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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6화 (106/128)

<106화>

템트항 하역장을 통해 수도 밖으로 도망친 엘렌은 황녀의 기사 셰일과 함께 그대로 마이어스령을 향했다.

마이어스군이 아직 영지에 묶여 있으리라 생각했던 엘렌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여러 가문의 연합으로 오는 북부군과 달리, 동부는 당장 가장 큰 중심축이 돼야 했을 크렘벨이 공석인 시점이었다.

때문에 마이어스 주변에 남은 것은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소규모 영지들뿐이었고, 그 말인즉 그들은 실상 홀로 움직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백작이 수도의 변을 듣고도 섣불리 진군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물론 딸인 모니카 마이어스 영애가 아직 수도에 남아 있었다는 것도 있다.

어쨌든 그렇기에 북부군의 소식과 함께 모니카 마이어스의 무사 생존 소식을 들고 왔던 엘렌은 크게 환대를 받았다.

마이어스 백작은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고는 망설임 없이 출정에 나섰고, 그들과 함께 길을 나선 엘렌은 며칠 뒤 엘시어의 인도로 리넥스를 향하던 북부군과 마주칠 수 있었다.

“엘렌!”

엘렌을 발견한 그녀의 부친 다니엘 크라이언트가 목멘 소리로 제 딸의 이름을 외치며 말을 몰았다.

허겁지겁 달려온 그는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마자 뛰어내리다시피 말에서 내렸고, 그 뒤를 엘시어가 쫓아왔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수도에서의 반란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된 가족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정신없는 눈길로 딸의 무사를 확인하던 크라이언트 백작은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았다. 다니엘은 제 딸을 다시 꼭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아니에요. 아버지께서야말로 고생 많으셨죠.”

“엘렌!”

케이든의 명령으로 북부군과 합류해 있던 체셔 경 테리어드가 뒤쪽에서 말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 역시도 다니엘과 크게 다르지 않게 엘렌이 지척에 보이자 서둘러 말을 재촉해 달려왔고, 훌쩍 말에서 뛰어내린 테리어드는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무사한 그녀의 모습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던 그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밝게 말했다.

“역시. 너는 무사히 나올 줄 알았다. 고생 많았어.”

그가 가벼운 손길로 어깨를 툭툭 치자, 마찬가지로 반가움과 안도가 밀려왔던 엘렌은 환히 웃으며 그에게 장난을 쳤다.

“정말? 헐레벌떡 달려오는 눈치를 보니까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테드.”

그녀의 샐쭉한 미소에 테리어드의 낯이 비로소 조금 피었다. 그가 픽 웃고는 손을 내밀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곱게 정돈해 주었다.

“맞아. 사실 엘시어와 따로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많이 걱정했지. 하지만 지금 보니 역시 괜한 걱정이었어.”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그들은 서로 뱉어 놓고도 마냥 웃긴지 또 한 차례 마주 웃었다. 먼저 웃음기가 가라앉은 엘렌이 케이든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전하의 상황은 어떤가요? 테드도 최근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가서 보았으니 대강이라도 알 것 아니에요.”

그녀가 뱉은 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하고, 동시에 껄끄럽게 여길 만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현재의 상태가 좋을 리는 없다. 그러니 나쁜 소식만 전해야 하는데, 그것은 굳이 꺼내봤자 사기에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굳이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은, 따로 당부하지는 않았지만 이 대답을 피하지 말아 달라는 그녀 나름의 신호였다.

무엇이든 아는 대로 뱉어라.

그녀의 물음에 테리어드가 조금 난처한 낯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 그건…….”

사실대로 다 말해줘야 하나?

지금 전하께서는 꽤 위험하셔. 그러잖아도 그리 넉넉지는 않은 군사를 나와 절반으로 나누셨지. 심지어 예상과 달리 리넥스를 점령당했을 가능성이 높아져서 육상 충돌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어.

하지만 그는 미세하게 떨리는 엘렌의 손을 보았다.

테리어드는 결국 자연스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시잖니. 우리가 제때 가서 도와드릴 수 있다면 충분히 잘 해내실 거란다.”

그가 엘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멀찍이서 각 군사의 우두머리 격인 크라이언트 백작과 마이어스 백작은―에덴버령은 아직 군사가 많지 않아 엘렌이 기꺼이 주도권을 제 부친에게 양도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이 잠시간의 휴식 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후를 나누는 젊은 아이들을 보던 마이어스 백작이 제 딸이 생각났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애꿎은 하늘을 바라보자, 그것을 보던 크라이언트 백작이 외쳤다.

“갑시다! 가서 태자 전하를 무사히 모시고, 다시 모든 것을 되찾는 겁니다!”

그 외침에 걱정했던 이들과의 재회로 잠시나마 떠들썩했던 이들의 시선이 준비 중인 군사들을 향했다. 그 시선 끝에는 마이어스 백작의 붉어진 눈시울이 담겼고, 그들은 저희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하나둘씩 말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엘시어까지 말 위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크라이언트 백작 다니엘이 외쳤다.

“출발한다!”

그의 외침과 함께 두 무리의 군사는 리넥스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 * *

고요하고 작은 마을 베솝.

