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98화 (98/128)

<98화>

“이클립스. 내 말을 좀 들어.”

“무엇을요? 오라버니께서 갑자기 들고 오신 제 혼담을 말인가요?”

이클립스 이스타지오,

이스타지오 황실의 유일한 황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네가 회의에 있질 않는데 내가 어떻게 모든 사안을 네게 상의하면서 진행하겠니.”

“어머니께서 오라버니의 즉위를 꿈꾸시면서 저를 먼저 혼인시키려 하셨을 때도 참았는데,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지금도 그때와 다를 바 없어. 내 즉위는 네게도 좋은 일이고, 그것을 위해 네 혼인이 필요한 것 아니야.”

“달라요!”

크레센트와 똑 닮은 그녀의 푸른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그때는 그래도 제 눈으로 신랑을 보고 고를 수 있는, 반쪽짜리일지언정 선택권이란 게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죠? 오라버니께서 보시기에도 정녕 이 두 문제가 같아 보이시나요?”

“그딴 반쪽짜리 선택권보다 이게 훨씬 나은 일이야. 그때 네 혼처를 생각해 봐라. 이 나라에 공작이라곤 고작 둘뿐인데 그들 중 누구 하나 너는 거들떠보지 않았잖아!”

“그건 오라버니의 기준에서나 그렇겠지요! 공작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가주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그가 먼저 죽지 않는 한 영원히 조명받을 수 없는 게 안주인의 삶인데!”

이클립스의 외침에 크레센트도 질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조명을 받지 못하긴 뭘 못 받아! 여자들의 사교계는 그럼 다 허상이란 말이야!”

“네! 남편의 지지 없이 나서야 하는 사교계는 허상과 다를 바가 없지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이클립스의 모습에 크레센트는 허, 하고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오라버니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저도 기쁘겠지요. 하지만 그게 오라버니께서 마음대로 저를 팔아 장사를 하셔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이클립스는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던 크레센트는 손을 휘휘 저으며 뒤돌아 문을 향하더니 말했다.

“다시 생각해 봐라. 트리발로스의 선봉장으로 그들 사회에서 이미 우수함이 증명된 사내야. 전쟁이 끝나면 이 제국에 정착하기로 했고, 포트 공작의 처형 후 공작위를 받아 제국의 일원으로서 일하게 될 테지.”

“…….”

“국내에도 이만한 신랑감은 없다. 아직 어린 트라이아 공자? 그들은 애초에 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크렘벨 공작은 초혼조차 아니지. 그렇다고 여타 후작가를 기대하는 것은 곤란해. 미혼이 없진 않지만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고수하기 위해 너만은 고사하려 들 거다.”

그의 말에 이클립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레센트가 거 보란 듯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렇게 단순하게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나도 널 생각해서 하는 거다. 너도 이해하겠지?”

크레센트는 이쯤 하면 제 여동생이 주장을 굽히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이, 자신이 도움을 준 대가로 저를 샀다고 생각하는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도 나라를 팔아가면서까지는 더더욱요.”

그녀의 선언에 크레센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문고리를 잡아 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제 할 말을 남겼다.

“한동안 궁에서 조용히 있으며 생각을 좀 정리해라.”

쾅.

문이 닫히고, 홀로 남겨진 이클립스는 제가 서 있던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 * *

크라이언트 백작은 북부로, 북부로 도망쳤다.

그의 호위차 붙어 있던 네 명의 기사들 중, 수도 정찰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한 명을 빼고 남은 셋.

“저기 저거, 언덕 너머에 군사의 깃발 같은데?”

“어?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계십시오. 제가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그리 말한 뒤 곧장 몸을 가볍게 하고 조심스레 정찰을 나간 기사는, 다녀오자마자 흥분한 기색으로 저 군사들이 크라이언트의 휘장과 깃발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언뜻 체셔와 하워드 가의 깃발도 보인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백작은 곧장 말을 내달렸다.

혹시나 추격이 붙을세라 말만 붙잡고 달리길 며칠.

그는 마침내 내려오고 있던 자신의 병사들과 조우할 수 있었다.

“거기, 자네들!”

백작은 한 손을 들어 그들의 주의를 끌며 달려갔다.

수도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 크라이언트 백작은 운이 좋게도 수도 바깥에 있었다.

마침 외곽의 공장을 확인하러 갈 일이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그는 수도의 소식을 듣자마자 확인을 위해 사람을 보냈고, 도시가 봉쇄되었음을 알고는 그길로 곧장 북부를 향해 말을 내달렸다.

자식들의 생사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제가 해야 할 일은 알아서 잘 찾아서 하는 아이들이었다.

시기적으로도 수도 내에 머무르고 있던 아이들보다 자신은 늦을 수밖에 없었고, 뒤늦게 걱정이 된다고 수도로 뛰어 들어가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앞으로 내려올 북부군을 통솔하여 가는 것이 아이들의 생존 확률이 더욱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단 군사가 있다면, 그 군사의 창끝이 저를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협상에 필요한 패인 인질은 멀쩡히 놔두기 마련이니.

