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봐. 오자마자 이쪽으로 배치가 된 것을 보니 너도 어지간히 눈 밖에 난 모양인데, 어디서 왔냐?”
로에리 요새의 성문과 도개교를 관리하던 병사가 새로 배치된 신참 병사에게 물었다.
신참은 제게 질문을 던진 병사를 흘끗 보고는 그대로 무시했다.
그 작태가 어이가 없었던 병사는 허, 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너 두고 봐라, 내일부터는 제법 재밌는 나날이 될 거다.”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내일을 맞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푹!
횃불의 그림자가 진 어둠 속, 누군가의 수신호에 집중하고 있던 신참은 제가 기다리던 신호가 보이자마자 저와 함께 근무를 서던 병사를 아주 조용히 처리했다.
그리고는 곧장 성문과 도개교를 고정하고 있던 걸쇠들을 풀어버렸다.
드르르륵―
쾅!
제어 없이 풀려 내려간 도개교는 굉음을 내었고, 보초병이 보고하지 않은 트리발로스의 군세는 그것을 기회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와아아아―!
황태자를 죽여라!
황태자의 머리를 가져오는 자에게 작위와 막대한 보상을 수여하겠다는 한마디에, 트리발로스의 병사들은 황태자를 찾기 위해 모두 핏발 선 눈으로 요새에 달려들었다.
이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직감한 흉벽 보초병들은 그대로 도망치거나, 그중 도망쳐도 어차피 살아나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저희들의 상관에게로 적의 침입을 보고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들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달려 나오고 있는 황태자 일행과 마주쳤으며, 평소라면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했을 신분 차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다급히 외쳤다.
“문이 열렸습니다!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크가 배신했다고요!”
“……바로크가 배신했다고? 내부에서 성문이 열렸다는 소리인가?”
“예!”
병사가 그야말로 정말 죽음을 앞둔 이처럼 초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본 것은 바로크뿐인가?”
“예. 하지만 곧장 도망친 것은 오세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는 이제 어떡합니까, 전하!”
내부에서 성문이 열렸다는 소리에 케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크레센트.
그 정신 나간 자식이 외국과 내통해 나라를 팔았다.
하지만 그는 몇 번 힘주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평정심을 찾았다.
자신이 흔들려서는 안 되었다.
지금 이곳에는 소수이긴 하나 이스타지오에 적을 두고 있는 백성들과 자신을 믿고 따라온 군사가 있으니까.
“곧장 병사들을 모아 대응한다. 바로크와 오세먼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 위치에서 맡은 역할을 해내고 있을 거다. 당장 성벽으로 가 이 이상의 병력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그렇게 가둔 인원을 우리가 고지대를 확보하여 집중 사격한다. 인원을 최대한 줄여서 승부를 봐야 해.”
“아……알겠습니다!”
“이대로 당장 가서 명령을 전달해. 그들이 성 내부를 휘젓고 다닐 수 없도록, 우리의 요새에 멋대로 침입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 줘야지 않겠나.”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본 병사는 약간의 기운을 차려서 곧장 바깥의 현장으로 뛰어갔다.
병사가 등을 돌리자마자 케이든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트리발로스의 군세는 얼마나 들어왔을까. 우리가 정면 대결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수일까? 우리가 고지대를 빼앗기거나 중간에 고립되면 안 되는데.
……만약에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바깥을 향하던 그의 발걸음이 더뎌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어.
당신이 제발 무사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 삶이 정말 여기서 끝나게 되는 거라면…… 최소한 당신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그래야만 해.
그는 느려진 자신의 다리를 억지로나마 움직여 혼란 속으로 향했다.
* * *
기본적으로 수비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요새의 성문은 좁았다. 즉, 대군이 빠른 시간 내로 진입을 마칠 수 있을 정도로 넓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이 케이든에게는 천운이자 그가 이곳을 주둔지로 점찍은 이유였다.
갑작스러운 기습 탓에 한 박자 늦은 대응이 되었지만, 케이든의 명령으로 성문이 닫히고 도개교가 올라갈 때쯤에도 트리발로스군은 미처 진입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발사해!”
후드득 화살비가 쏟아졌다. 일제히 시위를 떠난 살들은 성문 근처에 있던 트리발로스군에게로 내리꽂혔고, 물살처럼 밀려들어 오던 트리발로스군의 흐름에 격랑이 일며 병사들 사이로 혼란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 무슨 소리야, 화살이 쏟아지잖아! 당장 나가!
어지럽게 귀를 때리는 비명들은 엉망진창으로 섞여 혼란을 가중시켰고, 성문이 빈틈을 타 이스타지오의 병사들은 성문을 닫으려는 시도를 했다.
도개교의 한중간에 고립되고 만 트리발로스군들은 그대로 해자 아래로 떨어졌으며, 도개교에 발조차 디디지 못한 대부분은 그것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스타지오는 트리발로스군의 허리를 끊어내는데 성공했고, 하나의 요새 안에 갇힌 두 나라의 병력은 서로를 향해 살아남기 위한 창끝을 겨누게 되었다.
