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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89화 (89/128)

<89화>

“……아발란쉬 영애도 알고 있던 걸 저만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군요.”

“사실 실감할 만한 무대가 없지 않았습니까.”

케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혹 기분이 상한 건 아니겠지.

엘렌이 싫어하기라도 할까 안절부절못하던 케이든은, 곧 이어진 그녀의 말에 온 얼굴에 미소를 활짝 피웠다.

“그럼 당부하신 대로 모두 알차게 잘 사용하겠습니다.”

좋아. 잘했다, 케이든.

웬일로 네가 말재간으로 이 사람을 설득했어.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은 자신에게 무한한 칭찬을 건넸다.

암. 이 사람이라면 응당 이 정도의 물건은 갖춰 두어야 하는 법이지.

그는 저 혼자 신이나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택의 최소 인력은 모두 뽑아두었다지만, 황실 인력들이 직접 와서 관리하는 것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는 그런 걱정 따위 없었다.

허구한 날 문화 강자네 어쩌네 하는 말로 씨부렁대는 트라이아의 저택도, 유구한 가문의 전통이 어쩌네 하며 거들먹거리는 바로크의 저택도 이 에덴버 저만은 못할 것이다.

그는 ‘엘렌 에덴버는 책임감에 약하다’라는 문구를 제 마음속 메모장에 써넣고는, 저택의 내부도 직접 확인해야겠다며 냅다 저택으로 돌진했다.

* * *

자신이 선물한 소파 위에 앉아, 자신이 선물한 황실 장미 문양의 찻잔에 담긴 홍차를 마시던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마이어스와의 약혼 소식을 들었습니다. 영제의 약혼 미리 축하드리지요.”

“말씀 감사합니다. 엘에게 전할게요.”

가볍게 인사를 건넨 엘렌이 잔에 그려진 꽃무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화려하고 질 좋은 꽃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러자 케이든이 냉큼 물었다.

“꽃을 좋아합니까?”

“네? 아, 물론 좋아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라, 곧 동생의 약혼식이니까요.”

아.

동생의 약혼식.

살짝 김이 새고 말았던 케이든은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런데 예비 신랑 측에서 갑자기 꽃은 왜 찾는 겁니까?”

마시던 찻잔을 살포시 내려놓은 엘렌이 무언가 좋았던 일을 떠올리는지 슬쩍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비 신부 될 사람에게 고마웠던 일이 있어서요. 축하 선물을 꼭 해 주고 싶은데, 현물은 부담스러우니 받지 않겠다네요.”

“아, 그래서 꽃을?”

“네. 식에 쓰일 꽃과 드레스는 제가 준비해 주고 싶은데, 저희가 화훼는 안 해서요.”

그 말을 들은 케이든은 생각했다.

오늘은 무언가 확실히 되는 날이라고.

그는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제자리에 붙잡으며 말했다.

“황실 정원은 언제나 최고급으로 관리되지요. 그대가 괜찮다면 크라이언트의 경사에 나도 한 손을 보태고 싶은데. 안 되겠습니까?”

“전하께서요?”

엘렌이 깜짝 놀라 묻자, 자신이 너무 앞서나갔던 건가 싶었던 케이든이 허둥지둥 변명을 덧붙였다.

“처남, 아니 그러니까, 그대의 동생이지 않습니까. 나로서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기도 하고, 경사는 나눌수록 커진다고도 하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가 벌게진 얼굴로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횡설수설했다. 그러자 그것을 한참 지켜보던 엘렌이 웃음이 터져서는 말했다.

“물론이지요. 외려 저희는 감사할 따름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케이든도 덩달아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 너무 예쁘잖아.”

“네? 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케이든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멍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방금 입으로 말했습니까?”

“네. 제 외모 칭찬을 하셨습니다.”

“……아.”

외마디 신음을 뱉은 케이든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지더니, 곧 눈 둘 곳을 모르고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정처 없이 헤매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것인지 흠흠, 괜한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그, 민망했다면 미안합니다.”

“저도 제가 나름 미인 소리 듣고 산다는 것은 잘 알아서요. 민망하진 않답니다.”

엘렌은 오히려 픽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뭐가 되었든 일단 칭찬은 좋지 않나요? 예쁜 건 사실이고.”

그 당당한 태도에 저 말이 진심인가 생각하던 케이든은, 잠시 뒤 이내 웃음이 터졌다.

“그렇지요. 사실이지요.”

환한 미소로 대답하는 그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달콤한 행복이 뚝뚝 떨어졌다.

저 당당한 태도를 보라. 참 잘나고 멋진 여자다.

실제로 예쁜 것도 맞고, 고마웠던 일은 기억해뒀다 꼭 돌려주려는 모습도 믿음직스럽다.

“좋아한다고 하니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많이 들려줘야겠습니다.”

앞으로는 이걸 핑계로 하고 싶은 말들을 더 뱉어야지.

그렇게 부슬비에 옷깃이 젖듯 스며들어, 나중에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봐 주었으면 좋겠다.

당장의 목표를 같이하는 동료보다 조금 더 깊은 관계가 되었으면.

‘그래서 당신에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이 되었으면.’

그는 환한 웃음 아래 제 마음을 담았다.

* * *

“어서 오게, 로널드!”

“오, 그레이. 좋은 날이라고 얼굴이 활짝 폈구먼그래.”

