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로부터 약 30시간이 지나, 이틀 뒤.
트리발로스의 출병 소식이 들려왔다.
황실 쪽으로 들어온 소식은 곧 수도의 고위 귀족들에게로도 퍼져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내려온 소집령에 그들은 모두 서둘러 채비해 황궁으로 향했다.
“그대들도 이야기는 들었겠지.”
황궁의 회의장. 황태자를 비롯해 모여 있는 공후들에게 헤지스가 말했다.
“트리발로스가 오네. 말미가 얼마 남지 않았어.”
회의장에는 커다란 지도가 놓였다. 그는 남쪽 해안을 죽 가리키며 말했다.
“해상으로 온다고 하니 이쪽 남부가 위험하네. 당장 시간 내에 움직일 수 있는 무력은 얼마 되지 않아. 그대들의 용단이 필요하네.”
그러자 사전에 이야기된 바대로 포트 공작이 나서서 말문을 열었다.
“남부의 경우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비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영지의 일로만 넘기면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 영지의 일로만 넘기면 안 된다.
그 말인즉 주변 영지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야기의 화살이 남부로 튀자, 남부령의 중심축인 트라이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최대한 막아보기는 하겠으나, 남부에서 힘을 쓸 수 있는 영지가 몇 되지 않아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합니다.”
트라이아의 말은 갈 때 가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역시나 싶었던 헤지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 어떻게 할지, 그것을 논했으면 하네.”
그는 피곤한 얼굴로 포트 공작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차린 포트 공작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남부에서 그들이 상륙할 만한 곳은 얼마 없습니다. 트레버나 바덴, 리넥스 정도일 듯하니 서둘러 그곳으로 병력을 모은다면 상륙 자체를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야기를 듣던 바로크 후작이 곧장 나서 반박했다.
“세 군데 모두에 말입니까? 그렇다면 해상 방어는 무리일 듯한데, 그렇다고 그곳들이 지상 방어가 효율적으로 가능할 만큼 화기가 충분한 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후작. 부족한 화기는 채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우선적으로 주변 영지에서 병력과 함께 차출하면 됩니다.”
포트 공작의 주장에 트라이아 공작과 바로크 후작의 눈이 마주쳤다.
트라이아 공작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그 ‘주변 영지’에 제가 들어가는 듯한데, 저는 군사를 차출해도 될 정도로 영지 사정이 좋지 못합니다.”
누가 들어도 괜한 전쟁에 제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가만히 흘러가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말했다.
“여유가 넘치는 영지는 어디에도 없지 않겠습니까.”
회의장에 홀로 울리는 여린 목소리가 유독 가늘었다. 그것이 어색했던 모양인지 트라이아 공작이 흠칫 놀라며 옆을 쳐다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엘렌을 겨냥해 말했다.
“제가 알기로 크라이언트령이나 에덴버령이 그리도 풍족하다던데.”
“……아쉽게도 에덴버는 본래 치안대 외에 영지 주둔군이라는 개념이 없던 곳이라.”
엘렌은 기분이 나쁜 것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반응에 살짝 의아함을 느꼈다.
‘원래 회의에서는 이렇게 공격적인가? 내게는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거칠게 나오는 모습이 예상과는 달랐지만, 그녀는 일단 말을 이었다.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서 2차, 3차 지원 때는 참여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라이언트는 당장 출발해도 기한을 맞출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요.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아닙니까. 나라의 일인 만큼 모두가 최대한 참여할 겁니다. 그래야만 하고.”
대화를 듣고 있던 케이든이 그녀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자 적당히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 아발란쉬 후작이 나섰다.
“근처 영지들에서 조금씩만 차출하지요. 리넥스는 오세먼과 이제 황실에 귀속된 페리윙클령에서 보내고, 바덴에 바로크와 오스틴, 트레버에는 제가 갈 수 있으니 트라이아에서 차출해 주시면 될 듯하군요.”
그러자 트라이아 공작이 발끈해서 외쳤다.
“말씀을 쉽게 하시는데, 그 영지들 중 이번 재해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여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저라고 여유로워서 가능하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지금 무리하게라도 막아내는 것과, 영지 사정을 챙기다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비교해 보았을 뿐이지요.”
그러자 그들의 언쟁을 듣고 있던 바로크 후작이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1차 2차로 나누어 병력 체계에 혼선을 주기보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 짜서 대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다간 오합지졸이 될 겁니다.”
“일단 그들이 지상에 오른다면 여러모로 까다로워질 텐데요. 초반에 빨리 가서 상륙 시에 피해를 많이 입히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데.”
포트 공작이 끼어들어 말했다. 그러자 자꾸 의견이 충돌하는 것이 답답했는지 트라이아 공작이 외쳤다.
