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93화 (93/128)

<93화>

케이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뒤늦게 출발한 병력은,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에 도착하거나 미처 때를 맞추지 못하겠지요. 만일 중간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 한발이라도 늦었다간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엘렌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확실히 자신은 황태자의 목숨을 가장 중히 여겨 그리 말했을 뿐, 진정으로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렇지요? 백성의 목숨을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케이든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 만일 직접 가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이 다시금 선득하게 그녀의 속을 긁어내리기 시작했다.

알고는 있었다.

그가 꽤나 좋은 군주가 될 것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로서도 이런 자신이 당혹스러웠다.

그를 잃는다면, 다소 뼈아프긴 하겠지만 아마 황제와 거래를 해 살아남든 나름 미끼를 뿌리든 크레센트의 줄을 잡든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를 잃기라도 하면 자신은 분명, 어딘가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참 낯설게도.

엘렌은 혼란스럽게 쿵쾅거리는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아무리 너나 할 것 없이 협력해야만 하는 전쟁이라지만, 귀족파 소굴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전하께 무언가 계략을 꾸미기라도 한다면…….”

그래.

그를 잃었다간 여러모로 다시 불안한 입지를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그건 자신으로서는 너무나도 비효율적이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게다가 그는 인간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누가 되었든 그를 아는 이라면 그의 죽음을 슬퍼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이건 그를 의지하거나 그에게 어떤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래 지켜본 동료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다.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크와 함께하는 것이 불안할 테지만, 그대가 포섭해놓은 오스틴 또한 함께하고.”

케이든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모든 게 그대 덕분입니다. 내게는 너무 과분했어요.”

하지만 엘렌이 별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정면에서 눈을 마주쳐 왔다.

그렇게 눈에 담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곧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엘렌. 엘렌 에덴버.”

“……네.”

그녀의 대답에 케이든은 무어라 말을 이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내가.”

무언가 망설여지는지 그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이고, 긴장한 듯 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무엇인가 말할 듯 한참을 뜸들이던 그는, 곧 체념하듯 설핏 웃고는 이어지지 않는 감상으로 말을 돌려버렸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한동안은 그대를 볼 수 없겠군요.”

애달픈 미소. 무언가 혼자서 정리해 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미안합니다. 그대에게는 약속을 잊지 말라 당부한 주제에, 정작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뒤로해 버려서.”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저 남자가 삼킨 말은 무엇일까. 대체 무슨 말을 담아두었기에 저리도 슬픈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그의 뒷말을 따라가던 엘렌의 생각이, 이어지는 케이든의 말에 끊겨 나갔다.

“다만 나는 나인 동시에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역할을 위해 난 지금껏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미안합니다.”

그의 사과에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맞는 이야기고, 약속 운운하려면 일단 저도 한 방 내어드린 게 있으니까요.”

엘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도 힘닿는 데까지는 도와보겠습니다. 제가 무얼 얼마나 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케이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이젠 정말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생겼으니.”

“저 또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세요.”

어차피 가는 사람, 웃으며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엘렌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케이든은 짙은 애상감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곧장 출정 준비를 시작할 겁니다. 아마 이게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요. 그러니…….”

“그러니?”

그가 또다시 말꼬리를 흐리자 엘렌이 물었다. 그런데 그는 제멋대로 말을 끝내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이번 한 번만, 봐 주십시오.”

그녀의 뺨에 단단한 가슴팍이 닿았다. 동시에 강인한 팔이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전하……?”

“반드시 잘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 무사히 있기를.”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사람의 체온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그는 엘렌의 귓가에 더운 숨결과 함께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고는 천천히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약간의 두려움과 애상감, 그리고 묘한 충족감이 복잡하게 서린 얼굴.

그런 그의 얼굴에 괜히 가슴이 저렸던 엘렌은 제 가슴께를 다시 꽉 쥐어 눌렀다.

혼란스러웠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어렸던 날의 바보 같은 일 따위는, 다신 반복하지 않으리라.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께서도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기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최우선은 언제나 가족들.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엘렌은 자신을 다시금 다잡았다.

* * *

갑작스레 준비하게 된 전쟁으로 이스타지오 전역에는 또다시 불안한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아카데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기사학부 졸업생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어느 영지로든 소속이 결정되었고, 그들은 모두 일정을 당겨 미리 이동하게 되었다.

