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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91화 (91/128)

<91화>

“아, 그리고 이번에 졸업하는 아카데미 학생들 중 에덴버로 데려올 이들을 선별하는 것도 잊지 말고.”

“무엇을 우선으로 수행할까요?”

“말한 순서대로.”

“네. 알겠습니다.”

마린이 엘렌의 지시를 재빠르게 받아 적었다.

엘렌은 이만 지시를 마치려다, 뒤늦게 생각난 사실 때문에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직원들 중 남부에 가족이 있는 이들에게 모두 보너스라고 하고 수도의 크라이언트, 아니, 에덴버 저로 초대한다고 해. 트리발로스 출병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게 말이야. 내가 작위를 승계한 기념으로 파티라도 연다고 하든지.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 다들 긴장 놓지 말고, 부탁하겠네.”

엘렌은 그 말을 뱉기가 무섭게 발걸음을 옮겼다.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략 위험이 적었던 남부령들의 경우, 제대로 성을 지어 성내 도시를 구축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곳들이 많았다.

드넓은 농지를 모두 성안에 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때문에 성 바깥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미래.

어디로 들이닥칠지도 명확하지 않은 미증유의 사태에서, 그녀는 제 사람들을 지켜내야만 했다.

* * *

히히힝―!

분주한 가도를 뚫고, 에덴버가의 마차가 두두두두 격한 소리를 내며 바퀴가 부서져라 달렸다.

에구머니!

세상에, 저거 완전 서커스 아냐!

여보, 조용히 해요! 에덴버 후작 각하의 마차잖아요!

어이쿠! 설마 들린 건 아니겠지?

쌩하니 지나가는 마차의 뒤로 옆에 새겨진 문장을 미처 보지 못한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렌은 곡예에 가까운 기예를 부린 마부에게 고생했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마차에서 내려 황궁을 향했다.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기에 ‘폐하의 알현을 거절당하면 어쩌지’, ‘그러면 일단 태자 전하께라도 말씀을 드려야 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던 그녀는, 다행히 곧장 알현 허가가 떨어지면서 가슴을 한차례 쓸어내릴 수 있었다.

바로 알현실에 입장한 그녀는 황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엘렌 에덴버가 폐하를 뵙습니다.”

헤지스 이스타지오, 현 이스타지오 제국의 황제가 말했다.

“에덴버 후작. 세간의 화제를 휩쓸고 다니는 그대가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최근의 행보로 황제가 그녀의 가치를 높게 치기 시작했는지, 제법 불쾌할 법한 방문임에도 황제의 태도는 너그러웠다.

엘렌은 최대한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이야기하기로 했다.

“폐하. 제 정보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계신 바가 있을 줄로 아옵니다.”

“그렇지. 그대의 능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어. 내가 그대의 능력을 아주 높게 사고 있다는 걸 지금 그대도 느끼고 있을 테지.”

“예. 그리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폐하, 부디 놀라시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엘렌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곧 트리발로스의 침공군이 이 제국에 상륙할지도 모릅니다.”

“……뭐? 침공?”

그녀의 말에 헤지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느냐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재차 물었고, 엘렌은 차분히 뒷말을 이었다.

“예. 트리발로스의 해군이 출병했다고 합니다.”

“억측일세.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래, 이를테면 벨레니오스라든가.”

그의 말에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이스타지오로 출정을 간다며 말한 이가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었네! 이건 소국들끼리 치고받는 장난이 아니야!”

헤지스가 벌컥 외치며 일어섰다. 그러다 현기증이 났는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폐하.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네.”

후우.

헤지스는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반드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우리도 대비는 필요합니다. 대책은 미리 세워 나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아니길 바라는 만큼 대책도 확실히 세워야지.”

그는 혼자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포트, 아발란쉬, 크라이언트에 당장 사람을 보내라. 소집령을 내리고 지금 곧장 오라고 하도록. 그건 태자도 마찬가지다. 전부 당장 오라고 해!”

* * *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당연하게도 황궁이 제집인 케이든이었다.

그는 후다닥 달려와서는 갑자기 무슨 일이시냐며, 혹 길리언 크렘벨을 생포했다는 소식이 들어오기라도 한 것이냐며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헤지스는 별다른 말 없이 눈총만 잔뜩 날렸고, 케이든은 사람을 불러 놓고 이유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툴툴대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을 쾅,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엘렌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그는 조용해졌다.

다행히 별도로 수행하고 있던 일정은 없었던 모양인지 곧 다른 황제파 주요 인사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황제가 소집령을 내린 지 세 시간여.

필요한 인원이 모두 황궁 회의실에 모이게 되었다.

헤지스는 모아놓은 귀족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이리 불러 모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겠네. 질문은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나면 받지.”

다들 침공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지스는 한숨을 길게 쉰 뒤 입을 열었다.

“트리발로스가, 우리 제국을 침공하러 온다는군.”

“……예?”

