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브리스타 자작은 제게 미안하다 말하는 이클립스를 물끄러미 보았다.
누구에게라도 들었으면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당사자들이 쏙 빠진 지금의 이 사과는, 서로에 대한 연민만 남길 뿐 진정한 반성과 용서가 될 수는 없었다.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클립스가 말을 이었다.
“차마 사죄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다만 나는 나라를 두고 장난질을 친 내 오라비를 처단할 생각이며, 그 끝에 황녀로서의 내가 사라지더라도 달게 감내할 생각이니…… 만약 그대가 원하는 복수에, 내가…….”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입술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이클립스는 흡, 숨을 몰아쉬고는 뒷말을 이어 뱉었다.
“내가 죽지 않는 미래가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부디 같이 오라버니와 바로크를 무너뜨려요.”
그런 그녀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브리스타 자작이 그녀에게 다가가 감히 손은 대지 못하고 말했다.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전하.”
하지만 이클립스는 입술만 깨물 뿐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전하. 부디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그가 재차 말했다.
옆에서 보던 엘렌이 이클립스의 등 위로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 가벼운 무게를 느낀 이클립스는, 잠시 망설이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브리스타 자작과 이클립스가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작이 슬픔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감히 전하의 목숨을 두고 왈가왈부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자작.”
깊이 패여 빛이 들지 않는 그의 눈에 언뜻 물기가 어린 듯도 했다.
“지난 세월…… 제 분노는 명확한 형태도 없이 그저 켜켜이 쌓여만 갔습니다. 모두가 저만큼 고통받길 바랐지요.”
그의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알겠습니다. 전하의 사과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보고자 했던 것은 결국 당사자들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
“전하께서는 그리 말씀해 주신 것으로, 제 딸아이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미안하고…… 고마워요.”
이클립스가 자작에게 다가가 그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아닙니다. 이제는 앞으로의 일을 나누지요. 이렇게 가택 내에 감금당해 있다던 후작과 함께 오실 정도면, 무언가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실 듯하니 말입니다.”
* * *
브리스타 자작은 엘렌의 설명과 그녀가 보이는 증거물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사실 에덴버 후작 각하께서 이곳에 계신 것을 보고 이미 결정을 마친 뒤이기는 했습니다만…….”
큰 결정을 끝낸 그는 한번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협조하지요. 제 군대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일단 두 분의 탈출이 시급한 듯한데, 당장의 계획은 있으십니까?”
브리스타 자작의 물음에 엘렌은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탈출 루트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작께서 다른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면 경청하지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저희 가문의 마차로 나가시는 게지요.”
브리스타 자작이 조금 민망한 듯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브리스타는 외부 출입이 가능한가요?”
이클립스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며 자작을 향했다. 그러자 그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초반과 달리 지금은 주요 귀족들의 신병이 모두 구속된 상태지 않습니까. 조금 까다롭긴 하지만 신분만 확실하면 나가는 게 무리는 아니지요.”
“아, 그렇다면…….”
“예. 제가 직접 동행해 신원 증명을 마치면 됩니다. 아마 저는 별다른 활동 자체가 없던 사람이니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그의 도움으로 다른 루트를 확보하면 그만큼 안전성이 올라갔다.
엘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엘시어를 부탁드립니다. 탈출 루트가 나뉘는 게 한 팀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던 엘시어가 엘렌에게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럼…….”
“그래. 너는 자작과 함께 빠져나가, 곧장 북부로 향하면 된단다.”
엘렌은 제 남동생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이렇게 엘시어를 맡겨두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스타는 가망이 없다 판단하여 협력을 하지 않을지언정, 크레센트에게 적극적으로 아부를 한다며 저희를 팔아넘길 이도 아니었다.
그런 노선을 탈 것이었다면 그는 그간 영지에 처박혀 살 것이 아니라 진즉 지금처럼 수도로 올라와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모두…… 건투를 빌지요.”
이제 모두가 각자의 길을 떠날 시간이었다.
* * *
“이클립스!”
현재 수도 안에서 가장 지고한 신분을 가진 두 남자는, 저희의 체통도 생각하지 못한 채 긴 열주랑을 달려갔다.
황녀가 습격당했다는 보고를 듣게 된 크레센트와 길리언은, 낭패감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황녀궁의 문을 열었다.
탕!
“이클립스, 괜찮으냐!”
“오라버니…….”
그녀는 옷의 여기저기가 상한 채로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었다.
“어찌, 어찌 된 일이지? 너와 함께 갔던 기사들은!”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서…….”
그녀는 제 양팔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덴버 후작과 크라이언트 영식은!”
“나, 나는…….”
그녀가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답답함에 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죄송합니다. 돌아온 것은 저뿐입니다.”