“군사를 차출해도 될 정도로 영지 사정이 좋은 이들은 북부에 있습니다. 남부에서 이 영지 저 영지 되는 대로 대충 긁어모으면 잘 될 것 같습니까? 우왕좌왕하다 각개격파 당할 가능성만 높아질 겁니다!”
북부를 들먹이는 그의 발언에 엘렌이 말했다.
“그렇다고 공들께서 가만히 눈만 뜨고 계시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문제가 목전에 닥친 게 누구인데.”
그러자 트라이아 공작도 외쳤다.
“뭐라고? 모두 이 나라의 일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저희 북부에서는 오늘의 결론이 어찌 되든 최대한 빨리 준비해 내려올 생각입니다. 아마 공께서도 그러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트라이아 공작의 말문이 막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케이든이 말했다.
“그래요. 모두의 일이니 각자 영지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덜 가도록 미리 내려가서 전선을 유지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들의 상륙을 막는 게 우선이야. 그러니 이렇게 하지.”
헤지스가 슬쩍 상황을 정리했다.
“트레버에 아발란쉬와 트라이아. 바덴에 바로크와 오스틴, 리넥스에는 오세먼을 보내 페리윙클령의 인원을 빼 갈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하지만 폐하. 정말로 저희만으로는―”
“알고 있네. 모든 걸 한 번에 감당하라는 게 아니야. 일단 입구만 막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군들이 속속들이 도착할 걸세.”
헤지스의 말에 트라이아 공작이 불만을 완전히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
“곧장 원군을 보내겠네. 그러니 트라이아 공.”
“예, 폐하.”
“이 전쟁의 사령관은 그대가 맡아주게. 앞으로는 빠른 대응을 위해서라도 전선 근처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해. 남부의 사정은 그대가 가장 잘 알겠지.”
그러자 트라이아 공작은 결국 올 게 왔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맡겨주신 것은 영광이지만 제가 끌고 갈 수 있는 병력은 얼마 되지 않고, 무엇보다 서부 전선에 있으면서 남동부까지 컨트롤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놓고 나온 거절에 헤지스는 곤란한 기색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러면 바로크 후에게 맡겨야 하는가? 하지만 바로크 후작이 전선에 직접 나서기엔…….”
그러자 헤모니 바로크가 말했다.
“예. 그것도 그렇고, 트라이아 공을 제치고 제가 나서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그들이 거절하며 뻗댈 것이야 어차피 알고 있던 것. 지금까지는 ‘역시나’일 뿐, 그다지 당혹스러운 일은 없었던 헤지스의 표정이 굳었다.
트라이아의 위로는 적어도 동급인 공작이나 황족밖에 없었는데, 포트 공작은 지금 수도에서 반역에 관한 일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황족뿐.
“저희의 명운을 태자 전하께 맡기고자 합니다.”
바로크 후작과 케이든의 눈이 마주쳤다.
* * *
뚜벅뚜벅. 회의장 밖을 나서는 발걸음 소리 뒤로 빠른 구두 소리가 울렸다.
“전하. 정말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엘렌이 케이든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녀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엘렌의 목소리에 묻어난 분기를 고스란히 읽어낸 케이든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그다지 내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왜 순순히……!”
엘렌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폐하. 병사들을 비롯해 모든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적임자는 바로 태자 전하십니다.]
[뭐? 태자를?]
[큰 위기를 지략으로 몇 번이나 넘기신 전하십니다. 황실의 적손이시기에 더더욱 모든 이가 믿고 따를 것입니다.]
[전쟁터에 황실의 적손을 내보내라는 소리를 하는 겐가, 후작!]
그런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케이든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한 마디를 물었다.
[……바로크 후작. 그대는 나의 지휘 아래에 그대의 군사를 맡길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내가 가지요.]
엘렌은 그 소리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물론 놀라서 그를 쳐다본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케이든!]
[폐하. 한시가 바쁜 때입니다. 모두 힘을 모아야지요.]
케이든은 크게 뜨인 엘렌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게 내 의무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전하의 의무는 그뿐만이 아니지요. 게다가 전하뿐만의 의무도 아니고요!”
엘렌이 케이든의 옆을 빠르게 따라가며 대꾸했다.
“이건 실수하신 겁니다. 분명히 이걸 기회로 옳다구나 달려들 텐데! 전 전하의 옆을 지킬 수 있는 기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케이든은 오히려 담담히 말했다.
“맞습니다. 나만의 의무는 아니지요. 하지만 가뜩이나 귀족파에서 여러모로 부담하는 게 많은 전쟁이 되었는데, 크레센트를 보내려 한다면 그들이 쉬이 수긍하겠습니까.”
“그래도 정말 급박한 것은 그들이에요. 조금 더 아슬아슬할 때까지 고삐를 쥐고 있었으면 복종했을 거라고요!”
그렇게 싸워서 얻어내야만 하는 게 정치인데!
엘렌은 정말 속이 터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