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네?”
엘렌은 제 고막을 파고드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반문했다.
이게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괜찮냐는 질문에, 뭐라고?
하지만 그녀의 의심 따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곧장 이어진 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고 돌아왔다.
“그대를 사랑해요. 진심입니다.”
“…….”
엘렌은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자신도 분명 흔들렸지만.
‘그래도 지금 이 한복판에서는 아니지!’
걱정으로 새하얗게 변한 머리로 정신없이 뛰어오느라 완전히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새삼 자각하게 되자 엘렌은 자신의 등 뒤에 닿아오는 감촉에 정신이 쏠려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는, 그러니까, 아! 하마터면 저걸 못 보고 엎어질 뻔했네. 전하를 태우고 달리기에 여긴 너무 위험해. 아, 이런. 집중이 안 돼. 나는, 그러니까―
“떨어져 죽고 싶지 않으시면 조용히 하세요!”
그녀는 발갛게 열이 올라 익어버린 얼굴을 숨기지도 못하고 외쳤다.
그녀가 소리치는 것을 처음 들은 케이든은 놀라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뒷모습을 꿈처럼 쳐다보았다. 뒤에서 보이는 귓바퀴가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지간히 어처구니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런 고백이라니, 분명 미친놈 같았겠지.’
아까까지는 살아남을 수 있는 승산을 재고 있었는데 지금은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났다.
미리 변명하자면 이 고백은 불가항력적이었다.
오면서 계속 큰 소리를 내었어야 했는지 살짝 피곤한 듯 내려앉은 음성, 행군이 고되었는지 출정 전 안았을 때보다 살이 더 내린 가냘픈 몸.
그럼에도 이런 곳까지 말을 달려 들어오는 의연함 가득한 저 모습에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경외를 표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단언컨대 누구라도 저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녀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케이든은 그녀의 작은 등을 통해 느껴지는 작은 고동과, 자신의 귓전을 때리는 제 심장의 요동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의 곁에 서는 것은 자신이 되고 말겠다고.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누구를 바라보든, 지금까지 저를 살게 해 주고 지금 저를 구해내 앞으로의 삶까지도 쥐여준 이 여자에게 자신의 평생을 바치겠다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머릿속을 헤집고 있던 모든 고민과 슬픔이 거짓말처럼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녀가 눈앞에 무사히 있는 지금만큼은 수도도 황위도 모두 상관없었다. 그 모든 것은 그녀가 있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난 정말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 거야.
그는 정말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대화의 흐름이 어떠했든, 두 사람의 호흡은 제법 괜찮았다.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자유로운 두 팔로 주변의 적들을 상대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상대는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기 위함이었는지 말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말의 엉덩이에 칼이 박히며 말에서 내리게 된 이스타지오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엘렌이 이끌고 온 원군들은 달랐다.
그들은 모두 말이 있었고, 그렇기에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으며, 당연하게도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트리발로스의 기사들이 무력화된 것을 확인한 엘렌이 말을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그녀가 먼저 내리자 그녀의 뒤에 앉아 있던 케이든이 조심스레 등자를 밟고 내렸다.
테리어드와 엘시어가 주요 인물들을 포박하기 위해 곧장 트리발로스의 기사들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엘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확히는, 옮기려던 차였다.
그녀의 뒤쪽에서 강한 힘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다.
“……전하?”
“이건 뭡니까. 설마 다쳤습니까?”
케이든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끝이 제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아무래도 허벅지에 흥건히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본 모양이었다.
누가 보면 그가 칼에 찔린 줄 알 정도로, 그는 핏기가 싹 가신 낯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케이든이 재차 물었다.
“다쳤, 다쳤습니까……?”
방금 코앞에서 적군을 보고 있을 때조차도 떨지 않던 사람이 저건 대체―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아무 의미 없는 개꿈이야. 그럼. 개꿈이지.]
[제발, 이 성문을 열고 내가 그의 무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줘……!]
아.
엘렌은 조금, 그의 마음을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에요. 내가 길을 안내해야 해서 선두로 달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생채기죠. 전쟁터에서 이런 건 감히 상처라 부르기도 미안해요.”
그녀의 말에 케이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울기라도 할 것처럼.
케이든은 언젠가 헤어지던 그날 혼자 무언가를 제 속으로 삼켜버렸던 그때와 같은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열리는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가족을 안전하게…… 내 곁에서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만은 지킬 겁니다. 반드시.”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사람, 지금 또 자연스럽게 고백했지.
