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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9화 (109/128)

<109화>

말을 달리고 있는 엘렌에게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반드시 황태자가 자리하고 있으리라는 그런 확신.

어느새 그녀의 근처까지 다가와 함께 달리고 있는 테리어드와 엘시어가―“누님! 형님! 같이 가요!”― 그녀에게 위험하니 속도를 조금만 줄이라며 소리를 쳤다.

사방에 사람과 장애물이 넘쳐나니 걱정되어 꺼낸 말인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승마에 자신이 있었고,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그녀의 뒤를 쫓아 열 명 남짓한 인원이 아수라장을 뚫고 달렸다.

그렇게 달리길 잠시.

꽤나 깊이 들어왔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테리어드가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안 좋은 생각이 드는 것인지 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가 눈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엘렌. 이 이상은 안 되겠어. 너는 엘시어와 함께 온 크라이언트의 기사들과 함께 돌아가. 이 앞으로는 나와 엘시어만 갈게.”

그러자 엘렌의 위험천만한 곡예를 보며 따라오던 엘시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누님. 저희는 어찌 되었든 기사로서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지만, 누님은 안 됩니다.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돌아가세요.”

“안 돼.”

엘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싸울 수 있다고는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전하를 빠르게 찾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해요.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내 판단을 믿어줘요, 테드.”

엘렌으로서도 자신이 전투상황에서는 짐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잘 알았다. 이곳의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말대로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이들은 이정표 없이 달리는 말들이 되고 만다. 만약 그로 인해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끔찍했던 엘렌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지금 설득에 낭비하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먼저 갈 테니 어서 날 쫓아와요!”

그렇게 통보한 그녀는 곧장 말의 고삐를 내리치더니, 다시 급속히 속도를 올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테리어드가 칫, 하고 낮게 혀를 차고는 다급히 말의 고삐를 내리치며 외쳤다.

“따라간다!”

그는 차마 그녀를 혼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달려 나갔다.

대체 어찌 저렇게 무모한지!

그가 알던 엘렌은 언제나 설득 가능한 근거를 차근차근 들며 이야기를 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물론 밀어붙이고 나서야 설명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게다가 돌이켜 보면 무모해 보일 만큼 과감한 행동 또한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논리적인 근거를 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저를 믿어 달라 말하기만 하고 있으니 테리어드로서는 답답하고 걱정돼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어떻게 저 앨 이겨먹겠냐고.’

테리어드는 혼자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엘렌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 * *

초근접전을 벌이게 된 성벽 아래.

총을 쏠 여유가 사라진 병사들은 검을 꺼내어 상대를 찌르고, 심지어 총 받침대를 들어 상대의 머리를 후려치기도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모두들 겁내지 마라! 트리발로스는 지휘관조차 얼굴을 내밀지 않는 오합지졸들이다!”

케이든이 말 위에 앉아 제 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어깨에 꽂아 넣었던 검을 빼어들며 외쳤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장비하고 내려왔던 탄약들을 다 쓴 지 오래였다. 총이 쓸모없는 물건이 되자마자 그는 검을 꺼내 들었고, 사방에 피가 묻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으로 함께 전투를 하는 지휘관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마련이다.

와아아아―!

이스타지오군은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재차 무기를 휘둘렀다. 주변은 시끄러운 소음들로 가득 찼고, 누군가는 쓰러지고 누군가는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아수라장의 속이었다.

쇄애액―

무언가가 날아와 푹,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히히힝―!

그가 타고 있던 말이 다리를 높게 치켜들며 울었다.

“워! 워! 진정해!”

케이든은 갑작스레 말이 난동을 부리는 탓에 균형을 잃을 뻔했다. 필사적으로 고삐를 붙들고 있던 그는 타이밍을 보아 훌쩍 말에서 뛰어 내렸다.

으직, 하고 발목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크윽……!”

그가 고통으로 잠시 주저앉은 틈이었다. 뒤에서 누군가의 검이 들어왔다.

챙!

반사적으로 그것을 튕겨낸 케이든은 제 발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끄륵, 하는 소리와 병사가 쓰러져 내렸다. 그 시체를 방패 삼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의 엉덩이에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날아온 방향을 보면, 아마 저쪽.

케이든은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서부터 접근해 오고 있는 여덟 명의 기사를 보았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드미트리 미하일.

트리발로스의 지휘관이었다.

* * *

“이번엔 제대로 찾은 것 같군.”

다가오는 남자의 체구는 다른 이들보다 유독 컸다.

케이든은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위험하겠는데.

그는 애써 다친 발목을 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든이 말에서 내려가자 그를 지키던 기사들이 그를 둘러싸는 형태로 진형을 바꾸었다.

“이스타지오의 황태자는 전면에 나설 줄도 모르는 이인가? 애석하군.”

