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2화 (102/128)

<102화>

[후……. 넌 이게 짜증이 나.]

[…….]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에 엘렌은 속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본 길리언은 더욱 얼굴을 굳혔고, 그녀는 그것이 슬퍼 고개를 숙였다.

엘렌의 머리 위에서 길리언이 나직이 말했다.

[알겠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도록.]

그녀의 말은 거의 들어주지 않는 길리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한 번씩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곤 하는 날이 있었다.

이날처럼 이렇게 가끔, 아주 가끔.

그래도 그것이 저희의 사이가 가까워져 가는 신호라며 좋아했었던 엘렌은, 그래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다며 연신 다행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그리하여 길리언은 그날 공작의 마차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습격은 일어났으며, 그는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았다.

“그때는 반지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엘렌은 두려운 눈으로 목걸이에 걸려있는 반지를 보았다.

‘정말로 이 반지가 그때처럼 어떤 예지를 보여준 거라면, 황실을 지킨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이라면…….’

태자비가 되며 이어받고, 대대로 황실을 지켜온 반지.

이전에는 크레센트의 죽음도, 황제의 죽음에도. 심지어 케이든의 죽음에까지도 반응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번에는 길리언 대신 케이든의 모습을 비춰주었고, 그때와 달리 그녀가 본 것들을 무시하려 하자 마치 경고라도 하듯이 고통을 선사해 준 이것.

“내가 선택한 황실의 후계를 지켜 주는 거야. 그러니까―”

정말로 내가 죽을 자와 살 자를 골랐던 거야.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찰랑, 쥐고 있던 목걸이가 흔들리며 반지가 그녀의 손등에 부딪쳤다.

손에 닿은 반지는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 * *

얼마 전 2황자 직속 기사단 소속으로서 인사를 마쳤던 엘시어 크라이언트.

그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근무지가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기사단 편제 개편으로 인해 배속이 달라졌다는 설명과 함께.

“황녀궁…….”

2황자 전하의 기사가 된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는데, 이것은 정말이지.

엘시어는 제게 퍽 낯선 건물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황궁의 일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아마 그것은 제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그는 어서 가서 수속이나 마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으니 정문이 보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정문 근처를 서성이던 시녀가 그를 발견하고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작은 발로 총총 다가와 그에게 소곤소곤 말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예?”

황녀 전하께서요?

‘그런데 불안하게 그 사실을 왜 이렇게 작게 말씀하십니까?’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마차 사고 후 병상에 누워 있던 한동안 말 좀 조심히, 예쁘게 하라며 허구한 날 누이에게 혼났던 그는 꿀꺽, 다시 그 말을 삼켰다.

그렇게 시녀의 손에 이끌려 간 엘시어는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황녀의 앞에 서게 되었다.

다른 기사들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아직 수속을 마치지 못해 2황자 직속의 정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어서 와요. 그대를 기다렸답니다.”

그다지 면식이 없던 황녀가 갑자기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심지어 독대였다.

엘시어는 정말로 당황해 생각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오늘부터 전하를 보필할 엘시어 크라이언트라고 합니다.”

일단 그는 제가 해야 할 예를 올렸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는, 이어진 황녀의 말에 오히려 더 넋이 빠져서는 눈만 끔뻑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많이 당황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너무 경계하지 말아 주었으면 해요. 그대를 부른 것은, 엘렌 에덴버 후작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그리고 무슨 타이밍인지,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하. 에덴버 후작이 왔습니다.”

“들라 하게.”

에덴버 후작?

누이가 이곳에 왔다고?

곧 문이 열렸고, 이윽고 보인 익숙한 얼굴에 엘시어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환히 웃었다.

“누님!”

* * *

이클립스 황녀가 정말로 약속을 지켰음을 확인한 엘렌은, 엘시어를 한번 꼭 안아주고는 말했다.

“전하.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나가지요.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나가다니, 지금 바로 말인가요? 어디를 가는 건가요?”

“다음 기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시지요. 나가서 주변 동향을 확인하고, 우리에게 협력할 내부의 배신자를 찾아야 해요.”

바로 외출을 할 줄은 몰랐던 이클립스는 잠시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한차례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지금 바로 가지요.”

그들 사이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한 엘시어만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 * *

이클립스는 여인들은 쇼핑을 하며 친해지는 법이라며, 외출을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크레센트는 그런 그녀에게 충분히 호위를 붙일 것을 명령했고, 이클립스는 그녀의 호위 기사 셋과 그가 붙인 기사 셋으로 총 여섯 명의 인력과 함께 외출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수도 상점가를 향하는 마차 안. 이클립스의 물음에 엘렌은 간단한 계획을 설명했다.

“일단 2황자 전하의 기사들을 떼어 놓아야 하니, 저희 가문 산하의 숍으로 가시지요. 가서 기사들을 처리한 뒤 마차를 바꾸어 마이어스가로 갑니다.”