엘렌은 어쩔 줄을 모르고 꽁꽁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폭탄을 던지고 간 그는 주변의 의무병에게서 손수 붕대와 약을 얻더니, 직접 그녀의 다리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나를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이 상처가 내 목숨은 그대의 것이라는 증표가 되겠군요.”
심지어 고백만큼이나 듣기 민망한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다리에 붕대를 감고는, 풀어지지 않게 꽉 매듭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조금만 더 기다리게 했다간 체셔 경이 내 뒤통수를 한 대 치겠습니다.”
그 미소는, 아까와는 달리 어딘가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 * *
포박당한 드미트리 미하일이 외쳤다.
“이스타지오와 거래를 나누고 도움을 주러 온 우리를 전멸시킨다면 우리의 폐하께서는 가만히 있으실 줄 아는가? 전쟁이 날 거다!”
“이미 났는데 무슨. 개소리도 유분수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케이든이 빈정거렸다.
저희 태자의 언행이 그다지 바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익히 아는 이들은 이냥저냥 들어 넘겼지만, 그것을 처음 듣는 이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보았다.
미하일 역시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는 말했다.
“어리석은 짓 말고 우리를 포로로서 대우해라. 그게 서로 간에 좋을 테니까.”
그러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엘렌이 그가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해 돌려주었다.
“반역자와 거래를 나누고 도움을 빙자하여 우리의 땅을 침략한다면 우리의 폐하께서는 가만히 있으실 줄 아는가? 어리석은 짓 말고 그 목이나 내놓지.”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말에 미하일이 씩씩대며 말했다.
“정부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니 닥쳐라!”
그는 제 분에 못 이겨 소리쳤고, 엘렌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하, 실소를 내뱉은 뒤 말했다.
“멍청한 걸 자랑하는 방법도 가지가지―”
그때였다.
퍼억―!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케이든이 두어 걸음 휙휙 걸어가더니 그대로 발로 미하일의 안면을 강타한 것이다.
“크윽!”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검보다 입을 더 놀리는 작자로군. 너의 처분을 결정했다.”
케이든이 냉담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그 혀를 자른 뒤 본보기로 처형하도록 하지.”
“뭐…… 무슨!”
“얼굴만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훼손되지 않게 특별히 신경 써 줄 테니 걱정 말도록.”
“제정신인가? 정말 트리발로스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불사하긴. 저번 승전으로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우리를 마그놀리아 같은 소국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해. 지금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나?”
그가 비웃음 가득한 낯으로 말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쓰레기들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쓰레기지. 그렇지 않나? 그 입을 보면 그런 게 틀림없는데.”
케이든이 다시금 미하일의 턱을 갈겼다.
퍽!
“크윽……!”
“이걸 치워라. 처형 집행인은 지원자를 받고, 처형대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성문 근처 공터에 설치한다.”
“예. 전하.”
드미트리 미하일은 그렇게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 나갔고, 지휘관을 잃은 군세는 구심점을 잃으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 * *
로에리 요새로 진입한 군사들은 아발란쉬 후작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트리발로스군을 제압해 나갔다.
요새 내부에 남아있는 적군들을 정리하던 와중, 황태자가 적장인 드미트리 미하일을 죽이고 귀환하자 군사들의 환호성은 그야말로 성이 떠나갈 정도였다.
피해가 큰 만큼 더욱 값지게 느껴지는 승리와 목숨이었다.
그대로 트리발로스가 근처에 구축해둔 진지까지 찾아 약탈을 끝낸 이스타지오군은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한 승전파티를 벌였다.
넘치는 음식과 술.
각자 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만찬보다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파티였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충분히 값지고 기쁜 식사였다.
살인의 화마 대신 따듯한 온기를 머금은 모닥불이 곳곳에서 피어올랐고, 그 흥겨운 분위기 사이로 어찌할 줄 모르는 두 남녀가 있었다.
승전 파티의 시작 전, 케이든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하고자 손을 내밀었다.
아까 제가 던져놓은 막무가내의 고백들이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후작. 그대를 찾았습니다.”
“……아.”
엘렌은 한 음절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와 달리 아직 다음 행동의 방향성조차 잡지 못한 엘렌은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결국 테리어드와 엘시어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그녀는 은근슬쩍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 시도는 곧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막히고 말았다.
“엘렌 에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