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디가 좋을까. 너희가 형제로서 자주 왕래도 하고 도우려면 지금 우리 영지와 가까운 곳이 낫겠지?”
“에덴버령 말씀이시죠?”
“그래. 아니면 폐하께서 처음 말씀하신 대로 조금 멀어도 역시 항구와 가까운 남부가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참 어렵구나.”
다니엘의 고민에 엘렌이 말했다.
“저는 에덴버가 좋아요.”
“그래?”
“네. 체셔령과 가깝기도 하고요.”
그러자 다니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알겠다. 네 의견에 따르도록 하마. 어차피 이것은 모두 네 공이고 앞으로 네가 다스리게 될 곳이기도 하니.”
“감사드려요. 아버지.”
엘렌이 싱긋 웃었다.
에덴버.
그곳은 황도 이스타잔의 정북쪽에 위치한 교통중심지로, 황도의 북동쪽에 있는 크라이언트령에서 황도로 이동할 때 거치게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산지가 분포한 주변과 달리 그곳은 전반적으로 지형이 평평해 그리되었는데, 그런 지형적 이점 덕분에 그곳에는 후일 북부로 가는 철도가 놓이게 된다.
남부의 바덴령도 당장을 생각한다면 황제가 충분히 신경을 써 준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항구를 가질 것이 아니라면 미래를 생각했을 때 에덴버령을 받는 것이 좋았다.
다니엘은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져서는 말했다.
“그나저나 주변에서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아버지를요?”
“나뿐만 아니라 너희까지 말이다. 너희는 모두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잖니.”
그는 기특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엘렌을 바라보았다.
“정말 자랑스럽다. 이렇게 잘 자라줘서 너무나도 고맙구나.”
다니엘은 갑자기 감회가 차오르는 듯 눈물이 그렁해지더니,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내 딸 엘렌. 엘렌 크라이언트.”
“네. 아버지.”
“앞으로는 에덴버 후작으로 불리게 될 테니 이렇게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거 결혼식 때 이미 한 번 하셨던 레퍼토리 아닌가요?”
감상에 젖으려는 그를 엘렌이 놀렸다. 그러자 그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이를 먹으니 아비를 놀려먹기도 하는구나, 네가.”
“그럴 리가요. 아버지.”
“시치미 떼는 법이 늘었어. 어쨌든, 엘시어에게는 크라이언트 백작위를 물려줄 거란다. 그 애는 내가 더 지켜보며 많이 가르쳐야 해. 하지만 넌 다르지. 넌 이미 나보다 낫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아니야. 정말이란다.”
그는 토닥토닥, 엘렌의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진정한 공신은 네가 아니겠니. 에덴버 후작위는 절차가 끝나는 대로 곧장 네게 승계할 생각이란다. 그러니 미리 준비해두렴.”
“아버지.”
다니엘은 웃으면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아 괜히 끔뻑끔뻑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께서 제게 그런 기회를 주셨고, 저를 믿어 주셨기 때문이에요.”
엘렌은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제 행복한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요. 우리.”
* * *
공신들의 작위 수여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크라이언트 백작은 에덴버 후작위와 함께 에덴버 후작령을 받게 되었다.
아발란쉬 후작은 헤지스에게 승작을 고려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 정도까지 기여한 바가 없다며 둘째 아이를 위한 작은 영지 하나면 족하다고 아발란쉬령 근처의 렌프루령 하나만을 받았다.
덕분이랄지 포트 후작의 승작이 논의에 올랐고, 가문의 명예면 충분하다는 그의 말에 포트 후작은 공작위로 승작, 포트 후작령은 공작령으로 승격되었다.
* * *
“엘렌 에덴버.”
엘렌은 거울 앞에 서서 낯선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영 익숙지 않았지만 울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인 다니엘 크라이언트는 당초 약속대로 곧장 승계 절차를 밟았다. 본래라면 한두 달 기다려야 하는 황실에서의 승인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음날 곧장 나, 그녀가 에덴버의 이름을 달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외출복 차림의 엘렌이 내려오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이제 가는 게냐?”
“네. 가기 전에 인사드리러 들렀어요.”
오늘은 그녀가 에덴버 후작저로 거처를 옮기는 날이었다.
다니엘이 독립하는 그녀가 걱정이 되는지 연신 당부했다.
“수도가 흉흉하다. 알지? 몸조심해야 해.”
“당연하죠. 아버지야말로 꼭 조심하세요. 항상 기사들 넷 이상과 함께 하시고요.”
“내가 할 말이구나. 넌 항상 너무 단출하게 다녀.”
그는 엘렌의 대답이 영 못 미더운지 눈썹을 찡그리고는 말했다.
“알겠어요. 저도 신경 쓸 테니 아버지께서는 정말 꼭 지키세요. 아셨죠?”
“그래. 알겠다.”
