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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3화 (103/128)

<103화>

마차는 물론 복장까지 완전히 달리 입은 엘렌 일행은 그대로 마이어스 저택을 향했다.

엘시어와 약혼한 마이어스는 수도 동부에 영지를 가진 귀족으로, 그들은 이번 남서부 출정에서는 그 거리가 먼 탓에 2차 원군으로 편성되었었다.

게다가 가주인 그레이 마이어스는 아발란쉬 후작과 아카데미 동기이며, 젊을 적엔 황실의 기사로 있었던 이력의 소유자.

지금 엘렌이 해야 할 일은 그런 이들을 찾아다니며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모두 무사해서 무엇보다 다행이에요.”

수도에 홀로 남아 있던 모니카 마이어스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엘렌은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혼자 남아 있었군요. 무서웠을 텐데 잘 버텨냈어요.”

“아니에요. 저야 이곳에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을요.”

모니카 마이어스는 처음에는 동석한 황녀를 보고 난색을 표했으나, 엘렌의 괜찮다는 한 마디에 금세 경계를 풀고는 엘렌의 질문에 술술 답을 뱉어내었다.

“마이어스 백작 부부께서는 영지로 가셨나요?”

“네. 2차 원군으로 보낼 병력을 편성하셔야 했으니까요. 저희는 아직 아버지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셨었거든요.”

백작의 부재를 알리는 말에 엘렌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낯을 살피던 마이어스 영애가 말했다.

“아버지의 결정이 필요한 일이 있으신 거군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니까요.”

엘렌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방향을 택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만 운을 띄운 것으로도 충분했는지, 마이어스 영애가 입을 열었다.

“힘이라. 그렇다면 브리스타 가를 한 번 찾아가 보세요.”

“브리스타?”

엘렌의 반문에 모니카 마이어스가 그들의 옆에 앉아 있는 황녀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이클립스가 갸우뚱하는 눈치이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네. 그들은 바로크의 핏줄이 권력을 잡은 이 상황이 꽤나 불편할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엘렌은 비로소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트레샤 바로크, 오클라니 바로크의 작고한 부인.

그녀의 혼전 이름은 트레샤 브리스타였다.

* * *

브리스타.

전통 있는 기사 가문이지만, 요즘처럼 돈이 새로운 계층을 만드는 세상에서는 한물갔다는 소리를 듣고는 하는 이들이었다.

한 떨기 꽃처럼 아름다운 트레샤 브리스타.

부인과 사별한 뒤 어린 아들까지 먼저 떠나보낸 브리스타 자작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자 유일한 사랑.

그러나 그녀는 이젠 세상에 없는 이가 되고 말았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간 딸의 장례식.

그의 딸은 꽃들로 가득 채워진 관 속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이곳저곳에는 화장으로도 채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피어 있었다.

그것을 본 브리스타 자작은 우짖듯 슬피 소리를 내질렀다.

네가 왜.

네가 어쩌다.

한참을 주저앉아 울던 그는, 너무 울어 그 이상 눈물도 나지 않을 때쯤 목표를 하나 세웠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저들의 후계 또한 끊어놓고 말리라.

바로크의 핏줄이 황자를 낳은 이상 지금의 그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후일을 도모해야 했다.

그는 언젠가 찾아올 그날만을 기다리며 그저 조용히 세월을 견뎠다.

견제를 받을 만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한물간 늙은이라는 소리를 덤덤히 받아 넘기며, 누구도 모르게 바로크의 핏줄들을 죽일 암살자와 병력을 키우면서.

그렇게 때를 기다리던 그의 귀에 점점 황위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직감했다.

일이 터지는 건 곧이다. 순식간이다. 조만간 이 염원을 이룰 날이 올 것이다.

그 시류에 올라타기 위해 그가 수도로 상경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크레센트 이스타지오가 황궁을 점령했다.

* * *

“난…… 난 몰랐어요.”

이클립스 이스타지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트레샤 바로크의 사망은 그녀가 황궁 밖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이 괜한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을 테고, 진실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클라우디스 역시 자신의 치부로밖에 취급받지 못할 일을 굳이 꺼내진 않았을 테니 그녀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이클립스에게 마이어스 영애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사실이랍니다. 전하. 작고한 바로크 부인은 남편이었던 오클라니 바로크에게 살해당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 사실을 그대는 어떻게 알았나요?”

“어머니께서 바로크 부인과 사촌지간으로, 서로 잘 아시는 사이셨으니까요. 바로크 부인은 제 외종숙 되시는 분이었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이클립스는 저 이야기의 진위와 관계없이, 브리스타 자작의 진실은 저것일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클립스는 제 당혹스러움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말했다.

