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쾅!
불빛에 비친 시궁쥐들이 그늘을 찾아 도망치듯, 갑작스레 습격을 받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여기도 아니군.”
길리언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돌아서 나갔다.
수도를 헤집고 다니며 엘렌을 찾던 그는 현재 어떠한 가능성을 두고 반신반의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과연 엘렌의 실종이 자의적 탈출인가, 그게 아니면 타의적 납치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정황상 타의에 의한 납치가 중론이었고,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째서인지 계속 이것이 그녀의 계획 아래 이루어진 자의적 탈출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 구역으로 간다. 이동해!”
그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다시 곁에 둔 너인데. 이제 와서 네가 도망치게 두지 않아.
나를 무너뜨릴 방법을 알고 있는 이상 넌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고, 그때가 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너를 곁에 둘 거다.
만일 그것마저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아무도 널 갖지 못하게 할 뿐이지.”
세상은 넓고, 시간은 충분하니.
* * *
“늦은 것 같습니다.”
리넥스로 향하는 여정.
진입 전 정찰조를 보내고 대기 중이던 케이든에게 그들의 보고를 듣고 온 모리스가 말을 전했다.
리넥스 곳곳에 전투의 흔적이 보이며, 휘날리는 깃발은 이스타지오의 것이 아니라고.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역시나라니.”
케이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물었다.
“오세먼은? 어디로 갔다던가?”
“성을 빠져나가 서북쪽 길로 빠진 듯하다고 합니다. 저희는 이대로 북진하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말은?”
“바깥에는 큰 전투의 흔적이 없다고 합니다. 후퇴하는 오세먼군을 트리발로스가 추격을 하지 않은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그래? 가까운 곳에 원군이 있을 것을 예상했던 모양이지.”
케이든이 낮게 중얼거리고는 지도가 펼쳐진 책상을 향했다.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
그는 지도 위로 대강 오세먼군이 자리 잡고 있을 법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 로에리. 나라면 이곳으로 빠졌을 거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사실 서북쪽에서 갈 만한 곳은 여기뿐이지요.”
“그러면 그곳으로 가 재정비, 사방에서 압박하는 형태로 수비 진형을 펼치지.”
“알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로에리로 진군하라 명할까요?”
모리스의 물음에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니 말이야.”
그의 결정을 들은 모리스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두어 걸음 물러서 밖을 향했다.
그런데 그대로 나가려던 모리스를, 케이든이 갑자기 불러 세웠다.
“잠시만. 잠시만, 코엔하임 경.”
케이든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그를 부르자, 밖으로 나가려던 모리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케이든이 팔짱 낀 손가락을 탁탁 튕기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이야. 우리가 그대로 진군했다가 역포위를 당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역포위…… 말씀이십니까?”
얼떨떨하게 반문한 모리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일단 최근 문제가 있었던 영지는 아니니 기본인 3개월 치만큼은 축적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인원수를 고려했을 때 약 한 달 정도일까요.”
“한 달…… 한 달이라.”
케이든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갑작스레 미친 생각이 영 거슬렸던 모양인지 그가 고심하며 지도를 보자, 그를 보고 있던 모리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소 제한을 받는 그들과 달리 우리는 계속해서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후방을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섣불리 그런 작전은 쓰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가 옆에 놓인 통에서 붉은 돌과 흰 돌을 한 움큼 집어, 탁, 탁, 탁 번갈아 두며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상식적이지 않던 놈들이라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단 말이지.”
모리스는 케이든이 분류해 놓은 붉은 돌과 흰 돌을 훑어보았다.
붉은 돌은 리넥스를 점령한 트리발로스의 영향권, 흰 돌은 아마도 로에리에 진을 치고 있을 오세먼군의 영향권.
“정 그러시다면 일단 오세먼을 미끼로 두고 근처에서 움직임을 살피는 게 어떠하신지요. 여기 치노 정도면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모리스가 흰 돌이 놓인 땅 중 한 군데를 짚으며 조심스레 제안을 꺼냈다.
그러나 그가 짚은 곳이 마뜩잖았는지 케이든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말했다.
“애매한데. 각개격파를 당할 수도 있잖아.”
“하지만 적당한 장소가 없습니다.”
그러자 케이든은 두 팔을 책상에 짚고는 한숨을 쉬었다.
결정이 쉽지 않은지 한동안 리넥스와 로에리를 번갈아 보던 그는, 어차피 치느냐 당하느냐 둘 중에 하나지, 라며 나직이 한 마디를 뱉어내고는 말했다.
“……만일 늦더라도 한 달이면 충분히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 일단 로에리로 가는 것으로 하지.”
“예. 알겠습니다.”
모리스의 대답을 끝으로 그들의 행로가 결정되었다.