“처리라……. 그러면 오라버니께 말씀드릴 변명이 필요하겠군요. 적당히 케이든 오라버니의 잔존 세력 핑계를 대면 될까요.”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사실 수도 안에서 무력 시위가 일어날 만한 일이 그것밖에 없기도 하고요.”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이클립스가 제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들었지? 저 뒤에서 우릴 쫓아오고 있는 기사들쯤이야 그대들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이번에 황녀궁으로 배속된 엘시어를 비롯, 그녀의 마차에 동석한 두 기사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들은 황녀의 기사단이 편성되기 전부터 그녀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들로, 그 두 사람이 유일한 황녀만의 병력이었다.

“좋아. 그럼 후작. 그대들이 숨을 수 있을 만한 거처는 갖고 있나요?”

황녀의 물음에 엘렌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희는 오늘 이대로 수도를 빠져나갈 겁니다.”

“이대로 빠져나간다고요? 도망치는 겁니까?”

엘시어가 놀라 외쳤다. 엘렌은 그에게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 대어 주의를 주며 말했다.

“그래. 우린 이대로 도망칠 거야. 앞으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 지금 말해주마.”

입을 다문 엘시어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너는 바로 북쪽으로 가 북부군에 합류해야 해. 아버지께서도 분명 그리하셨을 거다. 그리고 북부군을 만나면 그들과 함께 곧장 리넥스로 가, 태자 전하의 병력과 합류하렴.”

그녀의 말에 엘시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바덴을 향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누님?”

“그러셨었지. 하지만 일단 지금은 리넥스로 가야 해. 나를 믿는다면 부디 그리해주렴, 엘.”

그녀의 간곡한 말에 엘시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장 갈게요.”

“그럼 그대는 마이어스를 만난 뒤 어찌할 생각인가요?”

이클립스의 물음에 엘렌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건…… 마이어스의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 * *

호위 기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엘렌 일행은 크라이언트 산하의 주얼리 숍을 향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특별 고객들의 응대에만 사용되는 별도의 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대기하고 있던 응대 인원이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런 직원의 인사에 엘렌이 2층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말했다.

“보아하니 ‘만실’인 것 같은데.”

“예?”

그녀의 말에 반문한 직원은, 잠시 어리둥절한 눈치로 그녀를 쳐다보다 허겁지겁 대답했다.

“아, 네. 이 층에는 현재 선객들이 계십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위층의 룸으로 모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괜찮으신지요?”

“나는 상관없답니다. 올라가지요.”

이클립스의 허락이 떨어지고,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응대하던 점원은 2층 문 옆에 달려 있던 설렁줄을 당겼다.

그리고는 돌아와 그들을 한 층 더 위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 3층의 문이 열리고, 주얼리 숍을 찾은 대인원이 모두 입장하자 서 있던 문지기들이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 순간, 엘렌이 말했다.

“맨 뒤의 셋.”

그러자 문을 여닫던, 마치 벨보이처럼 보이던 이들이 단검을 꺼내 이클립스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을 찔렀다.

“커흑……!”

갑작스러운 신음 소리가 들리자, 지금이 그들을 해치워야 할 타이밍임을 알아챈 이클립스의 호위 기사 두 사람이 검을 빼어 들었다.

복부를 단검으로 찔린 그들은 제 배를 틀어막고는 동료들의 뒤로 물러나 검을 빼 들려 했지만, 그들은 동료라 믿은 기사들의 검이 저희를 향하는 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비명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목에 찔러 넣어진 검은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이…… 미친!”

손이 부족해 아직 남아 있던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마찬가지로 검을 빼든 엘시어에게 막히고 말았고, 곧바로 엘렌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제이시가 내지른 단검에 쇄골께를 찔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엘렌이 말했다.

“이들은 바깥에 전투 흔적을 만들어 그곳에 두게. 호위 중 정체불명의 무력 집단에 피습, 임무를 다하다 사망한 것으로.”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벨보이 복장을 하고 있던 두 남자, 그러니까 3층 정보실의 보안들이 툭툭 손을 털고는 크레센트의 기사들을 옮겼다.

“나중에 복귀하시면, 저희는 얼굴이 알려졌으니 정체불명의 집단이 생포해 간 것으로, 황녀 전하의 기사 한 사람은 시체를 찾을 수 없어 그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하시면 됩니다. 살아남은 것은 전하와 전하의 도주를 도운 기사 한 사람뿐이라고 말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만 멀쩡히 돌아가면 이상하니까요. 그렇다고 멀쩡한 몸을 해할 수도 없으니, 한 분은 어디 몸을 숨기시든지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엘렌의 말에 질문한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일단 가지요.”

그녀는 앞장서 발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