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엘렌은 그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런 선택을 한단 말인가.
“국경이 뚫렸을 경우 그대로 밀고 들어올 트리발로스가 무섭지 않은 건가? 2황자는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 있지?”
그녀는 의문으로 눈가를 찌푸리고 물었다.
길리언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그들을 불러들인 게 바로 그니까.”
“……뭐?”
엘렌은 어처구니없음에 제 놀라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스스로 외국의 적을 불러들였다고?
그녀의 반응에 길리언은 어떠한 확신을 얻은 듯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때. 확실하지 않나? 그들과 소통하고, 침략을 지시한 게 바로 크레센트란 말이야. 이 나라의 귀족위와 함께 이권들을 팔아서 군사를 데려온 거라고.”
“미쳤군.”
그런 미친 짓을 길리언 크렘벨 말고도 또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것도 누구보다 나라의 자주권 수호에 신경 써야 할, 이 나라의 황족이!
엘렌의 솔직한 감상에 길리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엔 나도 동의하지. 하지만 애초에 황좌라는 건 미치지 않으면 앉아 있을 수가 없는 자리 같더군.”
“그것을 증명할 증거는 있는 건가?”
“그런 것도 없이 함부로 뒤를 치겠다는 말은 하지 않지.”
그래. 그 정도의 치밀함은 있는 사내였지.
엘렌은 속으로 수긍하고는 눈을 꽉 감았다.
“……당신을 이용하면, 없는 원군과 지원이 솟아나기라도 하나?”
“그걸 얻어낼 수 있는 너의 자유를 선물할 수 있지. 네게는 너를 잘 따를 게 틀림없는 북부군과, 그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이 있으니까.”
엘렌은 스스로 되뇌었다.
지금의 최선이 무엇일지 생각해.
길리언 크렘벨을 닮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더 좋은 선택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확실히 승산이 없어 보이진 않지만, 부족해. 갖고 있는 수는 이것뿐인가? 이건 그와 함께 한 우리 모두가 역풍을 맞을 수 있는 일이야. 다른 게 필요해.”
“내 밑천을 너무 묻는군.”
“당신은 스스로 준비한 반역을 내게 들켜 실패했어. 가진 게 이것뿐이라면, 차라리 나를 황자에게 넘겨. 그렇다면 난 지금이라도 크레센트에게 충성해 내 사람들을 지킬 테니까.”
그녀의 단호한 말에, 길리언은 두어 번 고개를 젓고는 제가 외투 속에 두르고 있던 가슴보호대로 손을 넣었다.
그 안을 주섬주섬 만지던 그는 덧댄 철판 사이에서 얇게 접힌 종이들을 꺼내, 그것을 엘렌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게 이런 게 있다. 나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남긴 물건이지.”
“이건……?”
종이를 건네받은 엘렌은 곧장 그것을 펼쳐 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그녀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후 암살 모의. 바로크 가와 크렘벨 가의 작당. 얻어낸 독약. 실행까지의 과정…….
상세한 논의가 쓰인 그 편지들은, 명실상부한 황후 암살범에 대한 증거들이었다.
과거 그가 크레센트를 처단할 때 썼었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었던 의문의 증거들.
그것은 크렘벨이 직접 관여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스스로의 죄를 증명하는 증거였던 것이다.
“어때. 이 정도면 걸어볼 만하지 않나?”
“……이런 걸 갖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용케 숨겼어.”
“최적의 순간에 써야 효과적이니까.”
엘렌은 쥐고 있는 편지들을 앞뒤로 훑어보며 대꾸했다.
“최적의 순간이라. 보나마나 적당히 크렘벨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도록 조작해서 올릴 셈이겠지?”
“묻는 이유를 모르겠군. 당연하지 않나.”
그의 긍정에 엘렌은 고개를 슬쩍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들고 있던 편지 뭉치들을 탁탁, 정리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은 그녀가 물었다.
“내게 원본을 보인 이유가 뭐야.”
“……글쎄.”
그녀의 시선이 정면에서 쏘아져 들어오자, 길리언은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뻔하지 않나.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이것을 갈취하기 위해서라도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그는 차마 뱉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제 속에 삼켰다.
* * *
황제의 알현실.
저를 따르는 대신들을 세워두고, 그곳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꼰 크레센트가 말했다.
“그래. 지시한 인물 중 포트, 에덴버, 체셔를 확보했다고.”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길리언이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예. 포트 공작은 전투 중 신변을 확보, 황제와 처우를 같이할 것을 바랐기에 현재 지하 감옥에 구금 중입니다. 에덴버 후작과 체셔 백작은 각 저택에서 신변을 확보, 호위 병력이 현재 저택 내에 머무르며 호위 중입니다. 하지만 크라이언트 백작은 애초 출타 중이었던 탓에 아직 신변 보호를 마치지 못했다는 보고입니다.”
“쯧, 골치 아프군.”