* * *
시간이 지나, 리넥스의 서북쪽 요새 로에리.
오세먼군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틀어 온 황태자의 군대가 도착했다.
오세먼가의 장자, 리암 오세먼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후다닥 달려 내려오며 외쳤다.
“전하! 와 주실 줄 알았습니다!”
평소였다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을 황태자의 실루엣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를 구원하러 온 기사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정말이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황태자를 친다며. 그래서 들어오는 트리발로스군이라며! 그런데 어째서 그 대척점에는 내가 서 있는 건데!
그는 마치 울부짖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밀려들어 오는 트리발로스의 군세를 직접 두 눈으로 목도했을 때는 특히 더 말이다.
그때는 정말 오줌을 지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짜고 치는 판이라지만 그것은 우두머리들이나 알고 있을 뿐, 모든 말단들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 탓에 소극적으로나마 양군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부딪치게 되니 ‘혹시라도 트리발로스가 마음을 바꿔먹고 이대로 이스타지오를 친다고 하면 어떡하지.’ 라든가, ‘어쩌면 내가 저희에게 협력하는 자인 줄도 모르고 나까지 죽여 버리면 어떡하지.’와 같은, 그로서는 생명과 직결된 걱정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황태자를 본 그는 이제 이 살 떨리는 대치도 끝이라며 기뻐할 수밖에 없었고, 케이든은 생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던 자가 갑자기 이러니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
케이든은 말 위에서 내리지 않은 채 리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리넥스의 일은 유감이네. 그대도 분투해 주었을 텐데 아쉽게 됐군.”
“아닙니다. 전하께서 와 주셨으니 금방 수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케이든이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다 해 달라, 이 말이지?
“일단 들어가지. 이곳으로 원군 요청은 해 둔 상태인가?”
“예. 수도로 전서구는 날려 놓은 상태입니다만 답신은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리암은 이곳으로 올 원군 따위는 없음을 알았지만 능청스레 말했다. 어쨌든 날려 놓은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군. 그럼 요새의 상태부터 확인해야겠어. 가지.”
케이든은 상대가 체셔였다면 뒤통수를 한 대쯤은 후렸으리라 생각하며, 함께 온 병사들에게 쉴 곳을 안내하라 명령하고는 자신은 곧장 성으로 말을 몰아 들어갔다.
정말 다행히도, 로에리 요새는 괜히 요새라 이름 붙은 곳이 아니었다.
견고하게 짜인 문과 충분히 단단한 석벽, 그 사이로 나 있는 포대, 궁병의 활약을 용이하게 해줄 화살 구멍과 침입을 막는 해자, 그 위로 내리는 도개교까지.
수성에 특화된 요새의 정석으로 지어진 이곳은 제법 마음 한구석을 든든하게 해 주는 부분이 있었다.
시설을 모두 확인한 케이든은 그대로 지휘관들이 모여 있는 회의실을 향했다.
그곳에서 의논한 바는 이러했다.
일단 가장 먼저 새로 들어온 병력과 기존 병력의 지휘에 관한 문제.
다행히 그에 관해서는 크게 바꾸는 것 없이 지금처럼 방위별로 흩어져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로 정리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어떻게 트리발로스를 공략할 것인가’에 관한 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 케이든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생각해 왔던 전방위 포위 수비를 제시했고, 딱히 묘안이랄 게 없었던 나머지 인원들은 그저 그가 하는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주된 골자는 케이든이 가져온 의견대로 처리가 되었다.
중앙은 흉갑기병으로 돌파력을 갖출 것. 혹 일방위 전면전으로 흐름이 바뀌게 된다면 그때는 쐐기모양으로 중앙을 가른 뒤 양쪽을 각개격파할 것.
그렇게 회의를 마무리하고, 빠른 진군을 위해 야간 경비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가 잠든 깊은 새벽.
쾅!
이유를 알 수 없는 굉음이 지축을 울렸다.
* * *
바로크 후작의 명령으로 바로크군에 숨어 있던 이들은, 로에리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리암 오세먼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리암 오세먼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리암 또한 그들과의 접촉을 의식하여 만나기 편한 곳을 계속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에 그들은 입성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었고, 그렇게 리암 오세먼의 비호하에 흉벽 보도에서 보초를 서게 된 바로크 병들은 트리발로스에게 정해진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서 약속되어 있던 신호가 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가다듬고는 곧 평범한 보초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저녁이 지나 다가온 새벽.
반나절 넘는 시간 동안 진군해 온 트리발로스 군은 다시 신호를 보냈고, 그들의 접근을 확인한 바로크의 병사들은 곧장 제게 주어진 일을 수행했다.
드르르륵―
쇠사슬이 정신없이 풀리는 소리가 나며, 곧 원인을 알 수 없는 굉음이 울렸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