리넥스 서쪽 길목에 위치한 이 마을은 북쪽 로에리와 동쪽 리넥스의 분기점이 되는 곳으로, 그런 지리적 이유 탓에 일전 케이든의 부대가 머무르다 갔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오늘. 이 마을에는 또 유례없이 많은 인원수의 군사들이 들어와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 작은 마을이 미처 수용할 수 없는 인원들이 한 번, 그리고 마을에 진지를 두기가 어려워 바깥 공터에 진을 친 두 번째 부대까지 두 번이 말이다.

“아니, 트라이아 공!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만납니까, 우리가?”

저편에 보이는 군대를 향해 크라이언트 백작 다니엘이 능청스레 다가가 인사했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친 트라이아 공작은 미미하게 드러난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삐뚜름한 웃음으로 그의 인사를 받아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런 그의 뒤에서 걸어 나온 인물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크라이언트 백. 어떻게 북부군이 벌써 여기까지 와 있군요. 든든합니다.”

인사를 건넨 것은 아발란쉬 백작으로, 그는 제 편이 되어줄 이들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드디어 무언가가 바뀌리란 기대감으로 찬 눈을 하고 있었다.

트라이아 공작이 엘렌과 다니엘, 그리고 테리어드와 마이어스 백작을 스윽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는 어쩐 일로 모두들 집결해 계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트레버를 지나쳐버린 배들을 쫓아 리넥스 근처까지 오게 되었던 서부의 트라이아-아발란쉬 군은, 비록 서로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어쨌든 본인들이 북부군과 동부군을 동시에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하고 있었다.

다만 엘렌은 천연덕스레 저런 말이나 지껄이는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욱 환히 웃으며 말했다.

“오면서 별 소식은 없으셨던 모양입니다.”

분명 수도에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저렇게 모르는 척을 한단 말이지.

엘렌이 뼈있는 한마디를 던지자 트라이아 공작이 잠시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는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히 표정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별 소식이라기보다―”

“아, 에덴버 후작도 소식을 들은 모양입니다. 수도가 지금…….”

다만 그가 말을 끝맺기 전 대놓고 끼어든 이가 있었는데, 바로 아발란쉬 후작이었다.

아직 정정했던 그는 직접 제 군사를 통솔하여 출정을 나갔고, 서부령의 주인이었던 그는 남서부 예상 상륙 지점 중 가장 가까운 트레버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트라이아 또한 트레버로 출진하게 되며, 실질적인 주도권을 더 상위 계급에 위치한 트라이아 공에게 빼앗긴 그는 수도의 상황 보고를 듣고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었다.

그로서도 힘으로 엎고 회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리고 온 군사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 명확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로 어깃장을 놓는 것은 외려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렇다 할 묘책 없이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예. 얼마 전 2황자 전하께서 수도를 책임지심과 동시에 봉쇄령이 내려졌었지요.”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발란쉬 후작이 흐린 뒷말을 받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트라이아 공작에게 미치자, 아발란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시선도 모두 트라이아 공에게 쏠리면서 공작은 급속도로 굳은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에덴버 후작?”

엘렌은 그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얼굴 전체에 열이 오르고, 유독 더운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음. 근육은 계속 긴장 상태. 목소리도 한층 올라감.

그녀는 확신했다.

지금 공작은 진심으로 놀랐다.

“왜 사람 얼굴을 계속 그렇게 봅니까? 그런 행동이 예법에 맞지 않다는 건 다 배웠을 나이 아닙니까.”

“예법에 어긋나는 건 저희가 아니라 공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트라이아 공?”

엘렌은 그가 싫어할 법한 짧은 어미에 추궁조로 말을 마무리했다.

지금 자신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건 공작을 비롯한 귀족파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그들에게 아주 불리한 방향으로.

발끈한 트라이아 공작이 조금 커진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라고?”

“뭐, 아니시라면 하는 수 없고. 그런데 이제 태도를 확실히 할 때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엘렌이 반쯤 반말을 섞어가며, 화사한 미소와 함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공작의 군사까지만 제어 하에 두면 충분히 이긴다. 그리고 지금 확실하게 공작을 누를 수 있는 수단은 뻔했다.

그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군사다.

“북부군과 동부군, 그리고 서부군의 절반. 이 모든 이들을 트라이아의 군사 하나만으로 상대하여 살아 나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우리 모두 황제 폐하 앞에 무릎을 함께 꿇은 동료들이지 않소!”

“맞습니다. 그렇기에 이리하는 것이지요.”

말을 더듬는 트라이아 공작이라니 꽤나 진귀한 볼거리였다. 하지만 물러서 줄 생각이 없었던 엘렌은 손짓으로 그의 목에 창을 드리울 것을 명령하며 말했다.

“이 창, 내 손이 아래로 떨어지는 신호 한 번이면 당신의 목도 함께 아래로 떨어질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서 크레센트의 치부를 꺼내 들고는 말했다.

“결정하세요. 얌전히 포박당해 나의 명령에 따를 건지, 그게 아니라면 여기 이 자리에서 목을 날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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