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리암 오세먼은 정말 부리나케 달렸다.
새벽 깊은 밤, 트리발로스와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그는 곧장 자신의 군사들에게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직전까지 전달받은 명령과 그의 명령이 상충되자 병사들은 의아함을 표하기 시작했다.
뭐라고?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그렇게 전달받았다니까! 가라잖아!
하지만 그런 혼란도 잠시.
저희와 같은 일반 백성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벌을 주는 것은 결국 황가가 아닌 영주 일가였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곧 영주 일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오세먼군은 홀로 로에리 요새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의 뒷문을 향하던 그들의 뒤에서 한 무더기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바로크군이었다.
그들은 몇몇 십인장들의 인도하에 후퇴 중이었다. 그런데 나름 질서 있게 후퇴하고 있던 오세먼군과 달리, 그들은 뒷문 코앞까지 왔음에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을 이끌어야 할 오클라니 바로크가 수감되며 지휘관과 기사들을 잃은 탓이었다.
바로크군은 마찬가지로 후퇴 중인 오세먼군을 보고서야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모든 지휘권을 리암 오세먼이 쥐게 되며 그들은 모두 그의 지휘하에 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영지의 군사는 로에리의 북서쪽, 아잔틴에 도착했다.
분명 이곳으로 로에리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올 것이다.
리암은 그리 말하며 이곳에 진을 쳤다.
황태자가 그곳에서 죽어버린다면 좋고, 살아남아 이곳으로 오더라도 저희가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으니.
그렇게 아잔틴에 진을 치길 하루.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하루가 지나도록 그의 성은 조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리암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로에리 요새로 정찰병을 보냈다. 그랬더니 곧 돌아온 정찰병이 하는 말은 이러했다.
아직 성에 이스타지오의 깃발이 걸려 있는뎁쇼?
그 말을 들은 리암 오세먼이 뱉은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아. 우린 망했다.
* * *
이스타지오의 수도, 이스타잔.
크레센트가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윌튼 자작을 내려다보았다.
“저, 전하.”
“그대는 내 말이 우스운가 보군. 이건 황실에 대한 모독이라 봐도 좋겠지.”
크레센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앞으로 척척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윌튼 자작은 안색이 흙빛이 되어서 제게 다가오는 기사들을 휙휙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헨리 윌튼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그들이 제 뒷덜미를 잡고 양손을 결박하자, 윌튼 자작은 사색이 되어서 외쳤다.
“아, 아닙니다! 나라가 위험한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땅히 드리겠습니다!”
크레센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 아까는 무리한 요청이라더니. 역시 내 말을 가볍게 듣고 있었군. 그렇지?”
“아니, 아닙니다. 전하!”
대답하는 윌튼 자작의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렸다.
헨리 윌튼은 크레센트의 곁에 서 있는 길리언 크렘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꽤나 친했잖아. 우린 사업적으로도 파트너였잖아?
그의 눈빛에는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길리언은 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별 감흥 없이 다시 고개를 정면에 두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윌튼 자작의 속은 무너져 내렸다.
내가 틀렸다. 잘못 선택했어!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길리언 크렘벨과 어울리다 트리발로스-마그놀리아 전쟁으로 손해만 보고, 지금에 와서는 황태자궁에 동생을 시녀로 밀어 넣은 게 화근이 되어 이렇게 재산이나 털리는 꼴이라니.
크레센트 황자가 요구한 금액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곧이곧대로 내주었다간 윌튼가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리막길뿐이었다.
그건 내년 농사지을 씨감자까지 모두 내놓으라는 꼴과 다름없었고, 그런 요구를 듣고도 곧장 알겠노라며 허락할 귀족은 이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 폭군 앞에서는 그저 한낱 변명일 뿐이다.
“그 귀가 문제일까, 혀가 문제일까…….”
크레센트가 턱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윌튼 자작은 사지를 결박당해 부자유한 몸으로 어떻게든 땅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 그랬습니다. 부디 이 우둔한 백성을 살펴주십시오, 전하……!”
그의 흐느낌에 가까운 애원에 크레센트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크레센트는 몸을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며 말했다.
“그래. 군주에게 자비는 덕목이지. 시일은 알아서 잘 맞추리라 믿겠어. 알겠나?”
“예. 전하!”
“좋아. 오늘의 국정은 이것으로 그만하지.”
말을 마친 크레센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튼 자작은 풀려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도망치듯 알현실을 나갔다.
크레센트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황제 전용의 통로로 알현실을 나섰다.
생각보다 수도의 귀족들을 압박하는 일이 순조로웠다. 저항이 제법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고 보니 저희도 황태자의 생환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었다.
그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저 필요한 것은 힘뿐이지.
