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길리언 크렘벨 공 귀하.
상의한 결과, 본국은 귀공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는 조건은 이렇습니다.
1. 공은 즉위 후 본국의 공주 키예프와 혼인, 황후에 봉할 것.
2. 본국과 우방국으로서의 동맹 서약을 할 것.
위 조건을 승낙한다는 전제하에, 본국은 귀공에게 1만의 군사와 그들에게 제공할 약 석 달간의 식량 및 보급품을 지원할 것입니다.
답장은 이틀 뒤, 서신을 전달한 인편에 들려 보내십시오.
모쪼록 현명한 결정 바랍니다.>
트리발로스에서 온 편지를 읽은 크레센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다시 접어 넣었다.
“정말 트리발로스까지 끌어들였군. 덕분에 확실히 수월하긴 하겠어.”
“하지만 타국의 힘까지 빌려 가면서 일을 벌이다니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클라우디스가 염려 섞인 말을 꺼냈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지? 확실히 위험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여러모로 적기인 것은 사실이다. 트리발로스의 도움은 큰 힘이 되겠지. 시류에 제때 올라탈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클라우디스.”
크레센트가 일갈하자, 제 의견은 수용되지 않을 것을 깨달은 클라우디스는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크레센트는 톡톡, 편지에 적힌 조항들을 두드리며 말했다.
“황후의 좌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군. 황후의 좌는 즉위 후 국내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써야 하는 패다. 대신 이클립스와의 혼인을 추진하겠다고 해. 적당한 인물로 신랑을 보내면, 공작위와 이클립스를 주겠다고. 우방국 동맹은 당연한 거고.”
클라우디스는 그가 말한 사항을 메모하다 말했다.
“이클립스 전하께서 반발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내가 알아서 해. 일단 그리 적어.”
“네. 알겠습니다.”
“조건을 수락한다면 곧장 출병을 시키라고도 적고.”
“네. 알겠습니다.”
“바로크와 트라이아를 비롯해, 주력 인사들에게는 연락을 돌려라. 조만간 통지가 돌면 곧장 출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 두라고.”
크레센트는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인지 서랍을 열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곱게 말린 담배의 끝을 탁, 잘라내고는 불을 붙여 숨을 깊게 내쉬었다.
“후우. 좋아. 길리언 크렘벨.”
제 이름이 불리자 길리언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네가 한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이제 파악했다. 네 행동에는 충분히 근거가 있었어.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묻지.”
“…….”
“네가 반역을 준비했던 명분은 뭐지?”
명분.
전쟁에 있어 명분은 중요했다.
사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지방에 머무르는 영주들의 입장에서 황제가 어떤 핏줄의 누구인지 같은 건 그다지 상관없는 사실이었다.
누구든 자신이 누리던 권리만 보장해 주면 된다.
다만, 자신이 섬길만한 명예를 갖추고 있다면.
섬기는 군주의 명예는 권속인 그들의 명예와 직결되었다. 그렇기에 땅을 짓밟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 분명한 내전을 일으킨 이유가 단순히 ‘권력을 위해서’ 따위였다간, 그는 명예롭지 못한 군주가 되어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전하께서 준비하신 명분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아쉽게도 그게 영 생기질 않아서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참이었거든. 키 카드를 가진 자를 내 손에 쥐었으니, 충분히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크레센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길리언이 낮게 한마디를 던졌다.
“제 명분을 빌려다 쓰시겠다, 라.”
“언제는 내게 한배를 탔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 말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길리언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것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뭐지? 나라도 엮여 있나?”
“……바로크 경을 증인으로, 초대 이스타지오의 이름과 크레센트 이스타지오라는 이름을 걸고 절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밝히겠습니다.”
무언가 큰 비밀이라도 있는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맹세까지 들먹이는 그의 말에, 크레센트는 하, 하는 비웃음을 내뱉고는 말했다.
“좋아. 맹세하지. 나의 시초인 초대 이스타지오와 크레센트 이스타지오라는 내 이름에 걸고, 그대가 나를 해하려 하지 않는 한 나도 그대를 해하지 않겠네. 됐나?”
그가 클라우디스 바로크가 있는 쪽을 쳐다보자, 클라우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클라우디스 바로크는 이 맹세의 증인으로, 제가 살아있는 한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입니다.”
“자, 이제 됐군. 빨리 말해. 뭐지?”
약식 절차가 끝나자마자 튀어나온 크레센트의 닦달에, 길리언은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후우.
길리언의 입술이 무겁게 열렸다.
“……저는 가장 먼저 태어나 버려진 현황 헤지스 이스타지오의 사생아이자, 그의 부덕의 소치이며, 그렇기에 그를 벌할 권리를 가진 자입니다.”
* * *
여느 때처럼 정보실에 앉아 커피와 함께 새로 들어온 소식들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그 사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한 엘렌이 수잔을 불렀다.
“수잔.”
“네, 사장님?”
“이건 분류가 확실한 건가?”
“네? 잠시만요. 확인해드릴게요.”
그녀는 엘렌이 건넨 것을 받아 갔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한 그녀는 편지를 다시 엘렌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 맞게 됐어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라기보다…….”
