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런데 그다지 괜찮아 보이질 않으십니다.”
엘렌의 말에 케이든의 고개가 멀리 하늘을 보는 듯 뒤로 살짝 젖혀졌다.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길리언이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나는 릴리아 이스타지오의 아들이고 그는 이름 모를 시녀의 아들이었기에 이리되었다고. 그래서 나는 황제의 아들이 되었고, 그는 공작의 아들이 되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엘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그가 전대 공작의 친자가 아닌 폐하의 사생아라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가 맥없이 웃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아무것도 없는 것도 같고, 이러다 어딘가가 터져버릴 것 같은데 생각은 그 자리에 멈춰 있습니다.”
“전하.”
“나는 이것이 내게서 가족까지 빼앗으려는 길리언의 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도 믿지 말라던 그대의 말도 생각이 났지요. 아, 그야말로 선견지명이구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단 말입니다.”
“전하.”
엘렌은 처연히 미소 짓고 있는 남자를 불렀다.
팔을 부드럽게 당기자 그녀보다 배는 큰 몸뚱이가 저항 없이 그녀에게 몸을 맡겨 왔다.
케이든의 눈동자가 엘렌을 보았고, 그녀가 말했다.
“전하. 그의 출신이 어떻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반역자는 반역자. 전하께서는 처음 목표대로 백성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 성군이 되시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들으니 간단해 보이긴 하는군요.”
그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예. 전하의 종형제든 친형제든, 길리언 크렘벨은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본질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폐하에 대한 의문도 그렇습니다. 후일 폐하께 직접 여쭈시고, 그때 전하와 폐하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시면 되는 게지요.”
케이든은 엘렌의 이야기를 곱씹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는 일들인데.”
케이든의 입가에서 픽,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신기합니다. 아까까지는 그렇게 머리가 아프더니 지금은 또 진실이 무엇이든 흘려보낼 수 있을 것도 같고.”
“충분히 가능하십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케이든이 못 말리겠다는 듯 한차례 웃었다.
“아, 이제는 정말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그의 눈가는 어느새 곱게 휘어져 있었다.
케이든이 엘렌의 쇄골께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달랑. 붉게 루비가 박힌 반지가 옷깃 너머로 딸려 나왔다.
“난 그대만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쥐여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그는 엘렌의 손이 마치 제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아주 소중히, 간절하게 붙잡고는 말했다.
“부디 그대는, 그대가 쥔 이 약속을 잊지 마.”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 위로, 그는 열기 머금은 제 입술을 맞추었다.
* * *
불안해하는 케이든의 앞에서 차마 반지를 빼지 못했던 엘렌은, 태자궁을 빠져나오는 내내 주먹 안쪽으로 반지를 숨겨 쥔 채 걸어야만 했다.
[부디 그대는, 그대가 쥔 이 약속을 잊지 마.]
그녀는 황태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말하는 약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혼인에 관한 약속.
최선을 다해 그를 도울 것이란 약속.
서로의 목표가 같은 한 자신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을 것이란 약속.
자신을 소중히 여기겠단 약속.
그의 사람으로서, 그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겠다는 약속.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이를테면 상처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마지막 기대 같은 것.
그녀가 한숨을 쉬자 따라오던 제이시가 물었다.
“무언가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걱정거리라기보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엘렌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이였기에 유독 눈길이 갔다. 서로를 이해하기에 남들보다 의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긴 미묘한 마음도 있었다.
이것은 스파니엘을 대하는 감정과는 달랐다. 그렇다고 테리어드를 대하는 감정도 아니었으며, 길리언을 대해왔던 감정도 아니었다.
지금 드는 느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엘렌은 그냥 입을 다물길 택했다.
“……글쎄요.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이건 아마 연민일까.
그가 잡았던 손의 느낌이 아직도 손등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엘렌은 반지에 닿은 살갗이 괜히 홧홧한 느낌이 들어 제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괜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황궁이 어수선한 것 같네요.”
엘렌이 중얼거리자 제이시가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확실히 평소보다 돌아다니는 인력이 배는 많습니다.”
“반역이 있었던 탓에 인력을 늘린 걸까요? 그런 것 치고는 뭔가 낌새가 안 좋아 보이는데…….”