크레센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그때 그의 뒤를 따라나선 길리언이 넌지시 그를 불렀다.
“전하.”
“뭐지?”
“리암 오세먼에게서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마음에 여유가 넘쳤던 크레센트는 꽤나 살가운 어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여유는 길리언의 보고를 듣자마자 파삭, 깨져나가고 말았다.
“황태자가 제가 있는 곳으로 왔다며, 그를 죽이고 전하께 황위를 가져다드리겠다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크레센트가 한쪽 눈썹을 팍 구기며 물었다.
“죽이겠다고?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그의 단독행동을 네가 허락했나?”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의 단독행동입니다.”
“이런 멍청한……!”
괜한 짓을 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었다.
제 명분이 황가의 패륜인 이상, 자신은 제 형을 두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 암살을 시도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돌이킬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쯤 일은 이미 벌어졌을 것이고,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는 그다음을 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확실히 그렇긴 하지…….”
크레센트는 그의 말에 듣는 둥 마는 둥 한 대답만 남긴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제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든 그는 그것을 깊이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후……. 됐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한 번 해 보라고 해야지. 당장에 변하는 건 없다.”
“그리 생각하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크레센트는 재차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는 후, 내뱉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의 선에서 형님이 처리된다면 좋은 거고, 그게 아니어도 국경이 대치 상태라는 것은 변치 않지. 만약의 만약을 가정하더라도 형님이 끌고 올 병력도 충분치 않으니 당장의 위협은 되지 않을 거다.”
그리 말하는 크레센트를 길리언은 그저 담담히 주시했다. 길리언은 별거 아닌 듯, 지나가는 어투로 툭 다른 화제를 꺼냈다.
“병력이라 하니, 지금쯤 크라이언트 백작이 북부군과 함께 올 때가 된 듯한데 웬일로 별 소식이 없군요.”
그러자 크레센트가 툭툭, 담뱃재를 털고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황제가 있는 이상 이곳으로 와봤자 아들딸을 먼저 챙기지는 못해. 그런데 굳이 오겠나?”
“크라이언트 백작은 제 자식들을 퍽 아끼는 자입니다. 저는 그가 곧장 이곳으로 와 어떤 식으로든 제 자식들의 안전을 확보하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아니야. 아니지.”
크레센트는 한차례 머리를 흔들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우리와 대적했다가 태자가 죽기라도 하면? 태자가 함께하지 않으면 저들이 그렇게 저항하는 의미가 없지.”
“…….”
“크라이언트는 장삿속을 굴리는 이이니, 제가 함부로 행동하지만 않으면 인질은 멀쩡하리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을 거다.”
크레센트가 길리언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실제로 그리하여 방생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반드시 다시 인질들을 확보해. 아직 수도 검문에 걸리지 않았으니 분명 이 어딘가 숨어 있다.”
“예. 알겠습니다.”
“저들은 함부로 수도로 오진 못해. 그러니 형님이 돌아오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형님의 수도 힘을 철저히 죽여 놓아야 해. 지금.”
그새 올려놓았던 잎을 다 태운 크레센트는 다시금 담뱃잎을 찾아 서랍을 뒤적였다.
그 뒷모습을, 길리언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크레센트 황자는 무언가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의 움직임은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종류의 확신을 말이다.
하지만 이미 몇 차례 겪어본 그가 생각하기엔 달랐다. 자신의 예상쯤이야 생각보다 자주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크레센트 황자가 하는 말도 일리가 없진 않았다. 수도의 봉쇄부터 이루어졌던 만큼 아직 수도 내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한데…….
‘오히려 그러니 엘렌은 이미 수도 바깥으로 도망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그는 창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는 크레센트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쫓았다.
혹시 저게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
하지만 몇 모금 다시 담배를 태운 크레센트는 태연히 그를 불러 수도의 상황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것을 보면 또 속으로 무언가 다른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 잡듯 뒤졌는데도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지…….’
그러니 사실 엘렌은 이미 도망쳤고, 그렇기에 북부군이 아직 오고 있지 않은 것이라면.
그리고 그 병력이 그대로 수도를 벗어나 황태자에게로 향했다면―
‘크레센트에게는 이미 승산이 없다.’
길리언은 크레센트가 묻는 말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며 혼자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이번 크레센트의 작전마저 실패하면, 사실상 케이든 이스타지오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트리발로스는 점령지를 다스리는데 벅차 여기까지 재차 원정을 보낼 병력이 없었다. 단순 자존심만으로 정벌을 보내기엔 이스타지오는 아직 대국이었다.
그 트리발로스의 힘을 빌려 일을 벌여야만 했던 그들만으로는 당연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그렇게 되면 사실 케이든 이스타지오에게 대적할 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그는 저절로 쥐어지려는 주먹을 애써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