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클라우디스 정도로 그녀가 만족을 할는지 모르겠군. 이제 그녀는 궁내 직책을 맡지 못했다 뿐이지, 명실상부한 중앙 귀족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야.”
길리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크레센트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전남편인데 좀 더 축하해 줘야지. 어쨌든 대단한 일이잖나.”
“……그렇지요. 대단한 일입니다.”
길리언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지. 전남편을 팔아서 얻은 작위라니 정말 대단하지.”
짝, 짝, 짝.
크레센트가 천천히 박수를 치며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킥킥대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정면만 쳐다보는 길리언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표정이 썩 좋지 않군. 자존심이 상하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나라면 억울하고 괘씸해서 잠도 못 잤을 텐데 말이야.”
크레센트는 길리언을 자극하는 것이 목적이기라도 한 듯 그가 거슬려 할 만한 말을 계속해서 뱉어내었다.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 않나? 넌 내게 탈출시켜 달라고 했을 뿐, 그 이상의 부탁은 아무것도 하질 않아.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그게 현실이니 말입니다.”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길리언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가 제 예상과 달리 조용하자 크레센트는 싫증이 났는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어쨌든 우리는 그녀를 저대로만 둘 수는 없는 게 사실이고. 확실히 우리 편으로 끌어오든지, 그게 안 된다면 완전히 발을 묶어 두어야 해.”
“그게 가능하다면야 그렇지요.”
“그럴 만한 강력한 한 수 같은 건 없나?”
방금까지 장난과 비아냥을 넘나들던 그의 눈이 돌연 번뜩였다.
길리언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얘길 꺼내려고 그렇게 속을 긁었군.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성질을 돋워대기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더니, 결국 엘렌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그는 한숨을 뱉듯 말을 토해냈다.
“……그걸 알았다면 저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지 않았겠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겠어.”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크레센트를 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크라이언트 영식이 이제 졸업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 애를 내 기사로 둘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반감을 살 겁니다.”
길리언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엘렌이 얼마나 제 동생을 아끼는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동생의 일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어떻게든 방법을 구해 달려들던 여자다.
당장 얼마 전에 있었던 마차 사고 건만 보더라도 그랬다. 누구도 페리윙클을 그렇게 완전히 무너뜨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기어코 그리 만들지 않았나.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예상을 뛰어넘는 집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왜지? 그녀는 어차피 나와 형님 사이에서 저울질 중이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형님한테 넘어갈 수 없는 이유만 만들어주면 충분한 거 아니겠나.”
“그건 제약은 될지언정 포섭의 수단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건 네 경험에서 나온 조언인가?”
“……페리윙클을 지켜본바 내린 결론이기도 합니다.”
“흐응.”
크레센트가 턱을 괴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의 태도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동업자였다. 황자가 엉뚱한 방향으로 갔다간 저 역시 부활의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침몰하는 수가 있었고, 그렇기에 길리언은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은 당근을 던지실 때입니다. 그런 행동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 묻지. 당근이라 함은?”
아마 크레센트가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자신도 몰랐다.
“글쎄요. 그걸 알았다면 제가 진작에 크라이언트를 다시 쥐었을 것 같습니다.”
길리언이 고개를 젓자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클라우디스가 넌지시 한 마디를 꺼냈다.
“……어쩌면 전하께서 직접 나서서 혼인을 제안하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혼녀를?”
크레센트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내 위신이 있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제 그녀가 올라갈 곳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후작위를 얻은 사람에게 후작가 영식에 불과한 남편이라니요. 분명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크레센트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그건 안 돼. 형님의 옆자리가 비어있는데 내 옆자리만 채워서는 곤란하지. 이건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내 미끼야. 이혼녀 따위에게 줄 자리가 아니라.”
결정을 바꾸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클라우디스는 표정이 미묘해졌다.
“핑계 댈 생각 말고, 애원을 하든 다른 미끼를 준비하든 그녀를 끌어들일 생각을 해. 그렇지 않으면 남는 건 협박뿐이니까.”
그런 크레센트의 행태에 길리언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양가적인 감정을, 그로서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굴러 떨어뜨린 그녀를, 어떤 수를 써서든 손에 넣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망가뜨리고, 자신을 몰라보고 배신한 대가로 어떤 식으로든 후회를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또 그녀가 타인의 입에서 깎아내려지는 건, 그리고 다치는 건.