그것은 올해 기사학부 졸업예정자인 엘시어 크라이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본래 돌아가려던 크라이언트로 갈 수 없게 되었을 뿐.

“예? 2황자 전하께서 말입니까?”

엘시어가 놀라 물었다.

그러자 소식을 전한 당사자인 아덴 교수가 양손으로 엘시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염려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황실 기사라니 자랑스럽구나.”

“하지만 교수님, 저희는 2황자 전하와는 오히려 적대 관계에 가까운데……!”

그러자 아덴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2황자 전하의 옆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네가 전장으로 가지는 않을 것 아니냐.”

“하지만…….”

“부름을 받은 이상 거절은 어렵다. 네가 정말 영지에만 있을 것이라면 모를까, 이제 크라이언트는 그래도 되는 가문은 아니게 되었잖니.”

교수가 엘시어와 지그시 눈을 마주치며 당부했다.

“황실에 대한 불충으로 보일만한 요소는 피하는 것이 좋다. 태자 전하께서도 분명 너를 살피실 테니 일단 네 안전만 생각하자꾸나.”

“……네.”

누님과 메이의 세상에, 이제 나도 발을 들이게 되는 건가.

엘시어는 저도 그 폭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엘렌은 엘시어의 지명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애의 안전을 빌미로 내 발을 묶어 놓을 작정인 거야.”

그녀는 발이 아플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구둣발로 성큼성큼 걸어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가자 제이시가 급하게 뒤따라 나가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크레센트 황자에게.”

벌컥, 문을 열어젖힌 엘렌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물어야겠어.”

* * *

모두가 분주한 와중, 묘하게 이 흐름에서 비껴나 있는 듯 황자궁은 조용했다.

조용한 궁의 복도에 드문 여성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에덴버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 너머에서 크레센트의 허가가 들려오자마자 엘렌은 쾅,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그녀를 맞이하는 크레센트의 모습은 아주 여유로웠다.

회의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크레센트는 이렇게 직접 황자궁까지 와서야 비로소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분초를 다투고 있는 와중 그만이 어딘지 모르게 느긋해 보였다.

묘한 꺼림칙함에 엘렌은 불길함을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전하. 엘렌 에덴버입니다.”

그녀의 인사에 크레센트는 굉장히 나긋한, 누가 봐도 호의적인 얼굴과 목소리로 말했다.

“에덴버 후작. 오랜만이군. 아마 내가 이리 부르는 건 처음이지?”

그의 인사치레에 엘렌은 속이 달아 다급해지려는 것을 꾹 참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리 들으니 더욱 새삼스럽군요.”

“그래. 나로서도 놀라워. 그래서 나는 이렇게나 그대를 신경 쓰고 있지. 그대가 나를 찾아온 이유도 미리 짐작해 보고 말이야.”

천연덕스러운 그의 말에 엘렌의 입가에 꾸욱, 힘이 들어갔다.

“영제의 근무지 때문에 나를 찾아왔을 거야. 그렇지?”

“……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여쭈어야겠습니다.”

“후작. 이건 전쟁이야.”

그는 엘렌에게 가까이 다가가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 숙여 속삭였다.

“형님은 전장으로 갈 거야. 그런데 형님 밑으로 가기라도 했어 봐. 영제가 어떻게 되겠나?”

“그 애는 영지로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전하.”

“그리고 크라이언트의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겠지.”

“아닙니다. 그 애는 영지의 일을 배울 예정이었지요. 황궁 기사직은―”

“아카데미 기사학부를 졸업해 제반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도, 이 전쟁통에 그저 영지에 처박혀 내부 행정 따위나 배우겠다고?”

크레센트가 두 팔을 들며 역정을 내듯 말했다.

“그런 귀족을 누가 믿고 따르겠나? 가신들을 직접 이끌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뒤에 숨어 펜만 잡고 있는 이를 누가 따르겠냐는 말이야.”

“…….”

정말 짜증 나게도, 그의 말에는 이렇다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확실히 일반적으로는 크레센트의 지적이 맞는 말이었다.

그녀로서는 크라이언트의 가신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이야 동생은 그저 감싸고 싶을 뿐이고, 그들의 이름을 달고 출정하게 될 기사와 병사들은 어쩌면 그의 말처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로 숨는 것을 미학이라 가르치는 곳 따위는 없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