“워낙 뒤숭숭한 때이니까요. 다들 비상이 걸려서 근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엘렌은 지나치게 많은 황궁 병사들에 의아한 눈길을 보내며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 * *
황궁이 소리 없이 발칵 뒤집혔다.
교대 시간임에도 야간 당직이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본 오전 근무자가, 당직의 시체가 있다며 보고를 해 온 것이다.
들어가 확인한 감옥 안은 이미 텅 비어 먼지뿐.
반역자 길리언 크렘벨이, 간수를 살해한 뒤 탈옥한 것이다.
이는 곧장 황제에게로 보고가 올라갔고, 황제는 비밀리에 포트 후작에게 도움을 청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쳤다.
“고작 하루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수도 전역을 봉쇄하고 샅샅이 수색해라.”
그렇게 황궁 내에는 황제군이, 수도와 그곳에서부터 이어진 모든 길목들에는 포트 군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그 빽빽한 감시망에도 그는 밤새 허공으로 증발하기라도 한 듯 그 어떤 곳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포트 후작이 분개해서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내부에서 누군가 도운 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네.”
헤지스는 골치가 아픈 듯 고개를 숙이며 제 이마께를 손으로 쓸었다.
“한시바삐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야 합니다.”
“반역자의 도주 사실을 전국에 알리라고?”
“어차피 수도에 머무르고 있던 귀족들은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다른 세력과 결탁해 피신하기 전에 완전히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후……. 그렇지. 나 같아도 수상하게 여길 테니.”
헤지스가 깊은 한숨을 쉬자 포트 후작이 말을 이었다.
“정말 누군가가 탈옥을 도운 거라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반역자의 세력이 이 외에 더 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건 어떤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이대로 조용히 두었다가 잔존 세력까지 일거에 해치우는 것은?”
“애초에 크렘벨이라는 구심점이 없으면 잔존 세력들은 말 그대로 잔챙이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크렘벨 위주로 공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잔챙이가 황궁에서 탈옥을, 하루 만에?”
“세력이 크다면 더 문제입니다.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 자네의 말이 맞군.”
헤지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 영주들에게 수배 전단과 함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설령 잡히지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도 행동 범위가 대폭 줄어들겠지요.”
“알겠네. 각지에 길리언 크렘벨 생포 명령을 내리지.”
헤지스가 허락하자 마음이 급했던 포트 후작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직, 잠시만 기다리게.”
“예?”
“자네 말을 들으니 신경이 쓰여서 말이야. 공신들의 승작을 서둘러야겠네.”
그의 말에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포트 후작이 낮은 감탄사를 흘렸다.
“아, 그렇지요. 앞으로 회의가 잦아질지도 모르니.”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아무래도 이대로는 표가 부족하지 않겠나.”
헤지스는 슬쩍 포트 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는 자네와 크라이언트를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는가?”
하지만 그의 말을 듣던 포트 후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저 대신 아발란쉬 후작을 지명하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은 아직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시점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제 사람 챙기기만 한다고 보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포트 후는 진심으로 그를 말렸다.
“폐하께서 충분히 융통성 있게 사람을 쓰신다는 것을 보이셔야 괜한 반역에 손을 보태는 이들이 사라집니다.”
“끄응…….”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던지라, 헤지스는 한참을 고민하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알겠네. 크라이언트 백작과 아발란쉬 후작에게 연락을 취하지. 지금 황실에 반납되어 있는 작위 목록을 봐야겠군.”
* * *
길리언 크렘벨의 탈옥.
반역자의 탈옥이라는 흉흉한 이야기에 제국 전역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실권을 쥐는 것은 누구일지, 이러다 내전이라도 나는 것은 아닐지.
그런 우려 섞인 두려움은 크렘벨령 영지민이 가장 심했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크렘벨령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황도 역시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는 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도의 귀족들은 혹시라도 반역에 연루될까 잔뜩 긴장한 채 몸을 사리기 바빴고, 지방 영주들은 공신이 되어 수도에 진출하고자 하는 욕망에 눈에 불을 켜고 도시 검문을 시작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어쨌든 황제파 귀족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저희들 사이의 내실을 다져 갔고, 그렇게 황제가 꺼낸 승작에 관한 안건은 큰 마찰 없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이게 정말 행복한 고민이로구나.”
엘렌의 부친인 다니엘 크라이언트 백작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