다니엘은 엘렌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럼 조심히 가거라.”
“아버지도요. 건강히 지내세요.”
부녀간에 짧은 이별 인사를 나눈 뒤, 엘렌은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황제가 선물로 하사한 수도의 커다란 저택.
다니엘이 이것은 엘렌의 것이라 말하며 양도해 준 것으로, 원래는 선대 크렘벨 공작이 크렘벨 공작저로 지었던 곳이라고 했다.
길리언이 작위를 승계한 직후 저는 이런 곳 필요 없다고 팔아버린 것을 황실이 냉큼 사 두었었다고.
뭐, 그 저택의 유래가 어찌 되었든 그곳은 이제부터 에덴버 후작저로 불리게 될 것이었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제이시가 말했다.
“많이 아쉬우시겠습니다.”
“무엇이요?”
“영지가 퍽 궁금하실 텐데 가보지 못하시니까요.”
“아, 그건 많이 아쉽죠. 직접 가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다른 때 같았다면 곧장 내려가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하며 돌아다니는 데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일단 자신의 영지가 생겼으니 몇몇 가지 실험적인 정책들을 시행해 보고 싶었고, 아카데미를 통해 원하는 인재들도 직접 영입해 오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도가 깔릴 길을 미리 봐둔 뒤 그 철도가 크라이언트령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손을 좀 써 두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수도를 비울 수가 없으니 그녀로서는 아쉬워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래도 저택을 꾸미는 건 설레는 일이지요. 당분간은 분주하시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곳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기대된답니다.”
조금 들떠 보이는 엘렌의 목소리에 제이시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엘렌의 기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게 다 뭐지?”
그녀는 눈앞의 분주한 사람 떼를 보고 물었다.
크라이언트 저택에 머무르며 미리 인선을 끝내놓았던 덕에 그녀를 맞이하러 나온 집사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신 물품들입니다.”
“이게, 전부?”
“예.”
보아하니 죄다 황실 진상품들 같았다.
엘렌이 할 말을 잃고 바라보고 있자, 어딘가에서 나타난 남자 한 명이 헐레벌떡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에덴버 후작 각하!”
느닷없이 달려온 남자는 그녀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칼 애쉬힐이라고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책임지고 물품의 배송을 완료할 것을 명령하시어 오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이름에 엘렌이 작은 감탄사를 뱉었다.
“아, 애쉬힐이라면…….”
“예. 이전에 제 누이인 마리아 애쉬힐이 각하께서 장미의 방에 머무르실 때 시중을 든 적이 있습니다.”
“알아요. 기억합니다. 누이에게는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안부 전해주세요.”
“영광입니다.”
칼 애쉬힐이 그녀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엘렌은 그런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그보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물론입니다.”
그는 용수철처럼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는, 공손한 손짓으로 사람 떼가 옮기고 있는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각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한다고 하시며, 직접 황실의 보물창고를 돌아다니며 고른 선물들이니 부디 어여삐 보아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모두 말입니까?”
“예. 아무래도 저택이 오래 비어 있었던 만큼 미흡한 점이 많을 것이라며 전하께서 계속 염려에 염려를 거듭하셨음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엘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적당히 채우면 되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하께서 당부하시길, 그저 소중한 파트너가 지낼 곳이 염려되어 보낸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고 전부 보람차게 사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이걸 전부, 보람차게.”
“예.”
그의 말에 제이시는 알 만하다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꼈고, 엘렌은 이마를 짚었다.
* * *
“떠들썩하군.”
크레센트가 비아냥대듯 말했다.
“길리언 크렘벨이라는 이름이 지워지고 있는데. 기분은 어떤가?”
“……지나갈 사건 하나쯤이야 깊이 담아두지 않습니다.”
길리언의 대답에 작게 웃은 크레센트는 담배의 끝을 툭 잘라내며 말했다.
“네가 이야기했던 화약들은 찾았다. 정보는 진짜더군?”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그런 것을 속여서 제 목숨이나 부지하겠습니까.”
그의 계속된 비아냥에도 길리언은 담담했다. 그러자 흥미가 떨어진 크레센트는 그를 도발하길 멈추고 말했다.
“트리발로스에서의 연락은 언제쯤 오지?”
“정확한 일정까지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만 사전에 적어서 보낸 시일이 있느냐고 물은 게 아니겠나.”
길리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렇게 일이 급박하게 돌아갈 줄 몰랐기에 그런 것까지 적어 보내진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쯧.
혀를 한 번 찬 크레센트는 담뱃불을 붙인 뒤 깊게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후……. 아, 들었나? 크라이언트 영애가 이젠 무려 후작이라더군. 에덴버 후작이라던데.”
“…….”
“클라우디스 정도면 괜찮은 신랑감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붙여주려 했는데 이거 영애가 너무 거물이 되어버렸어.”
그의 말에 길리언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