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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100화 (100/128)

<100화>

당초 예상보다 적은 군사를 끌고 내려가게 된 케이든은, 어찌 되었든 제때 바덴에 당도할 수 있었다는 점에 안도하며 트리발로스의 침입에 대한 방비를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해안의 경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선착장 근처는 물론이요, 가능한 많은 병력을 동원해 엉성하게나마 급히 쓸 수 있는 높은 구조물들을 건설, 최대한 요격 가능한 태세를 갖췄다.

그 외에도 정찰정을 띄운 뒤 바덴령의 현황을 파악하고, 주민들에 대한 인솔 계획을 짜는 등 그는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일정을 수행해 나갔다.

그렇게 하루.

세 번의 경비 교대가 이루어지고, 상륙하려는 배들은 보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날이 바뀌고 해가 중천에 걸릴 때쯤.

망루에서 바다를 보고 있던 병사가 말했다.

“연기가 보입니다! 동쪽으로 두 개 확인했습니다!”

“두 개라고? 그건 지나갔다는 신호인데?”

그 보고는 곧장 케이든에게 전달되었다.

“트리발로스의 군함들이 이곳을 지나쳐 갔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이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렸다.

자신은 당장의 문제를 피했다는 안도와, 왜 하필 가장 취약한 리넥스를 향했느냐는 한탄.

그런 주변의 반응을 알아차린 케이든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감추고 명령을 내렸다.

“이곳을 그냥 지나쳤다면 리넥스겠군. 지금 바로 군사를 정비하지.”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도착한 전령이 있습니다.”

“전령? 일단 들라 하지.”

그런데 들어온 전령은 거의 쉬지 못하고 달려온 듯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전령은 케이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슈탓트펠트가의 명령으로 온 저스틴 고든입니다.”

그는 입을 여는 것이 굉장히 두려운 모양이었다.

우물쭈물 마른침만 삼키는 모습에, 그것이 이상해 케이든이 눈썹을 움찔하자 전령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수도가…… 수도가, 점령당했습니다.”

* * *

케이든은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수도가 점령당해?

누구에게?

엘렌은? 아버지는?

“……무슨 소리지? 자세히 설명하도록.”

그의 동요가 느껴졌는지 전령은 고개를 더욱 땅으로 처박았다.

“지금 수도는 길리언 크렘벨과 2황자 전하의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수도 출입이 막혀 인근 주민들에게 물으니 봉쇄 상태가 하루 이상 이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말에 회의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2황자?

길리언 크렘벨과 2황자라면, 귀족파가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회의장이 일순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은 오클라니 바로크를 향했다.

그가 당황으로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외쳤다.

“왜, 왜 날 보는 겁니까!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이봐! 똑바로 말해!”

그가 전령을 보며 소리치자, 케이든이 탁탁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렸다. 주의를 자신에게로 모은 그가 물었다.

“봉쇄라고?”

“예. 성벽 너머로 전투 소음과 길리언 크렘벨과 2황자 전하의 선언문 낭독 소리가 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나올 때까지 주변 영지에 대한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수도 내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송구하게도 그것까지는…….”

“폐하나, 다른 귀족들은?”

이야기를 묻는 케이든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하지만 나온 대답은 그가 원하던 말이 아니었다.

“그 또한 잘 모릅니다. 아마 수도에 있지 않았던 귀족들이라면 괜찮을 거라는 것 말고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한 케이든이 의자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회군해야 하나.

‘폐하의 생사를 모르는 상태이니 여기서 회군하지 않으면 문제다. 하지만 그리하기엔 당장에 트리발로스가…….’

케이든은 머리가 아파오는 느낌에 이마를 짚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리스가 냉랭한 얼굴로 한 발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전하.”

“말하지, 코엔하임 경.”

“바로크 공자를 결박해 구속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바로크 공자는 어찌 될지 모르는 변수입니다.”

그러자 오클라니가 뒤에서 “나는 몰랐다니까! 이봐, 코엔하임 경!”하며 크게 외쳤다.

모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었다.

“공자가 알았든 몰랐든 그가 반역에 연루된 이상 어쩔 수 없습니다. 그를 지휘체계에 포함시킬 수 없을뿐더러,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두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자 가만히 말만 하는 것으로는 또 묵살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오클라니가 케이든의 앞으로 튀어나와 넙죽 엎드렸다.

“전하! 저는 정말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도 몰랐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알았으면 제가 여기까지 얌전히 왔겠습니까!”

케이든은 제 이마께부터 머리를 한차례 뒤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후…… 바로크가의 병력이 보고 받은 것과 다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아닙니다. 저는 저희 가문의 정확한 병력도 모릅니다. 아직 후작이신 아버지께서 모든 실권을 쥐고 계셔서……!”

