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늦은 밤.
엘시어와의 만남이 애초에 늦은 시간에 이루어졌던 탓에, 면회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엘렌이 방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녀가 돌아가는 길을 함께 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빠듯했다. 시계를 확인한 길리언은 엘렌에게 황궁에서 하루 묵고 갈 것을 제안했고, 합리적인 제안도 길리언이 하는 것이면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알겠다며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혼자 남겨질 동생의 생각에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엘렌은, 그렇게 동생의 숙소 근처 황궁 귀빈실에 묵게 되었다.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시녀가 말했다.
“각하. 목욕물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늦은 밤에 번잡하기만 할 테니, 이만 가서 쉬세요.”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던 엘렌은 모든 시중을 거절했다.
머리로는 자신이 예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황궁에 널린 병사들을 비롯해 제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시녀까지도 모두 2황자의 사람들처럼 보이니 그녀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씻을 물도 마다한 엘렌은, 지금 쉬어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곧장 안쪽 침실로 향했다.
“……피곤하네.”
그녀는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침구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보드랍게 뺨을 감싸오는 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는 그대로 천장을 응시했다.
정말 잘 될 수 있을까?
내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엘시어만은 여기에서 빼내야 하는데.
이렇게 길리언 크렘벨에 대한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걸까.
복수와 생존이라는 두 가지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니, 일단 살아남는 데 집중하는 게 맞는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그녀는 이 정신 없는 와중에도 제 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한 마디를 입술 밖으로 꺼내 보았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실까.”
아이 앞에서는 큰소리치고 왔지만, 겪어보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녀라 하더라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판돈은 그저 돈 몇 푼이 아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
여기서 자칫하다간 이전과 같은 미래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내가 잘해야 하는데.
그녀는 밀려오는 압박감에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안 돼.
약한 생각 하지 마.
그의 생사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 살아남는 데 집중해.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며 착착, 혼자 뺨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방에 울릴 리가 없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분명 씻을 물까지도 마다했던 그녀였다. 엘렌은 잔뜩 경계심을 세우고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러자 문 너머에서 힘 있고 기품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안하실 물을 가져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은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 먼저 열렸다.
달칵.
들어온 것은 유난히 자세가 꼿꼿한 시녀 한 사람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시녀 한 사람.
앞장서 들어왔던 여인이 그녀의 정면에 섰다.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여성의 모습에, 엘렌이 물었다.
“……난 물을 부탁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누구죠?”
그녀의 질문에 여자는 주위를 확인하는 듯 몇 번 두리번거렸다.
곧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여자는 고개를 바로 들고는 제 머리를 옥죄고 있던 머리 장식을 풀었다.
흔하지 않은 은빛 실타래가 여자의 뒤로 출렁이며 떨어졌다. 누군가를 똑 닮은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클립스 이스타지오. 이 제국의 황녀입니다.”
* * *
이클립스는 제 오라비의 명령을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팔려 가듯 결혼해, 이후로도 상품으로서만 살아가야 할 자신의 인생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결정.
온 백성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두고 나라의 수치라 손가락질할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이라며, 어딜 외국인 따위가 이 나라에 간섭하려 드느냐며.
그저 나고 자란 이 땅과 제가 땅에 발 딛고 설 수 있는 몸을 준 가족을 사랑했을 뿐인 자신은, 그렇게 백성들의 보이지 않는 돌팔매를 견디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말로는 너를 위한다 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조건만 따졌을 속내.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 그녀는 생각했다.
이대로 오라비가 황제위에 오르더라도, 자신의 처지는 나빠지면 나빠졌지 더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후계를 낳았지만 여전히 황후가 아닌 후궁의 이름을 달고 있는 어머니와 후궁 소생이기에 더더욱 황위를 갈망하는 오라비.
어머니의 권력은 계승권을 가진 아들에게서 나왔고, 또한 팔아넘길 수 있는 딸인 자신에게서 나왔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자식은 권력 쟁취의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저 수단으로만 취급하기엔 자신은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사춘기에 스치듯 지나간 짧은 연정도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엔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얻고자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탐내기엔 혼자 부딪쳐야 하는 벽들이 무서웠고, 그러니 할 수 없다 배우며 자연스럽게 체념하게 되었다.
그렇게 타협했다.