“뭐?”
길리언의 반문에 기사가 상세한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돌아오던 중 습격을 당했고, 상대의 인원이 더 많아 호위와 전투를 동시 수행할 수가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이 죽어 전력의 열세가 뚜렷해지자마자 자신은 황녀를 이끌고 도주, 나머지는 전투를 속행하였으나 이후의 일은 자신도 알 수 없다.
일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크레센트가 분을 이기지 못해 제 옆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찼다.
쾅!
그때 바깥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기사 한 명이 외쳤다.
“전투의 흔적과 함께 세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나머지 인원의 시체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인원의 시체?”
병사에게 되묻는 길리언의 목소리가 싸늘하자, 그의 심기가 심상치 않음을 포착한 황녀의 기사가 얼른 덧붙였다.
“언뜻 후작을 생포하란 지시를 들은 바 있습니다. 아직 속단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생포. 생포라.”
그의 임기응변에도 찌푸려진 길리언의 표정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녀의 기사는 혹시나 제 거짓말이 들킬까 긴장한 채 그의 표정을 연신 훔쳐보았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크레센트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그래.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는 무턱대고 다 죽이는 것보다는 정보를 캐거나 협상으로 밀고 나갈 인질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좋겠지.”
그는 씩씩거리며 이클립스에게 다가갔다.
축 처져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치운 크레센트는,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훑어본 후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오라버니……?”
그는 크게 몸이 상한 곳은 없는지 확인까지 끝마치고는, 곧 탁탁 손을 턴 뒤 말했다.
“다행히 이클립스에게는 문제가 없군. 가장 중요한 것은 살려 왔으니 됐다.”
그의 말에 이클립스는 제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난 결국 끝까지 물건 취급인 거지.
무릎을 안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하.”
“구심점이 될 만한 이들은 모조리 내 수중에 있는데도 그런 조직이 생겼다니, 아주 지긋지긋하군.”
길리언의 물음에 크레센트가 짜증 가득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것들을 다 잡아들여!”
“예.”
기사들이 고개 숙여 대답했다.
길리언 또한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고는,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수도를 봉쇄하고, 그것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색한다.”
마찬가지로 명령을 그는 홱 돌아서 황녀궁의 문을 나섰다.
엘렌.
네 자의든 타의든, 난 널 놓치지 않아.
* * *
그렇게 봉쇄령이 떨어지기 약 두 시간 전.
엘렌은 엘시어를 브리스타에게 맡긴 뒤, 자신은 이클립스 황녀의 기사와 함께 템트항으로 숨어들었다.
“……지금. 가시죠.”
주변을 살피던 황녀의 기사 셰일이 수신호와 함께 조용히 말했다.
템트항은 비교적 크레센트의 감시가 덜한 곳이다.
이곳은 군이 오가는 방향과도 상관없고, 심지어 여객보다는 화물이 주인 곳이라 상대적으로 감시 인력이 적다.
게다가 이곳에는 이전에 포섭해 두었던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오, 제기랄.”
템트항에서 근무하는 운항과 직원, 단델리온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화려한 이력 탓에 강제로 감상하게 된 초상화들을 제외한다면, 그가 이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을 마주하게 된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떠올렸던 탓이다.
물론 아주 높은 확률로, 이런 이례적인 만남은 그만한 리스크를 가지고 온다는 것까지도.
사정없이 떨리는 동공이 그의 당혹스러움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에덴버 후작 각하시군요. 저택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신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여기까지는 어쩌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엘렌 에덴버입니다.”
엘렌이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하자, 그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흔들며 말했다.
“불안하니 용건이 있으시다면 그냥 빨리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곤란하다 못해 울상처럼 보이는 낯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최대한 안전하고 빠르게 해치우고 싶습니다. 어차피 저는 말씀하시는 게 무엇이든 일단 해야 하잖습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악수하고 있는 손을 내팽개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본 돈맛은 환상적이었다.
여동생은 크라이언트의 이름을 뒤에 업고 쾌적한 아카데미 생활을 했다.
부모님은 도시의 큰 집에서 머무르며, 꼬박꼬박 병원 진료까지 다니면서 건강하고 활력 있는 노후를 보내고 계셨다.
자신은 또 어떠한가.
의식주에서부터 여가까지, 하나씩 바꾼다는 것이 어느새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하층민으로 태어나 어찌어찌 저 하나가지고 입에 풀칠은 할지언정, 어차피 큰 병이라도 오면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았던 삶이었다.
이런 도박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는 시대. 이런 기회나마 찾아왔음에 감사해야지.
그런 그의 태도에 엘렌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화물 상자에 숨겨서 수도 밖으로 빼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