“하지만 나는 그것이 서류를 거짓으로 꾸며 세금을 덜 내려 했던 것이라 생각했지, 서류는 정말이고 병력을 빼돌린 것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의 사정을 봐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케이든이 이어 명령했다.

“오클라니 바로크를 가두고, 절대 바깥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도록 항상 두 명 이상의 감시를 붙이도록. 가서 저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캐내라.”

그의 결정에 모리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깥으로 나가 사람을 불러왔다.

“전하! 아닙니다.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오클라니 바로크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곧 들어온 병사들에 의해 끌려 나가고 말았고, 그가 사라진 회의실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케이든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말했다.

“그럼 이제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릴 결정이 국운을 좌우할 일이 될 것이며, 그렇기에 가장 어려운 결정이 되리라는 것을.

“군사는…….”

케이든이 말을 흐렸다.

방금 오클라니의 처분에 대한 답이 있었던 것처럼, 해야 하는 바는 확실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엘렌은 무사할까.

아버지는?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오자 비로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하지 못한 말도 듣지 못한 말도 많은데.

손바닥을 파고드는 불안한 싸늘함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의자의 손잡이를 부술 듯 쥐었다.

미칠 듯 불안해.

그렇지만 나는―

그는 곧 꽉 쥐고 있던 손의 힘을 의식적으로 탁, 풀고는 심호흡과 함께 등을 의자에 깊이 기대었다.

그가 참았던 숨을 뱉어내듯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뱉었다.

“……회군이 필요해. 그렇지만 국경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

케이든이 힘들어하는 눈치이자 이안 슈탓트펠트, 그러니까 케이든의 명령으로 크렘벨의 조사 임무를 수행했던 슈탓트펠트 경이 입을 열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든 전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케이든은 힘 빠진 미소나마 지어 보이고는, 체셔 경 테리어드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체셔 경. 자네가 간다면 북부령도 한층 더 결집하기 수월해지겠지.”

지금 내려오고 있을 북부군에는 체셔 가에서 보낸 이들도 있었다.

테리어드가 나서서 협력한다면 북부군은 훨씬 더 응집력 있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가서 자네의 판단으로 결정을 하게. 그로 인한 결과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필요하다는 판단이 드는 방향으로 움직여. 알겠나?”

“예, 전하.”

“좋아. 지금 군사의 절반은 체셔 경의 지휘 아래 수도로 간다. 이의 있나?”

“그렇다면 나머지 반은…….”

“리넥스로 가야지.”

모리스의 질문에 빠르게 대답한 케이든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하고 저를 보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수도에는 높은 확률로 폐하를 비롯해 많은 인질들이 있을 거다. 그러니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이들은 모두 리넥스로 가라. 이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든, 설령 그게 크레센트라도,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에게까지 칼을 들이밀지는 못할 테니.”

그의 말에 주변은 모두 숙연해졌다.

“바로크의 병력은…… 모두 리넥스로 보낼 거다. 지금은 그들을 모두 수감시키거나 감시할 인력이 없으니 말이야. 이 나라를 날려버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곳에서는 허튼짓은 못하겠지.”

“그것은…… 예.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듯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으로부터 30분 뒤에 회의를 재개할 테니, 지금 들은 말을 감안해서 각자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정해서 오도록. 나는 리넥스로 갈 것이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회의장에서 멀어지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난 그는, 충분히 멀어졌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그늘진 벽에 기대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스스로도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제 사랑을 위해 직접 움직일 수도 없는 남자라니. 이래서야 감히 그녀에게 말이라도 꺼내 볼 수 있겠는가.

결국 그의 눈에서 참지 못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런 자신을 믿고 대체 누가 앞으로의 삶을 함께하자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케이든은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이딴 자리, 마음 같아서는 다 내던지고 싶었다.

사실 크레센트도 제 나름의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은 있었다. 저와 적대하는 것을 택하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황위를 넘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정면으로 들고 일어난 순간부터 그런 선택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젠 그가 죽든지 자신이 죽든지, 둘 중 하나의 결말뿐인 것이다.

* * *

“이클립스가 내게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크레센트가 물었다.

“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 봐. 그 애도 그게 더 제게 좋은 일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니까.”

크레센트는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제가 마시고 있던 잔의 술을 모두 입에 털어 넣은 그는 마시고 있던 잔을 탁 위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지금 가보지.”

“예.”

클라우디스가 고개 숙여 대답했다.

하지만 정작 그 소식을 가져온 장본인인 그는 제 주인처럼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간 남들 앞에서는 고고하게 고개를 치켜들어도 가족의 앞에서는 언제나 한발 물러나 주었던 황녀.

그런 그녀에게서 참다 참다 터져 나왔을 그 말이, 정말 이렇게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일까?

가슴 한구석으로 불안감이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애써 고개를 젓고는 제 주인의 뒤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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