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조준! 발사!”
탕탕! 탕탕! 탕! 탕!
성문 쪽을 향해 격발된 총성이 귓전을 때렸다.
하늘로는 자욱하게 연기구름이 피어올랐고, 병사들은 다음 사수와 자리를 바꾸기 위해 그 사이를 분주히 움직였다.
일이 터졌던 순간.
마지막으로 군의 정비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모리스는 정체불명의 굉음을 듣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병사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당황하지 마라!
모두 전열을 갖춰라!
그는 지휘체계를 다시 잡기 위해 계속해서 외쳤고, 하나둘씩 모리스의 정체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병사들이 생기며 그의 명령에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다행스럽게도 상황에 대한 구체적 지시를 담은 황태자의 전언이 도착했다.
도착한 그의 명령에서 ‘황태자가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읽어낸 병사들은, 그것을 아직 이곳에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는 너도나도 해보자며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도망치고 싶어 발이 움찔거리던 병사들은 떨리는 손으로 에라 모르겠다며 정면을 보았다.
당혹에 빠져 어쩔 줄 모르던 이들은 훈련받았던 대로 각자의 위치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총병들은 장전과 발사를 반복하며 번갈아 성문을 향해 총을 쏴대었고, 보병들은 그들의 엄호에 힘입어 성문을 닫는데 성공했다.
모두가 원하는 바는 같았다.
무사히 살아 돌아가는 것이다.
* * *
성벽 아래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트리발로스군과 맞닥뜨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조용해졌고, 준비를 끝내놓았다던 오세먼의 호언장담과 달리 빠른 대응을 시작한 이스타지오군 탓에 트리발로스군은 앞줄부터 우수수 흩어지기 시작했다.
뒤로 가! 성문을 열어! 꼬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해!
개소리하지 마! 앞으로 밀고 나가서 쟤네랑 섞여야 총을 더 안 맞을 거 아니야!
앞뒤로 옥신각신해대는 그 모든 소리는 다시금 내리는 탄환의 비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 맞붙고 있는 병사들의 이야기였을 뿐. 쏟아져 들어온 틈을 타 성안 깊숙이 침투한 몇 기사들에게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황태자가 있을 만한 곳이 안 보이는군.”
트리발로스의 총지휘관 드미트리 미하일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요새의 구석구석을 뒤지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후퇴해 처음 약속대로 적당한 압박만 하는 게…….”
“아니.”
미하일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우리는 가서 황태자를 처치한다. 그거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그래야 후환이 없다고.”
그는 천생 무관이었다. 사실 돈이 오간다거나 복잡한 정치 같은 것은 잘 몰랐다.
하지만 마그놀리아와의 전쟁에서, 그는 깨달았다.
나는 전쟁을 잘하는구나.
연전연승의 주인공이 된 그는 자신감이 붙었다. 자신감은 곧 자신에 대한 확신이 되었다.
난 할 수 있어.
“크레센트는 우리에게 약점이 잡혀 있다. 이 나라가 황조를 갈아치울 게 아닌 이상 다른 대안이 없지.”
“크렘벨 공작은…….”
“그가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잖나. 결국 공범이라고.”
드미트리 미하일, 트리발로스의 지휘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스타지오의 원군이 없는 지금, 무조건 죽이는 게 우리에게 이득이야. 그를 찾아. 어서!”
* * *
케이든이 성벽에 도착한 것은 우여곡절 끝에 성문이 다시 걸어 잠긴 직후였다.
“모리스!”
평소 같으면 격식을 지켜 ‘코엔하임 경’이라 불렀을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멀리에서부터 성큼성큼 뛰어온 그가 숨을 고르며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지? 보아하니 성문을 닫는 데는 성공한 것 같은데.”
“예. 다행히 성문은 닫았고, 들은 바로는 바로크와 오세먼이 배신을―”
“됐다. 그건 나도 들었어.”
케이든이 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며 모리스의 말을 잘랐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으려다 멈칫한 그는 제 손을 제자리에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그들은 나중에 발본색원한다. 그보다 당장의 상황은 어떻지?”
“바깥에 남은 트리발로스의 군사가 대략 3천 정도로 보입니다. 들어온 군사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5천 남짓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5천?”
“예. 리넥스를 완전히 비우지는 않았을 테니, 관찰된 함선의 개수를 생각해 예측했던 1만의 군사에서 2할을 빼고 8할 정도로 오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케이든의 얼굴이 정말로 희망을 본 듯 한층 밝아졌다.
“그 정도면 해 볼 만해. 어려웠을 텐데 저들을 잘 갈라 주었군. 그럼 혹시 오세먼이 보냈다던 전서구는…….”
“오지 않았습니다.”
모리스가 침중한 얼굴로 말하자 케이든이 작은 목소리로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겠지. 크레센트 이 빌어먹을 자식.”