“암. 기쁜 날이지.”

마이어스 백작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오늘은 마이어스 백작가의 여식, 모니카 마이어스의 약혼식이 있는 날.

식은 양가의 합의하에 신부가 될 모니카의 친가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마이어스가의 제안에 생각해 보겠다며 대답을 보류했던 크라이언트가는, 엘시어의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혼담을 받아들이겠다며 답을 주었고,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제가 마이어스 영애와 혼인이라고요? 제가요?]

[너도 결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오, 마이어스 영애라니. 영애는 허락한 겁니까?]

[영애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하더구나. 너와 혼인하고 싶다고 말이야.]

[저저, 저랑! 저를 콕 집어서요?]

[이놈이, 말본새하고는. 그렇다면 어찌하겠느냐?]

[잘해줄 겁니다!]

양가 당사자들까지 흔쾌히 승낙한 마당에 곧장 혼인을 치렀어도 되는 일이었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조금만 더 자유를 주자며 어른들의 합의하에 약혼부터 진행했다.

사실 약혼쯤이야 굳이 거창하게 식을 거행하지 않는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 결합의 목적은 황제파 세력의 확대를 광고하는 데 있었기에, 그들은 일부러라도 날을 잡아 화려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물론 상대적으로 잃는 게 많은 쪽인 마이어스가에는 많은 고민이 따랐다.

현 마이어스 백작인 그레이 마이어스는 제 오랜 친우인 로널드 아발란쉬를 찾아가 물었다.

[이보게, 론.]

[응? 갑자기 무슨 일인가, 자네가?]

[자네는 최근 전향했으니 나보다는 잘 알 것 같아서 묻네만, 크라이언트는 좋은 혼처인가?]

갑작스레 찾아온 친우가 냅다 던지는 물음이 당혹스러워 아발란쉬 후작은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밝히길, 사실 마이어스와 크라이언트 사이에 오갔던 혼담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 말하는 마이어스 백작은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반역이니 뭐니 뒤숭숭한 때라는 게 이 결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데도, 반대로 망설이게 만드는 데도 크게 한몫을 한 것 같았다.

로널드 아발란쉬는 제 친우를 조금 안심시켜 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론. 중립이라는 안전지대를 포기하고 그 각축장에 뛰어들만한 가치가 그들에겐 있을까? 내 딸애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자네도 보았으니 알지 않아. 적어도 그 가문의 영식은 타인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네. 그건 가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남편으로서는 높이 칠 만한 덕목이지.]

[가주로서라……. 크라이언트 영애가 나간 그 가문은 과연 얼마나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

[걱정은 이해하네만, 에덴버 후작이 제 가문을 몰락하게 두지 않을 게야. 나 또한 자네의 딸을 외면할 리가 없고 말이야.]

[……고맙네.]

[무얼. 좋은 소식 들려오길 기다리겠네. 모니카의 행복을 빌지.]

그렇게 모니카 마이어스와 엘시어 크라이언트의 약혼이 결정되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마주한 크라이언트 일가는 생각보다 사이가 돈독했다. 과연 에덴버 후작은 제 친정을 나 몰라라 할 것 같지가 않았고, 무엇보다 그들은 이 결혼을 충분한 존중과 함께 대했다.

[고운 따님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백작.]

[마이어스 영애라면 일전에 황실대회에서 뵌 일이 있답니다. 담력도 있고 자신감도 넘치고 좋은 분이셨죠. 우리 엘에겐 과분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답니다.]

[엘시어 크라이언트입니다. 자, 잘해드리겠습니다!]

마이어스 백작은 제 결정이 그래도 틀리지는 않았다며 안도했고, 그 안도는 제 건너편 크라이언트 측의 하객들을 관찰하며 점점 커져, 불안했던 가슴이 어느새 설렘으로 차기 시작했다.

인사를 받고 있는 마이어스 백작의 반대편, 마찬가지로 서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부녀는 열심히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얼굴이 아주 훤하십니다.”

“허허, 요즘 경사만 자꾸 겹치니 그런 모양입니다. 제가 아주 살맛이 나지요.”

“하하, 부럽습니다. 마이어스와의 약혼 축하드립니다.”

다니엘의 얼굴은 그야말로 활짝 피었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와 눈도장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사람들의 행렬은 엘렌이 있는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후작 각하. 크라이언트와 새로이 연을 맺게 되는 곳이 마이어스였군요. 축하드립니다.”

”영제의 약혼 축하드립니다.”

“어머, 고마워요.”

“세상에, 식장이 너무 예뻐요. 이 꽃이 모두 태자 전하와 각하께서 직접 고르신 거란 이야기가 있던데.”

“그렇답니다. 감사하게도 전하께서 신경을 써 주셨지요.”

“영애가 정말 기뻐했겠어요.”

“성공적인 선물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아이참, 부러워라!”

중립파를 지키던 아발란쉬 후작이 무거운 몸을 움직이고, 그와 함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던 마이어스 백작마저 황제파의 손을 잡았다.

이것은 그 소식만으로도 많은 이들을 불러 모았고, 중립에 머무르며 눈치를 보고 있던 이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눌러주는 누름돌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내에서의 이야기일 뿐.

그들의 동맹은 트리발로스와의 연락까지 늦춰 주지는 못했고, 그날 저녁 황자궁에는 비밀스러운 편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정복 전쟁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트리발로스의 서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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