웅성이는 병사들을 보니 멀찍이서 달려오는 그가 비로소 식별이 된 모양이었다.

크라이언트의 병력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 백작을 맞이했다.

“아니,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대체 이게…….”

그와 호위 기사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하게 묻는 지휘관에게, 다니엘이 천천히 말의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설명하자면 기네. 일단 이동하면서 이야기하지.”

백작은 현재의 상황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수도에서 2황자와 길리언 크렘벨이 연합하여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 황태자와 수도 병력의 일부는 이미 출정을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이며, 현재 수도는 봉쇄 상태라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엘렌과 엘시어의 행방이 불분명하다는 사실까지 같이.

지휘관은 백작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아연한 낯으로 물었다.

“설마 지금 이 병력으로 수도 공성전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무리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무작정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지. 그리고 그건 저쪽에서도 우리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거라네. 분명 협상을 시도할 테니, 자네는 가면서 나와 함께 수많은 협상책들을 구상해야 되겠어.”

그래야 우리가 무사히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갈 테니.

온몸이 무겁고 피곤했지만, 다니엘은 눈을 부릅뜨며 말의 고삐를 내리쳤다.

* * *

“오, 엘.”

엘렌은 제 눈앞에 서 있는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누님도요.”

엘시어는 제 누이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크레센트의 허락이 떨어지며, 에덴버 저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했던 엘렌은 엘시어를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오게 되었다.

무사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요동치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

다만 감시역으로 길리언 크렘벨이 붙었다는 것이 짜증이 날 뿐.

엘시어가 뒤편에 서 있는 길리언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저는 제가 혹시나 발목을 잡았을까 봐, 그게 너무 걱정이 돼서…….”

“아니. 네 문제가 아니었단다. 그보다 아버지께서 어떠하실지가 걱정이구나.”

제 누이의 말이 선뜻 믿기지 않았는지, 엘시어는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는 길리언을 쳐다보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무사히 도망치신 듯합니다. 크렘벨 공께서 그리 전하께 보고를 드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러자 길리언이 뒤에서 툭, 한마디를 던졌다.

“봐.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아.”

“……수도방위군 사령관이라면서 여기서 노닥거릴 여유도 있나 보지.”

엘렌이 빈정댔지만 길리언은 태연히 넘겼다.

“지금은 내가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까. 처음 위계를 제대로 잡은 것으로 충분하지.”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다지 충분하다고 볼 수 없었다.

위계와 그에 따른 충성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얼굴 잠깐 본다고 생기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지금 그가 판단하기에 저는 엘렌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엘. 조금만 버티렴. 아버지께서는 무사히 빠져나가셨다니 상황이 제법 희망적이구나.”

엘렌이 제 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그러자 엘시어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이렇게 해도 됩니까?”

“그래. 저기 계신 크렘벨 공께서 그새 또 배신을 꿈꾸고 계신다니, 알아서 사정을 봐 주실 거란다.”

엘렌이 슥 턱짓으로 길리언을 가리키자, 엘시어가 식겁해서는 제 누이와 길리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길리언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엘시어는 그제야 그녀의 말이 정말임을 깨달았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여기에 있는데도 희망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까, 누님?”

“물론. 아버지께서 계시니 북부군은 확실히 움직일 수 있고, 내부에는 배신의 대가 크렘벨 공께서 계시잖니. 크레센트 황자는 본인이 쓴 꾀에 그대로 넘어가게 될 거란다.”

엘렌은 손을 올려 이제는 자신보다 더 높이 위치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려무나. 너는 일이 어떻게 되든 반드시 빼낼 것이고, 당분간은 크렘벨 공이 사정을 봐 줄 테니.”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엘시어가 쉬이 안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치를 보자, 엘렌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직 많이 불안하구나. 그래, 너도 이젠 이런 것을 알고 배울 때가 되었지.”

그녀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치마를 주섬주섬 만지자, 엘시어는 누이가 무얼 하나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드러난 누이의 다리에 그는 눈 둘 곳을 모르고 당황하다 차렷 자세를 했고, 엘렌은 자신의 치마 안쪽 허벅지에 매어둔 작은 가방에서 잘 접힌 종이 몇 장을 꺼내었다.

엘시어는 두 손으로 제 누이가 건네는 것을 받아들고는 조심스레 그것을 펼쳐 들었다.

거기에 쓰인 글을 읽던 엘시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중얼거렸다.

“이건……!”

“크레센트 황자를 보낼 최후의 증거지.”

엘렌은 그에게서 다시 종이를 받아 들어 원래의 위치로 갈무리를 하며 말했다.

“크렘벨이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합쳐야 완전한 내용이 된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바로크 가와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가 황후 암살에 손을 대었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지.”

그녀는 다시 한번 동생을 꼭 껴안아 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상하게 두지는 않을 거란다. 누구라도 그런 일을 벌였다간, 나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