그가 뿌득, 이를 갈고는 말했다.
“저들도 식량이 급해 창고를 태우지는 않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그쪽에도 병력을 충분히 보내야겠군. 그건 내가 하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위험한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케이든이 제 이마와 관자놀이께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탈영병만 하더라도 얼만지, 자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그의 말에 모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역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너무 많이 마주쳤다. 아마 그것은 황태자라 하여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마냥 병사들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함께 훈련 한 번 해 본 적 없는 군사들이다. 최근까지 전쟁 중이었던 트리발로스와 달리 이스타지오의 군대는 제각각의 평화 속에서 살아왔고, 그렇기에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서로를 믿기보다 먼저 도망치기 마련이다.
“애석하게도 이 군대는 내가 눈에 보여야만 제 역할을 할 수 있잖나. 그러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모리스가 정말 안 된다는 표정으로 손까지 내밀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에게 원군은 없어. 당연히 보급도 없지. 그러니 혹시라도 병사들이 트리발로스에게 식량을 모두 넘기게 되는 상황만은 피해야 해. 만약 성을 버려야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식량창고를 태울 테니, 창고 쪽에서 불길이 치솟는다면―.”
그가 결연히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던 그때였다.
와아아아―!
바깥에서 들릴 리 없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그곳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 *
케이든은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멀리에서부터 진군해 오고 있는 군사들이 보였다.
행렬 앞쪽의 기수가 들고 있는 화려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제 위용을 드러냈다.
그것을 선두로 뒤로는 또 다른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따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어떤 연합군의 행렬이었다.
그리고 연합군이라면 그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이스타지오의 군사일 것이었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저건 어디의 깃발이지? 보이나?”
거리가 제법 있었던 탓에 명확히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 마찬가지로 건너편을 유심히 보던 모리스가 대답했다.
“크라이언트는 확실하게 알겠군요. 옆으로 체셔도 보입니다. 아발란쉬도 있군요.”
“북부와 서부에서 와 준 건가. 어떻게 여기까지…….”
그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성벽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저 모두 고요히 성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 무수한 병력 사이에서, 케이든은 지금 이것이 현실인가를 다시금 의심하게 만드는 한 사람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제가 방금까지도 그리고 있던 사람.
금은사를 제멋대로 수놓고 이리저리 휘날려대는 그림 따위보다, 훨씬 더 눈에 박혀 들어오는 단 한 사람.
정신을 차린 케이든이 외쳤다.
“다들 총을 들어라!”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주위 병사들의 곁을 지나가며 외쳤다.
“너희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쥐어라! 바깥에 우리의 원군이 왔다! 적들에게 총알 세례를 보여줘라!”
와아아아―!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희망에 물든 함성을 질렀다.
아군 병사의 사기 오른 함성은 아래에서 싸우고 있던 병사들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큼 컸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다른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안 것이다. 이스타지오는 저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음을, 트리발로스는 저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그의 뒤를 쫓아오던 모리스가 그것을 보며 말했다.
“일단 다행입니다. 이제 우리는 최대한 많이 살아남는 방법만을 강구하면 됩니다.”
그리 말하는 모리스의 표정도 제법 밝아져 있었다. 아까까지는 암담함에 굳어 있었는데 드디어 저도 한시름을 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은 케이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으로 땀에 젖은 손바닥을 안으로 꽉 움켜쥐었다.
“좋아. 여긴 그대로 자네가 지휘하지. 이대로 저쪽이 전투를 벌이려는 것 같은데, 조금만 있다가 우리 원군이 승세를 잡으면 열지. 지금 열면 더 혼란스러울 것 같군.”
“전하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난 내려가서 귀인을 맞이해야지.”
그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리스가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대답보다 요동치는 심장만큼이나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향하며 말했다.
“방어를 부탁하지. 그럼 부디 살아남자고!”
* * *
엘렌은 도개교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말의 고삐를 내리쳤다.
철썩!
이랴!
다그닥, 말이 앞서 달려가는 소리에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하고 쳐다보았던 테리어드가 놀라 외쳤다.
“엘렌! 어디 가! 위험하니 돌아와!”
비전투 인원인 엘렌이 앞으로 나서자 식겁한 그가 허둥지둥 외쳤다. 물론 엘렌은 대답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알겠으니 서둘러요!”
그것을 본 테리어드가 “세상에, 쟤가 겁도 없이!” 하고 중얼거리고는 체셔 가의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여기 기사 셋은 내가 데리고 가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대가 체셔의 총책이네. 기본적으로 아발란쉬 후작의 명령을 따르되, 승복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불복해도 좋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권한 위임을 마친 테리어드는 휙 말머리를 돌리며 제 기사들에게 외쳤다.
“바로 출발한다! 최대한 빨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