비록 제게 허락된 것이 혼인뿐일지라도,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해 예쁜 가정을 꾸리면 된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을 낳아서 원하는 만큼 예뻐해 주고, 그렇게 사랑으로 키워서 동화에서 보던 화목한 가정을 만들자고.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으니 그때는 또 다른 올가미가 생겨났다.
그래도 어머니인데.
그래도 오라버니인데.
자신이 하고 싶은 결혼만 생각하기엔, 자신이 타고난 사회적 지위와 가족이란 이름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 번 더 타협했다.
저희에게 필요한 사람 중에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고.
그거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타협을 거듭한 끝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라의 국운을 외국에 맡겨버린 오라비와, 그 오라비가 가져온 그녀를 매국노로 만들 강제적인 혼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한 것이다.
무엇을 선택해도 다 잃을 바에야, 원하는 대로 시도라도 해 보고 팔려 가겠다고.
* * *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요. 무례임을 알면서도 이리할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를 조금만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갑자기 나타난 황녀의 등장에 엘렌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어찌…… 그보다, 이 시녀 차림은 대체?”
당황한 엘렌이 침대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이클립스 황녀와는 이전에도 지금도 그다지 접점이랄 것이 없는 사이였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는 것과, 바로크 가가 황후 암살로 인한 반역죄로 몰살당하면서 황궁의 어딘가에 유폐 당했다는 것,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의 세 가지뿐.
황망해 하는 엘렌을 보던 이클립스는 미안하다는 듯 애매한 미소를 한 번 지은 뒤 입술을 열었다.
“그대는 가족 간에 사이가 퍽 좋아 보였지요. 어쩌면 그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놀라지 말고 들어주길 바라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이윽고 정리가 끝났는지 아주 간단한 상황 설명을 전했다.
“……내 오라비는 이 반역을 위해 트리발로스와 결탁했어요.”
가장 어려운 말을 끝낸 이클립스는 엘렌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놀라지 않을까, 혹은 저를 비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엘렌은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가 또 나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움찔거렸을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클립스는 그 사실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동맹의 표시로 트리발로스의 선봉장과 내 혼인을 계획하고 있지요. 난 그것을 거부하다 지금 근신 명령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엘렌이 나직하게 뱉은 소리에 이클립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대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긴 해야겠는데, 이런 이야기가 몰래 내 시녀를 보낸다고 해서 결착이 날 만한 일은 아니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지요. 내 무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하겠어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나저나 제가 정신이 없어 선 채로 말씀을 나누었군요. 일단 가서 앉으시지요.”
엘렌은 자신이 정신이 없었다며 마주 사과하고는 그녀들을 침실 옆의 응접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어두운 방 안.
작은 티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녀 전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이 있으실 텐데…… 혹 제가 전하의 혼인에 훼방을 놓아 주길 바라십니까?”
엘렌의 물음에 이클립스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얕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내가 움직인 가장 큰 이유가 이번 혼담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이대로 오라버니가 하는 바를 두고 보다간 나까지도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로서 남게 될 테고, 그건 내게 있어서 이딴 혼인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에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손을 올리고 등을 꼿꼿이 편 이클립스가 말했다.
“그러니 제안하겠어요. 동생이 붙잡힌 탓에 그대의 시름이 아주 깊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부분을 내가 해결해 주지요. 대신 그대는 내 오라버니의 계획을 확실하게 방해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활로가 하나 더 열렸다.
그 순간 엘렌이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제 어디를 믿고 그리 베팅을 하십니까.”
“나로서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업적들을 쌓아 올렸으니까요. 사실 내가 이리 결심하게 된 데는 그대의 영향도 크답니다.”
이클립스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쑥스럽다는 듯 살짝 머뭇거리다, 작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언젠가 여성이 작위도 갖고, 회의도 참여하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생각했어요. 선선대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배움이 선대에서는 허락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바로 내 대에서 이루어질 일이라고는, 정말 신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죠. 그런데 그걸 그대가 해냈어요.”
그 말과 함께 엘렌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떠한 열망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아마 지금 제가 느끼고 있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이리라고, 엘렌은 생각했다.
“그러니 나와 거래를 나눠요. 그대의 신병을 여기에 묶어두고 있는 그대의 동생을 내가 책임지고 풀어주겠어요. 물론 그대의 외출까지도 내가 책임지고 보장하지요. 그러면 그대는 어떤 수를 이용해서든 오라버니를 끝장내 주세요.”
이클립스는 스스로 제 오라비의 끝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