘만 있는 자리는 조금 신경 쓰여. 난 아직 어떻게 대답을 해 줘야 할지 정하지도 못했고…….’
물론 이렇게 고민하더라도 막상 식사 자리에 끌려 들어가고 나면 대화는 어느새 평소처럼 자연스러워지겠지만.
그러니 저 황태자는 저렇게 당당히 식사를 권하는 거다.
엘렌이 그대로 입을 다물고 있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케이든은 그저 행복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시지요. 기껏 차려진 음식이 다 식겠습니다.”
* * *
리암 오세먼의 연락 이후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이틀이면 무언가 결판이 나도 났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세먼에게서는 그 뒤로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늘도 회의실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왔던 크레센트는, 결국 인내심이 끊기고 말았는지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쾅 내리치며 말했다.
“왜 연락이 오지 않지? 설마 트리발로스가 우리를 배신한 건가? 그래서 형님이고 오세먼이고 모두 죽어버리기라도 했나?”
크레센트에게 오늘 있었던 변동사항을 보고 중이었던 길리언은 성질을 부리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이 이상 황자에게 보고를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알아차리고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덮었다.
길리언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들은 마그놀리아를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내실을 다지기에도 바쁜 때이지요. 1만의 군사가 한계였을 겁니다.”
“그럼 대체 왜 오지 않는 거야!”
쾅!
크레센트는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 다리에 발길질을 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길리언은 난동을 부리는 크레센트와 대조적으로 담담히 말했다.
“연락이 온다면 바로 위로 올리도록 지시해 놓았으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그의 말에 크레센트는 그를 흘끗 보고는 다시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연신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평소 제 체면에 해가 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그였지만 지금은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었다.
신경이 온통 오세먼의 연락에 쏠려 있군.
길리언이 낮게 조소했다.
그때였다.
똑똑.
바깥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길리언은 크레센트에게 가볍게 묵례를 한 뒤 걸어가 문을 열었다.
“뭐지?”
길리언은 제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바깥에 서 있는 이는 무장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군복을 모두 갖춰 입고 있는 군인이었다.
“급한 전갈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남자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다. 길리언은 거기서 그의 묘한 불안감을 알아차리고는 물었다.
“……어디서 보냈나.”
“오세먼가입니다.”
그 말에 길리언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남자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든 뒤 이만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탕. 그가 문을 닫고 들어오자 크레센트가 손을 뻗으며 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리 내.”
길리언은 들고 있던 편지를 순순히 크레센트에게 건넸다.
크레센트는 나이프를 쓸 새도 없이 봉해져 있던 편지를 북북 찢었다. 그리고는 곧장 봉투 안의 내용물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며 편지를 읽어 내리던 그는, 처음엔 흥분해서 식식대더니 가면 갈수록 호흡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당장이라도 터져 버릴 듯 폭탄처럼 굴던 태도는 어디 가고 어느새 그는 조용히 서서 제가 들고 있는 편지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길리언이 나직이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그의 말에 크레센트가 고저 없는 어조로 말했다.
“트리발로스군이.”
“예.”
“패배……했다는군.”
어딘가 현실감 없는 목소리였다.
그들로서는 절망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길리언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크레센트는 달랐다.
한 번 말문이 터지자 그의 입에서는 폭포수처럼 의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지?”
“…….”
“왜 북부군이 오지 않나 했더니, 형님께서 계신 전선으로 바로 가 있었다고 하고. 심지어 동부군과 서부군까지도 모두 그곳에 있다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점점 커지기 시작한 크레센트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다 못해 음의 고저까지도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길리언은 차분히 그가 묻는 말에 답했다.
“동부는 어차피 병력도 얼마 되지 않기에 처음부터 무시하기로 이야기가 끝난 부분 아니었습니까. 수도를 제대로 잡고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병력이라고.”
“그건 모두 트라이아 공작의 지휘 아래 서부군이 우리 편을 들고, 북부군은 인질을 잡아 묶어 놓는다는 전제하에 나눈 이야기들이었잖아!”
크레센트가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