다혈질 기질이 있는 포트 공이 새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러자 헤지스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정지 신호를 보낸 뒤 제 할 말을 이었다.

“질문은 내 말이 끝나면 하게. 이건 에덴버 후작이 제공한 정보라네. 트리발로스의 해군 150척이 출정에 나섰다는군. 정확한 행선지는 알 수 없으나, 이스타지오로 출정을 간다 말한 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네.”

“맙소사.”

크라이언트 백작, 다니엘 크라이언트가 저도 모르게 신음성을 뱉었다.

그는 얼른 제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눈알을 굴려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질문은 내 말이 끝나면 하게. 지도를 가져오지.”

헤지스가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시종이 지도를 펼쳐 주었다.

헤지스는 손끝으로 저희 제국의 최남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군이라고 하니 여기 남부에 먼저 상륙하게 될 게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남부에 영지를 가진 이가 없지. 그나마 아발란쉬 후작, 그대가 제일 남부에 가깝지 않나?”

“저와 포트 공의 영지가 그나마 가깝습니다.”

“포트 공은 지금 군사를 황도로 끌고 왔기 때문에 논외라네. 영지군이 상주 중인 이들을 대상으로 묻는 게야.”

“그렇다면 제가 맞습니다.”

“그대가 있는 서부로까지 들어가려면 반드시 남부를 거쳐야 하네. 이 나라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의 피해만이라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전선이 옮겨오기 전에 남부에서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정확하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주요 쟁점은 원군을 누구를 보내느냐가 되겠군요. 황도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기엔 요즘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해.”

헤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부로 군사를 뺐다간, 길리언 크렘벨이 도주한 지금 어디서 어떤 변수가 나타날지 몰랐다.

“그 말씀인즉슨 황제 군과 포트 군을 제외한 다른 군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

아발란쉬가 말끝을 흐리자 헤지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그 군사는 귀족파의 소굴에 가서 훌륭히 지휘를 해낼 수 있어야 하지.”

“허어…….”

이야기를 나누던 헤지스와 아발란쉬가 조용해졌다.

그러자 다니엘 크라이언트가 말했다.

“애초에 귀족파 쪽 인사를 보내시는 게 제일 낫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은 최선을 다해 끌 겁니다.”

“그게 또 쉽지만은 않네. 그들이 순순히 제 전력만 깎아 먹게 둘 리가 없지 않나.”

헤지스의 물음에 크라이언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 못마땅해할 테지만, 그게 효율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 사람을 보내더라도 그 밑에 그들의 군사가 있다면, 가장 먼저 희생양으로 내몰리는 것은 누구일지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헤지스는 마지못해 긍정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시종 ‘쉽지 않을 텐데.’라는 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자 대화가 잠깐 끊긴 틈을 타 포트 공작이 끼어들었다.

“당장 그들이 어디에 상륙할지도 문제지 않겠습니까.”

그는 펼쳐진 지도로 다가가 해안가를 손가락으로 쭉 훑으며 말했다.

“일부러 동쪽으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고, 남서부에서 정남부까지만 경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가 제안하자, 그것을 보고 있던 엘렌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항로 근처로 올 가능성이 높겠죠. 이를테면 프란체항 근처의…… 트레버라든가.”

그녀가 함께 준비되어 있던 조그마한 핀을 탁, 하며 꽂았다.

“그렇지요. 항구가 아니되 배가 상륙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으라면 트레버 말고도 리넥스나 바덴도 있고.”

“아, 그렇네요. 리넥스도 있었죠.”

탁, 탁.

연이어 꽂히는 핀들을 보던 케이든이 물었다.

“어쨌든 프란체항 근처가 유력하다는 겁니까?”

그러자 엘렌이 그에게 동부 해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지요. 일단 이런 동부는 너무 멀기도 하고, 그들은 육지의 정확한 환경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프란체 외에 이용해 본 항구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출병 자체가 기습적인 것을 보면, 계속 우리의 허를 찌르는 방향으로 오지 않을까 싶은데.”

케이든이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포트 공작이 말했다.

“전하. 상륙할 곳을 찾자고 육지를 끼고 도는 것은 발각 위험이 너무 큽니다. 자칫하면 견제로 인해 상륙조차 하지 못할 테니, 역시 평소 이용하던 프란체항 근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그런가.”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렌이 뒷말을 덧붙였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프란체항의 경우 기본적인 요격 무장은 갖추고 있으니 분명 그 근처의 다른 곳을 노릴 거예요.”

“그러면 예상되는 곳은 트레버, 리넥스, 바덴의 세 곳이라는 건데.”

톡톡,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제 팔을 두드리던 케이든이 말했다.

“그렇다면 좋든 싫든 그 바로 뒤편에 영지를 두고 있는 이들, 그러니까 오세먼, 오스틴, 바로크의 협력이 필요하겠군.”

그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픈지 제 뒷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진짜라면 앞으로 꽤나 피곤해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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