제가 끌고 온 기사들의 선두에 선 미하일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닥쳐라! 선전포고도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 네놈들 따위가 그리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말할 수 있는 분과 없는 분이 따로 있나? 그것도 신기하군.”

케이든의 기사 중 한 명이 외치자 미하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벅저벅, 남자들이 다가오자 그 기류를 느낀 병사들은 그곳에서부터 슬금슬금 멀어졌다.

그렇게 가운데가 텅 비고, 그 공터에는 이스타지오의 황태자와 기사 네 명, 그리고 트리발로스의 지휘관과 기사 일곱 명이 서게 되었다.

미하일이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결단을 내려라.”

“무슨 결단을 말하지?”

욱신. 발목에서 통증이 일었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우리의 목표는 널 없애는 거다. 그게 성공한다면 사실 지금 이 전투쯤이야 어찌 되어도 좋아.”

“내 군사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면 여기서 깔끔하게 목을 내놓으라는 소리인가?”

“말귀가 빠르군.”

미하일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케이든 역시 똑같이 픽 바람이 새는 헛웃음을 지었다.

참 나. 내가 죽고 나면 병사들을 살려준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다고. 진심으로 내가 저런 말에 넘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묻는 건가?

케이든의 표정을 본 미하일은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서는 말했다.

“……말귀가 빠른 것과 별개로 머리는 안 돌아가나 보군. 방금 너는 고통 없이 한 방에 간다는 선지를 잃었다.”

“허, 웃기는군. 누가 네게 그런 것을 허락했지?”

그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며 입가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이봐, 너. 주제를 알아야지. 왜 생사여탈권을 네가 쥐고 있기라도 한 듯이 말하나? 트리발로스는 너를 신으로 섬기기라도 하는 건가?”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모양이군. 그럼 네가 쥐고 있다고 생각하나?”

미하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가 당장이라도 전투를 시작할 듯이 앞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케이든은 자신의 다리에 지그시 힘을 주어 보았다. 욱신. 아직 통증이 심했다.

‘제길. 좋지 않아.’

그는 제 손에 잡힌 힐트를 꽉 움켜쥐었다.

병사들의 앞에서 자신이 주눅 들면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보란 듯이 받아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진짜 전투에서도 승산이 있을지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이건……?’

발아래에서부터 전달되어오는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쪽을 향해 가까워져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슬쩍 눈짓으로만 주변을 살피니 아직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별달리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다리의 통증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 듯했다.

지금 타이밍에, 이 방향이라면.

케이든은 냅다 눈썹을 치켜올린 미하일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하고는, 덩달아 한쪽 입꼬리까지 슬쩍 올려준 뒤 말했다.

“그래. 너랑 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지.”

“쨍알쨍알 시끄럽군. 결정했다. 다들 전투 준비!”

스릉. 검날이 쇠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다들 긴장과 집중력을 끌어올린 그때.

“……!”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른 사람들도 바닥을 울리는 진동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건 대체…….”

미하일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직감한 듯 목소리가 떨렸다.

“뭐긴 뭐겠나. 내 원군이지.”

“무슨 소리! 분명 이스타지오의 원군은 없다고―”

“아, 진작 와 있었는데 몰랐나? 안타깝군. 그러게 너도 좋은 사람을 만났어야지.”

그가 툭, 던지는 말에 미하일의 동공이 흔들렸다.

히히힝―!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나온 열댓 마리의 기마부대와 그들의 선두에 선 한 사람.

휘날리지 않도록 질끈 묶어 고정시킨 환한 금발과 전장에서 보기 쉽지 않은 여린 몸, 높은 목소리.

“저기예요! 진압해요!”

“가자! 전하를 호위해라!”

테리어드의 외침과 함께 그의 좌우에서 함께 달려오고 있던 기사들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그대로 트리발로스의 기사들을 덮쳐들어 갔고, 창과 장검을 든 기마병들과는 애초에 사정거리가 달랐던 트리발로스의 기사들은 그대로 목을 꿰뚫리거나 다리, 복부 등에 상처를 입으며 바닥으로 엎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각하! 바로 후퇴하셔야 합니다!”

미하일의 부관이 그를 잡아끌었다.

“전하!”

엘렌이 케이든을 부르며 팔을 뻗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그대로 엘렌이 케이든의 옆을 지나쳐가며 두 사람의 손끝이 맞닿았다.

꽉,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 붙잡은 손은 서로를 끌어당겼고, 케이든은 그녀의 말 위로 올라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뒤를 돌아볼 수 없는 엘렌이 크게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대답보다는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지게 꽉 안는 것을 택했다.

“믿기지 않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는 현실감 없이 중얼거렸다.

제 늑골이 부서져라 안아오는 케이든의 힘에 혹시 이 사람이 어디 아파서 이렇게 힘을 주는 건가 싶었던 엘렌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질문에 케이든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는 그녀의 귓가 가까이, 지금껏 들어온 것 중 가장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합니다. 그대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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