엘렌이 읽던 것은 트리발로스에서 온 소식.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들이, 다시금 군용 보급품들의 대량 발주를 넣었다는 이야기였다.
“당분간 트리발로스 쪽의 소식을 최우선으로 봐 줬으면 하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군용 보급품이라……. 저는 저번 전쟁으로 소모된 것들을 다시 채워 넣는 중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사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굉장히 신경 쓰이긴 하네요.”
“단순히 그런 거면 제일 좋은 거고. 어쨌든 앞으로 예의주시 좀 해 주었으면 해. 알겠지?”
“네, 사장님!”
수잔은 언제나 그렇듯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트리발로스.
육군의 저력은 이전 트리발로스-마그놀리아 전쟁으로 증명한 바 있는 국가.
그런 그곳에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그런 애매한 관계에 있는 나라인 이스타지오에서의 서신이 도착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원하는 대가를 줄 테니 동맹을 맺고, 반역을 도우라.’
서신이 요구하고 있는 지원도 그리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국경 근처에서 시간을 끌어줄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달라는 것.
그리고 상황이 바뀌면, 그 군사는 황성 함락에 쓰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정도에 대국 이스타지오에 침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꽤나 이득을 보는 장사였다.
이스타지오 황실에 그들의 피가 섞여들어 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들을 위한 정책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침 육로를 활용해 북측으로 진출하길 원하고 있던 그들에게 꽤나 매력적인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동북쪽에 위치한 이스타지오의 조력이 있다면 여러모로 진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계산에서 트리발로스의 해군이 움직였다.
그들이 재차 협상에 임하며 내건 조건은 ‘키예프 공주를 후궁으로라도 궁에 들일 것’과 ‘트리발로스의 귀족을 이클립스 이스타지오의 남편으로 맞이하고 그에게 공작위를 내릴 것’, 그리고 ‘동맹을 맺을 것’의 세 가지였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이길 택한 이들은 그런 트리발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것은 트리발로스 해군의 출병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급격한 물자의 흐름을 감지한 크라이언트 상회 트리발로스 지부는 곧장 고속정을 띄웠고, 트리발로스의 해군 출병 소식은 이스타지오로 실려 가게 되었다.
* * *
“사장님!”
수잔이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는 큰 소리로 엘렌을 불렀다.
“응? 무슨 일 있나?”
엘렌이 슬쩍 고개만 돌리며 묻자, 그녀는 쌓인 편지들을 분류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도도 달려와 제가 들고 있던 것을 엘렌에게 내밀었다.
“사장님, 사장님! 이거요!”
엘렌은 수잔이 내미는 것을 받아 들어 펼쳤다.
<트리발로스 해군 150척 출항. 행선지 이스타지오로 추정. 이스타지오로 출정 간다는 귀족이 있었음. 아직까지 본 지부에 대한 압박은 없음. 낌새가 이상하면 곧장 연락, 혹은 철수하겠음.>
“뭐?”
편지에 적힌 글을 본 엘렌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이건 말도 안 돼.
그녀가 넋을 놓고 종이만 쳐다보고 있자,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마린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수잔이 눈짓으로 엘렌이 들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그 눈짓을 따라간 마린이 종이에 써진 글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오, 맙소사.”
마린 역시 그만 외마디 신음을 뱉고 말았고, 그녀와 엘렌의 눈이 마주쳤다.
“이건…… 이건, 아니야. 선전포고도 없이 이럴 수는 없어. 이런 일은 없었다고.”
엘렌이 떨리는 손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갑자기 트리발로스가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해 온다고?
없었던 사건들이 생겨난 일은 많았다.
이를테면 엘시어의 마차 사고라든가, 그로 인한 페리윙클의 몰락이라든가.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리 선수를 쳐 빼앗아 온 사업들이나, 길리언 크렘벨의 반역 고발 등 바꾼 일들은 정말 많았다.
그렇기에 그만큼 새로이 닥쳐오는 미래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그 미래를 받아들일 각오 또한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느닷없이 타국과의 전쟁이라니……!’
엘렌이 패닉에 빠져 있는데, 마린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선전포고는 이전 마그놀리아와의 전쟁 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야만국인 게지요.”
그녀는 경멸의 눈빛으로 종이를 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던 수잔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지부 사람들은 정말 괜찮은 걸까요?”
“……글쎄. 일단 그렇게 적혀 있긴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지.”
엘렌이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러자 마린은 그런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정말 이스타지오와의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무사하기 힘들지.”
“제 아카데미 동기인 켈리가 그곳에 있어요. 무사해야 할 텐데…….”
수잔이 살짝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엘렌은, 한 번 심호흡을 한 뒤에 착착, 제 볼을 두어 번 치고는 말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당장은 우리 코도 석 자네. 탈출은 그들의 판단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생각해야 해.”
“네. 저희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트리발로스와의 전쟁이라니…….”
“일단 나는 전하께 가봐야겠어. 자네들은 당장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물자부터 파악해 주게. 아, 크라이언트령으로 서신도 보내주게. 연락이 가면 바로 출병할 수 있게끔 병사들을 준비시키도록. 에덴버령에도 같은 내용으로 사람을 보내.”
엘렌은 차근차근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