* * *
트라이아 공작은 아발란쉬 후작의 감시하에 로에리를 향하는 군대에 섞여 끌려가고 있었다.
전쟁 중에 용맹한 지휘관이 죽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아마도 그가 크레센트를 비롯한 귀족파와 작당을 할 때 써먹었을 이유 때문이었다.
“앗, 뜨……!”
엘렌은 처음과 다르게 아주 빠른 손동작으로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끔찍했던 그날의 꿈을 의심하지 않은 이후로, 여기까지 달려오는 나날 동안 한 번도 이러지 않았던 반지가 다시금 뜨거워졌다.
반지의 기능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고였고, 이것도 무언가에 대한 경고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빨리…… 빨리! 더 빨리 가야 해요!”
끔찍한 결론에 생각이 미친 엘렌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테리어드가 깜짝 놀라 그녀를 의아하게 보았으나, 그녀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는 곧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말했다.
“알겠다! 최대한 속도를 내 볼게!”
테리어드는 어차피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 더 빨리 행군하고, 원래라면 아끼는 게 맞는 식량이지만 더 행군한 만큼 특식으로 보상을 주라는 명령을 내리며 병사들의 진군 속도를 올렸다.
그렇게 로에리 요새를 목전에 둔 곳에 진을 칠 수 있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 한밤중의 새벽.
쾅!
탕! 탕탕! 탕!
누가 들어도 무언가가 무너지고 총격전을 벌이는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진동으로서 전해져 왔다.
땡! 땡! 땡! 땡!
보초들이 울리는 비상종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고, 진지를 구축하고 쉬고 있던 병사들은 모두 다급히 일어나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출발한 군사의 앞으로 로에리 요새가 보일 때쯤.
어느새 행렬의 맨 앞까지 나와 있던 엘렌은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요새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저 앞까지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여기저기 진 치고 있는 새카만 인영들과 내부에서 온통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요새였다.
“……안 돼.”
엘렌의 눈앞에 잔상이 스쳤다.
가슴을 커다란 칼날에 꿰뚫려 죽는 남자.
그 살짝 거친 듯한 입술을 적시고 그녀를 단단히 감싸주었던 가슴 위로 토해지는 온통 붉고, 붉고, 붉은 것.
안 돼.
“테드. 다른 분들께도 부디 전달해줘요. 지금 바로 저들의 뒤를 쳐서 도개교를 내리고 요새 안으로 진입해야 해요. 당장이요!”
* * *
멀찍이서 접근해오는 군대를 인식한 트리발로스군은 난리가 났다.
이미 눈앞의 성은 문이 닫혔고, 남겨진 이들 사이에는 그들을 이끌 높은 결정권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낯선 곳에 내팽개쳐진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트리발로스군은, 그나마 개중 판단이 빠른 백인장 등이 어떻게든 상황에 대응하려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당황하지 마! 뒤를 봐라!
어차피 우리에겐 퇴로가 없다!
죽기 살기로 맞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필사적인 외침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병사들 사이에는 통제보다 공포의 물결이 훨씬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모를 테리어드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기사 교육을 마친 아발란쉬나 엘시어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논의했던 대로 트리발로스군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각자의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시작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그러면 죽이지는 않겠다!”
테리어드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발란쉬와 테리어드, 엘시어의 지휘 아래 이스타지오군은 삼면에서 트리발로스의 잔병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트라이아군에 섞여 있는 내통자들은 계속해서 상황을 살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에게 보상을 안겨 줄 트라이아 공작은 현재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이 전투의 향방은 아직 이렇다 확신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반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
무엇보다 지금처럼 확실하게 지휘체계가 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내통자 한 부대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트리발로스에게 승기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잘해봤자 잠시간의 혼란이나 일으킬까.
그렇다면 결국 저 성문을 열어 황태자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확실해지는 문제가 되는데, 그러려면 결국 지금의 전투에서는 이들에게 협조를 해야 한다.
그런 필사적인 계산 아래 전투는 순조로이 흘러갔다.
예상치 못하게,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맞닥뜨리게 된 트리발로스의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이 패닉 상태에서 휘두르는 창은 그다지 날카롭지 못했고, 무엇보다 기마병을 앞세워 온 이스타지오군을 꼬리가 잘려 남겨진 보병들이 상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용기 있게 맞선 자는 가장 먼저 꿰뚫리는 희생양이 되었으며, 필사의 저항을 하다 말발굽에 제 형체를 잃고 마는 이들도 생겼다.
그것을 본 트리발로스의 병사들은 너도나도 재빨리 무기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투항이라니, 성안에 있는 지휘관이 살아나온다면 분명 사형당할 죄였다.
그러나 트리발로스의 병사들 사이에는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죽으리라는 공포가 퍼지는 것이 더욱 빨랐다.
오합지졸이 된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엘렌은 계속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발 아무나 확인해 줘. 우리가 왔어.
제발.
이 성문을 열고 내가 그의 무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줘.
그리고 그런 그녀의 염원을 누군가가 들은 것일까.
거짓말처럼 성문이 열리며 도개교가 내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