“브리스타가 정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문이라면 놓쳐서는 안 돼요. 하지만 자작이 과연 내 존재를 용납해 줄지…….”

그녀의 말에 엘렌도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말했다.

“일단 가 봐야죠. 협상은 하기 나름이니까.”

일이 한 번에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애매한 벽들을 자꾸 만나자 엘렌 또한 초조함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어려움은 언제나,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

나는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말을 얻고 말리라.

그녀는 온몸을 타고 오르는 긴장감을 움켜쥔 주먹 안에 가두었다.

* * *

브리스타 자작은 바로크 후작만큼이나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그는 바로크 후작과 달리 아직도 사냥 등의 야외 활동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남들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기에 대다수의 귀족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는 만에 하나라도 주어지게 될지도 모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감이 떨어지지 않도록 언제나 자신을 갈고닦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처음 마주하게 된 브리스타 자작은 나이에 맞지 않게 좋은 풍채로 엘렌을 내려다보는 사람이었다.

“황녀 전하와 후작 각하라니. 이 늙은이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언뜻 보기로는 은퇴한 시골 노인 같은 구석이 있었다. 자작이 굉장히 인자한 어조로 물었다.

“두 분께서 여기까지는 웬일로 오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엘렌과 이클립스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브리스타 자작은, 보는 사람이 다 푸근해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이 늙은이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엘렌은 먼저 정중한 사과를 건넸다.

“자작.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게 되어 미안합니다.”

그러자 자작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화제의 인물께서 찾아와 주시면 한낱 촌부에 불과한 이 늙은이로서는 감사할 따름이지요.”

“자작.”

엘렌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갈 틈을 단호히 막았다.

그녀는 곧장 본론을 꺼내기 위한 초석을 깔았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말하자면, 제가 이곳을 택해 온 것은 마이어스 영애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허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이래서 다들 수도, 수도 하나 봅니다. 영지에만 있다 보면 이런 소식들에 둔해지는 법이지요.”

모니카 마이어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원래도 시종 웃는 상이었던 그가 더욱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을 본 엘렌은, 적당히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는 그의 속내를 끄집어낼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그 어떤 거래를 나눌 때보다도 더없이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자작. 수도가 이런 상황에서 제가 밖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혹시 아십니까?”

갑자기 방향을 틀며 나온 그녀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듯했던 그는, 곧 얼굴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만약 아신다면, 제가 지금 황녀 전하와 함께 경을 찾아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그것은 아십니까?”

자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미 그녀가 물은 것들의 답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응이었다.

브리스타 자작의 대답은 없었지만, 엘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시는 듯하군요.”

그러나 그녀의 말에도 그는 조용히 그녀들을 응시할 뿐, 별다른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현명하며 그녀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을 상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굉장히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엘렌은 저의 말재간으로 이리저리 말을 돌리기보다 그냥 곧바로 본론을 찌르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시간이 없는 것은 자작이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자작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에겐 자작이 필요합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그리 되묻는 브리스타 자작의 얼굴은 처음과 달리 냉랭히 굳어 있었다.

미소가 사라지니 그곳에 남은 것은 슬픔 자락들뿐이었다. 한 줄, 한 줄 패이며 흔적을 남긴 일그러짐이 마치 눈물 자국처럼 그의 온 얼굴을 덮고 있었다.

“전 자작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저 따위의 지지가 어디에 필요하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각하.”

“어디에냐니요. 당연히 저희가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겠지요.”

엘렌이 이클립스와 브리스타 자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복수.”

“…….”

브리스타 자작은 그녀의 시선을 쫓아 이클립스를 한 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몰아치는 수많은 감정을 본 이클립스는, 지금이 해야 할 얘기를 꺼낼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작.”

“예. 전하.”

“마이어스 영애에게 제 외숙모 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내가 이 자리에서 하려고 준비했던 말은 다른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 말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죠. 먼저 꺼내지 않으면 안 되는 말을 알아버렸거든요.”

일그러진 얼굴의 브리스타 자작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이클립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황족이 아닌 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브리스타 자작의 발치를 보며 말했다.

“그런 숙부를 두었음이 부끄럽고, 그런 사건을 쉬쉬하는 가문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그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습니다.”

그녀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듯 손을 한 번 쥐었다 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모든 부끄러움으로, 나는 그대에게…… 우리의 죄를 고합니다. 미안합니다.”

모든 결정권을 갖고 있던 이들의 고개 대신 숙어진 것은, 미숙하며 그 어떤 결정권도 갖지 못했던 아이의 고개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브리스타 자작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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