그런 건 참을 수가 없었다.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 여자가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되는데, 그래야만 내가 손에 넣을 수가 있는데.
망가뜨리지 않고는 쥘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제 손으로는 망가뜨릴 수는 없는 자신은 정말로 미쳐가는 중임이 틀림없었다.
* * *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럽군.”
훌쩍, 마차에서 내린 케이든이 천천히 에덴버 저를 거닐며 말했다.
황태자의 마차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급히 마중을 나왔던 엘렌은 그런 그를 향해 핀잔을 던졌다.
“모두 전하의 취향으로 꾸며졌을 테니까요.”
엘렌은 제집 구석구석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의 선물들을 보았다.
장식용 석상, 식기, 가구, 태피스트리와 카펫, 그리고 심지어는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까지.
부피가 큰 물건부터 작은 소모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실제로 저택을 관리한다며 온 몇몇 인력들은 그가 보낸 인사였으니, 따지자면 그것은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아니! 다릅니다. 정확히는 그대에게 어울릴만한 것들로 고른 거지요.”
엘렌의 못마땅한 기색에도 지지 않고 태연히 대꾸한 케이든은, 화려하게 장식된 정문부터 잘 정돈된 길과 정원수들까지 한 바퀴를 주욱 훑어보며 말했다.
“이제야 좀 그대에게 어울리는 곳이 된 것 같군요. 나도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로 시종일관 싱글싱글 웃어 대었다.
“사실 나도 처음 저택의 상태를 보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가 들어와서 살 만한 곳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자 엘렌이 퉁명스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실 진상품이라니요. 게다가 저는 하사품까지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공치사와 개인적인 염려가 어찌 같겠습니까. 나는 아직 그대에게 내가 받은 것의 십 분의 일도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케이든은 딱 잘라 못을 박고는, 곧 누가 봐도 신이 난 모습으로 저택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저택으로 걸어가던 그는 멀찍이 저택 입구에 서 있는 동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기 저 장식은 내가 고른 겁니다. 딱 입구를 염두에 두고 골랐는데 마침 저 자리에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하군요.”
그가 가리킨 것은 아마도 황실 공예가가 황가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을, 이스타지오의 독수리가 조각된 석상이었다.
거기에 시선이 미친 엘렌이 얕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전하. 저 동상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씀입니다만…….”
“왜요.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엘렌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기색을 비치자, 케이든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혼나기 전에 선수를 쳐 말했다.
“영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것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나도 고르면서 조금 걱정하긴 했던지라…….”
어디서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풀이 죽어서 말하자, 엘렌은 꺼내려던 말을 접고는 냅다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물은 마음에 듭니다. 저 위치에 아주 멋지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까?”
그가 대번에 안색이 밝아져서는 말했다.
“네. 다만 정말로 과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조금 걱정이 되었던 것뿐인데…….”
말을 흐리던 엘렌은, 곧 처음의 황당함이 다시 살아났는지 하나하나 손에 꼽아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식기, 가구, 태피스트리와 카펫, 심지어는 제 드레스까지. 모두 황실 진상품이잖습니까.”
“어차피 쓰게 될 것 조금 미리 쓴다고 나쁠 것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굳이 지금일 필요도―”
“있지요. 그딴 꼴의 집에 그대가 살게 둘 수는 없으니까.”
그는 엘렌의 말을 슬쩍 가로채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생각해 보세요, 에덴버 후작.”
케이든은 그녀를 작위로 지칭하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첫 여성 졸업자인 셀레나 황녀를 압니까?”
“물론이지요.”
“내 작은할머님 되시는 그분은, 누구보다 아카데미 생활에 최선을 다하셨다고 합니다.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무엇 하나 꼬투리 잡힐 일 없이. 왜 그러셨을 것 같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엘렌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상징성은 중요하지요.”
그녀는 메이 아발란쉬가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걸음을 내딛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메이가 노력했던 건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함도 있었겠지만, 그녀를 채찍질하는 타인들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는 안 될 거라는 기대, 혹은 너는 할 수 있다는 기대.
그것들이 모인 그녀는 어떠한 상징이 되었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엘렌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살포시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