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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1화 (101/128)

<101화>

“그 결혼, 좋아요. 할게요.”

제 오라비인 크레센트를 본 이클립스의 첫 마디였다.

크레센트의 근신 명령으로 잔뜩 침체되어 있던 황녀궁.

두 황족의 대면에 모든 궁인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저는 황녀이기 때문에 국경에서의 전쟁과도 무관할 수 없고, 오라버니의 혈육이기 때문에 이 내전과도 무관할 수 없어요.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 혼인을 피한다면 제겐 더 비참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그래. 네가 그것을 이해했다니 다행이구나.”

크레센트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은 제 뜻대로 움직여 주기로 마음먹은 듯 보이는 그녀의 말에 대한 만족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미소는 잠시 뒤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는 이클립스의 행동에 파삭 금이 가고 말았다.

“……오라버니에 대한 원망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왜 하필 외국의 힘을 빌려야만 했는지, 조금 더 기다리며 오라버니의 힘으로 쟁취할 수는 없었는지. 저는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수용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누던 말과 상반된 맥락의 이야기에 크레센트가 확연히 굳은 낯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럼에도 이런 결정을 한 것이란 걸, 오라버니께서는 알아주셨으면 해요. 지금 이 결정은 제가 많이 양보한 것이라는 걸 말이에요.”

“그래. 알았다.”

그는 긴장으로 굳어졌던 얼굴을 비로소 풀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대신 짝짝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잘 생각했다. 네 배우자가 될 이가 이곳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훨씬 남자답고 능력 있는 사람일 거다. 그리고…… 그래, 결혼식도 중요하지. 네 결혼식은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치러주도록 하마. 누구나 부러워할 혼인이 되도록 말이다.”

크레센트는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려 이런저런 말들을 꺼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제 오라비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요. 그런 것보다 다른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조건이요.”

그녀의 어조에는 이것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사뭇 결연함까지 묻어났다.

크레센트는 이 조건을 달기 위해 제 동생이 그런 생색을 내었노라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무리가 될 이야기만 아니라면 그 정도야 들어줄 수 있었다.

그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한번 말해봐라.”

“저도 저를 확실하게 지켜줄 제 기사단을 갖고 싶어요.”

“네 기사단을?”

“네. 이렇게 된 이상 저도 제 목숨은 확실하게 챙겨야 하니까요.”

황자들과 달리, 황녀에게는 개인기사단이 없었다.

황자들은 제위에 오르거나, 그러지 못해 가문을 나가더라도 새로운 성을 받아 스스로 한 가문을 형성한다.

하지만 황녀는 달랐다.

황녀는 결혼과 동시에 다른 가문 소속이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황실 기사라 하더라도 가문의 외부인으로 취급받을 그들을 한 기사단 단위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평생을 충성하기로 맹세한 호위 기사 몇을 제외하면 황녀에게는 제 신변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고, 그것은 곧 지금 그녀가 자신의 기사단을 요구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도 제 궁에 있는 이들은 오라버니의 사람들이고, 그 외는 아버지 혹은 케이든 오라버니의 사람들이에요. 제 사람은 없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 가담하는 만큼 저는 유사시에 저를 지켜줄 기사들을 원해요.”

이런 시기에 제 직속이 아닌 다른 기사단을 따로 둔다는 것 자체가 꺼림칙했던 그는, 제 동생의 말에 그만 납득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번에 자신이 근신을 명령하면서 제 사람 없는 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선례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요즘 그런 일이 뭐 한두 개라야지.”

“감사해요, 오라버니. 그리고 이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조건이에요.”

“마지막? 한 가지가 더 있단 말이냐?”

“네. 하지만 방금 것만큼 무리를 하셔야 하는 부탁은 아니에요. 그저 에덴버 후작과 제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달라는, 아주 작은 부탁이죠.”

저를 예민하게 만드는 이름이 나오자 크레센트가 물었다.

“왜 굳이 에덴버 후작과의 친분이지?”

“결혼해도 제 인맥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새로운 실세잖아요.”

그녀는 당연한 걸 묻는다며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확실치 않은 남편의 총애 대신 확실한 사교계의 실세를 소개해 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제 입지를 확실히 다져 줄, 에덴버 후작 말이에요.”

“……그래. 네가 그녀와 제대로 친분을 쌓는다면 내게도 나쁠 게 없긴 하지.”

그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고민하다 말했다.

“에덴버 후작은 제 동생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황궁을 자주 드나들고 싶어 할 거다. 그들 남매가 만나는 자리에 네가 동석하면 되겠구나.”

“저를 어떤 명분으로 동석시키실 건가요?”

“글쎄. 그냥 그쯤이야 네가 심심하니 말 상대나 해 달라며 가도 되는 일 아니냐?”

그러자 이클립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보나 마나 절 감시역으로 생각할 텐데요.”

“어차피 네가 내 동생인 이상 무슨 짓을 해도 그리 보일 거다.”