크레센트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그는 제 뒤에 서 있는 엘시어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나, 크라이언트 경? 이 난리 통에 누이의 안전만은 확보해서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2황자 직속의 기사 정복을 걸친 엘시어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말로는 신변 보호라고 하나, 사실 그것이 구속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인 백작은 탈출했다니 다행이었지만, 누이의 구속에 제가 어찌 작용했을지를 알 수 없으니 그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사실 처음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저는 인질이었다.
누가 봐도 황제파임이 명백한, 그것도 페리윙클과 대적해 귀족파의 한 축을 보내버린 그들을 무엇 하러 굳이 자신의 기사로 지명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에게는 유효한 거부권도 없었던 탓에, 그는 알면서도 이곳에 제 발로 걸어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에덴버 후작이 크라이언트 경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찌하실는지요?”
길리언의 물음에 크레센트는 손깍지를 끼고는 다리를 꼬아 앉으며 말했다.
“그래. 동생의 안위가 궁금하겠지. 분명 경도 그럴 거야. 그렇지?”
크레센트가 다시금 묻는 말에 엘시어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좋아, 경에게 외출 허가를 주지. 가서 누이와 안부 인사를 나누고 오도록.”
그러자 그가 궁내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와 있던 바로크 후작이 나섰다.
“전하. 재고해주시지요.”
“왜 그러지?”
그러자 바로크 후작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크라이언트 경도, 에덴버 후작도 각자의 충심을 보이기 위해서는 제 자리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표면적인 형식을 갖추기 위해 돌려 말했지만,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함부로 그들 남매를 만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든 피를 나눈 가족은 걱정되기 마련이지. 아무리 전시라고는 하나, 그것마저 품어주지 못한다면 내가 아버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나.”
그는 자신의 정당성이 인간성과 윤리에 있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상기시키고는, 뒤이어 명령했다.
“나를 도와 나라의 안위에 충성하는 나의 이복형제, 길리언 크렘벨. 나는 그의 공작으로서의 복권을 인정하며, 전시 상황인 지금 그를 수도방위군의 사령관으로 두어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후로 이 결정에 반발하는 자는 나라에 혼란을 야기하려는 자로 간주, 엄중히 조사할 것이다.”
그의 선언에 알현실에 있던 무리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고, 그렇게 반역자 크렘벨은 크렘벨 공작의 이름을 되찾으며 다시 정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크레센트 이스타지오의 지배 체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 *
출병 닷새째, 중간 병력 합류지인 바로크령.
수도 병력을 이끌고 내려간 케이든은 골치 아픈 상황에 맞닥뜨렸다.
“……바로크령에 정말 병사가 이것뿐인가?”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이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클라니 바로크의 답변에 케이든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바로크 후작은 노령으로, 그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는 클라우디스 바로크는 2황자의 기사라는 직함으로 인해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케이든과 함께 전투를 치르러 내려온 것은 바로크의 망나니로 소문난 오클라니가 되었는데, 그렇게 출정을 온 지금 그는 누가 듣는다면 제정신이냐고 물을 법한 말들을 지껄이고 있었다.
“……그대가 이 병력을 지휘해야 할 텐데. 그대의 병력조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총괄이 가능하겠나?”
“제가 말입니까? 전하께서 총지휘를 맡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나와 병사들 사이의 직위가 당연히 필요하지 않겠나.”
그는 아예 이야기의 핵심을 비껴 나가고 있는 오클라니에게 아이들 가르치듯 설명을 해 주었다.
그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기사들은 실소를 감추지 못했고, 오클라니는 그들의 비웃음을 눈치챘지만 당장 제 코가 석자였기에 눈만 부라리고는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그런 이야기는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기사 교육도 받지 못했고 말입니다.”
그는 제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줄 알았다면 2황자를 설득해 제 아들을 보냈을 것이라며, 한사코 저는 갈 수 없다 말을 돌렸다.
“기사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전장을 이끌어야지요. 저 같은 일반 귀족에게 그것이 어디 가당키나 하답니까? 이를테면, 그래…… 거기 코엔하임 경이라든지 말입니다.”
그는 케이든의 뒤에서 호위 임무를 서고 있는 모리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경 같은 이들이 적임자 아니겠습니까.”
“코엔하임 경은 폐하께서 보내주신 내 직속의 수도군을 맡을 예정이고.”
케이든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자, 오클라니는 위기감이라고는 없이 입을 열었다.
“어떤 기사이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전하께서 적임자를 가려 보내주시지요. 어차피 상대가 정확히 바덴으로 올지 아닐지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운이 좋지 않아 그들을 직면하게 된다고 해도 적당히 대치 상태만 유지하면 그만 아닙니까.”
썩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의 말을 달가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케이든은 이마를 짚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사 수가 부족하군. 이대로 전면전이 된다면 가망이 없다. 척탄 병기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하지.”
그녀가 있었다면 이렇게 혼자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이런 곳에 같이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너무나 막막한 상황에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슬픔도 공존하는 양가적인 속내.
하지만 어떻게든 지켜내 보이겠다고, 케이든은 생각했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가 그녀의 손에 행복을 쥐여 주리라고.
이미 한 번 아픔을 겪어본 그녀이기에 더욱 조심스럽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