“억지로 끼워 넣어 어색해지는 건 원하지 않아요. 마땅한 방법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제 기사단에 크라이언트 경을 넣어주세요.”

“크라이언트 경을?”

그녀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것도 제법 괜찮은 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도 나쁘지 않군.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트리발로스의 요인을 지키는 셈이 되니 엮이기도 그게 더 좋겠어.”

“감사해요, 오라버니.”

“그럼 기사단 개편이 필요하니 최대한 빨리 기사 선별을 해서 올려라. 그래야 너도 나도 편하니까.”

“네. 오늘 안에 선별을 마쳐서 목록을 보내드릴게요.”

이클립스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해가 아직 다 뜨지 않아 사위가 어슴푸레한 새벽. 긴 밤 내도록 뒤척이던 엘렌이 크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이스타지오의 원군은 없어.]

[황태자는 고립됐다.]

[이대로 압박해서 죽여 버려.]

[원군이 오지 않아. 크레센트는 날 죽이고 이 나라를 팔아넘길 셈인가?]

[아무리 2황자라도 그건 아닐 겁니다. 나라가 없으면 제위도 없는 것 아닙니까.]

[전하, 성문이 열렸습니다! 바로크 군이 트리발로스와 내통했어요!]

[도망치십시오, 전하!]

[황태자를 발견했다!]

[그럼 잘 가지.]

온통 뿌옇고 붉은 안개가 진 참혹한 성안의 광경.

그녀는 가슴을 꿰뚫려 죽는 남자의 결말을 보았다.

엘렌은 그만 왈칵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놀란 가슴에 눈물만 흘리던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더웠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던 탓에 오한까지 들었다.

이건 아무 의미 없는 개꿈이야.

그럼. 개꿈이지.

엘렌은 고개를 흔들어 흘러내려 온 머리칼들을 치웠다.

이딴 악몽을 꾼 것은 어젯밤 제가 늦게 잠든 탓일 것이라며, 그녀는 정신을 깨우기 위해 뺨을 착착 두드렸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던 게 틀림없었다. 창문을 열어 새벽의 찬 바람을 조금 쐬고 나면 한결 나아지리라.

그런 생각으로 창문을 열기 위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갑자기 목 언저리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윽……!”

불길처럼 피어오른 이유 모를 통증이 그녀의 흉부를 꿰뚫고 심장께로 파고들었다. 느닷없이 시작된 고통은 그치지 않고 그녀의 심장을 터뜨릴 듯 쥐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길한 악몽에 놀랐던 엘렌은 깜짝 놀라 몸을 더듬어 고통의 원인을 찾아 뜯어냈다.

타악!

그녀의 손에서 붉은빛이 영롱한 반지가 꿰인 목걸이가 달랑거렸다.

“이게 무슨…….”

엘렌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았다.

목걸이를 뜯어내자마자 피부를 달구고 있던 뜨거운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무의식중에 목 언저리를 쓰다듬으니 피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목을 어루만지던 엘렌은, 방금 있었던 고통도 어쩌면 착각인가 싶어 중얼거렸다.

“악몽 탓인가. 요즘 정말 힘들긴 했지만―”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마치 착각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이 다시 찾아 들기 시작했다.

“아흑……!”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제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가뜩이나 꿈도 불길한데 대체 이건 뭐지?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심장을 옥죄는 듯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통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밭은 숨을 내쉬던 엘렌은, 그러다 문득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떠올랐다.

기분 나쁠 만큼 생생해 꼭 당장의 미래처럼 느껴지는 꿈. 유독 덥다고 느낄 만큼 뜨거운 열기와 가슴이 답답하며 초조한 느낌.

그것은 길리언 크렘벨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듯하지만, 그는 당시 꽤나 위험천만한 일들을 저지르고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 다니면서도 그가 죽지 않았던 것은 그가 정말 황제가 될 운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시의 그’가 그랬었다는 소리지만.

어쨌든 모든 준비가 완벽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러니까 길리언의 옆에는 자신이 있고 자신은 그를 즉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던 그 시간에서, 그녀는 오늘과 같은 꿈을 꾸었었다.

그의 활동은 대부분 비밀스러웠지만, 대외적으로 활동을 할 때만큼은 어쩔 수 없이 크렘벨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를 타곤 했었다.

그런데 그 마차가, 아마도 그가 뒷세계에서 엮인 일로 사게 되었을 악의에서 비롯된, 그런 습격을 당하는 꿈을 꾼 것이다.

반신반의했지만 그녀는 온몸을 엄습하는 두려움에 꿈에서 깨자마자 달려 나갔다.

그가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매달렸다.

[제발 오늘은 다른 마차를 타요. 남들이 조금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지만, 오늘 하루만은 그냥 몸이 좋지 않다 말하고 공작가의 마차는 커튼을 쳐서 비워놔요.]

당연하게도, 길리언은 그녀를 미친 여자 보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곧장 나가라고 하지 않고 깊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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