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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85화 (85/128)

<85화>

창살 너머의 인영이 말했다.

“아직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군.”

“……크레센트 황자?”

놀라움을 표하는 그의 목소리는 다 갈라져, 마치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크레센트가 한쪽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여긴 무슨 일로.”

길리언이 묻자 크레센트가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이 짧은데. 나라면 조금 더 공손히 굴겠어.”

“…….”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빠르게 용건만 말하지.”

그의 눈이 싸늘하게 희번덕거렸다.

“공이 말했던 그 ‘적기’에 대한 이야기.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들어 봤으면 좋겠는데.”

그의 용건을 들은 길리언의 입가에서 피식 새는 듯한 웃음이 나왔다.

그게 목적이었나.

그는 낮에 제가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이렇게도 기회가 찾아오게 되는 건가…….’

돌이키진 못해도, 한 번 더 네게 다가갈 기회 정도는 얻을 수 있는 건가.

길리언이 입을 열었다.

“영락없이 남 좋은 일만 하라는 말씀이신데……. 제가 순순히 말할 것이라 생각하고 오셨습니까.”

“말하지 않는다고 공에게 다른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어차피 여기서 고문당하다 자포자기로 실토하게 될 사실들 아닌가?”

하지만 길리언은 크레센트에게 쉬이 져 주지 않을 듯 말하며 그를 도발했다.

“이게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전하 아니십니까. 말씀하신 대로 제겐 이제 다른 방법이 없으니.”

“……적어도 내게 알린다면 내가 형님을 치고 그대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지.”

“하지만 그러려면 그전까지 제가 처형을 당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되레 강하게 나오는 길리언의 모습에 크레센트는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 ‘적기’라는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페리윙클과 오세먼이 그렇게 푹 고꾸라지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협상을 진행하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크레센트가 헛웃음을 흘리자,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길리언이 그를 쳐다보았다.

서로를 팽팽히 노려보던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상태로 있더니, 이내 크레센트가 먼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대치를 끝냈다.

“그래. 좋아.”

그는 끄덕끄덕,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먼저 한 가지만 확인하지. 그 골때리는 광산의 주인이 공이 맞나?”

광산?

그의 질문 속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를 들은 길리언이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설마 초석광산의 이야기입니까?”

크레센트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푹 한숨을 쉬고는 답했다.

“바로 알아듣는 것을 보니 맞나 보군.”

“…….”

“그대가 쥐고 있는 것이 그 초석광산뿐이라면, 그건 이미 들켰다.”

“……그걸 정말 들켰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지금쯤에는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인근 영지의 병사들이 포진해 있겠군.”

길리언은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나 했었지만 진짜일 줄이야.

아, 엘렌.

그것도 네가 개입해서 찾아낸 것인가?

내 앞길이나 잘 가리라더니 그게 이런 소리였나.

길리언은 템트 하역장에서 화약 무더기가 적발되었던 일과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며 송구한 얼굴로 보고하던 부하를 떠올렸다.

그는 비식비식 새어 나오는 웃음 탓에 입가에 힘을 주었다.

‘어떡할까. 지금 이건 정말로 내게 주어진 기회일까, 아니면…….’

이보다 더한 나락으로 처박히길 바라는 악마의 꼬드김일까.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저도 알고 있었다.

엘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시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크레센트의 밑으로 들어가, 신변을 보장받으며 전리품으로써 그녀를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하지요.”

혹시 아는가. 십 년을 기다려 크레센트의 뒤마저 치게 될 기회가 올지.

그는 크레센트를 보며 말했다.

“광산을 들킨 것이 제법 뼈아프긴 하나, 어차피 제가 이리된 이상 더 굴릴 수는 없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외에 제가 갖고 있는 것들을 공개하고 전하께 협력하겠습니다.”

크레센트는 그의 대답이 꽤나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좋아. 공이 원하는 건 뭐지?”

“일단 이 감옥을 빠져 나가야겠지요.”

“정보를 주는 것은 나간 이후라는 소리군?”

그의 물음에 길리언이 말했다.

“저도 제 목숨은 중요합니다. 전하께서 저와 손을 잡으신다면 이제 저희는 같은 배를 탄 것이니,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길리언의 행동에 크레센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좋아. 대신 네가 제공할 것들이 변변찮은 것들이라면 넌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될 거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입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전하를 찾아갔던 것이었으니까요.”

그의 장담에 크레센트는 냉소적인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죄수 주제에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 * *

어딘가를 방문하기에는 이른, 이제 막 햇빛이 눈부시게 퍼지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엘렌은 마차에서 내려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태자궁. 케이든의 거처였다.

그녀가 실례임을 알면서도 일찍 움직인 이유는 단순했다.

길리언 크렘벨이 수감된 이후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어야 할 황태자가, 어찌 된 일인지 아무 연락이 없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사소한 일에도 곧장 제게 날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을 그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조용하기만 하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에 구겨진 곳이 없는지를 살핀 제이시가 탁탁, 그녀의 드레스 주름을 정리하고는 뒤를 따라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맞이하러 나온 시종장은 불쾌한 기색이 일절 없었다.

“가시지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엘렌은 앞장선 시종장을 따라 태자궁에 들어섰다.

그런데 복도를 걸어가던 와중이었다. 시종장이 뒤를 돌아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예?”

“송구한 말씀이지만, 전하께서 오늘은 집무실이 아니라 침실에 계십니다.”

“……침실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황태자가?

그녀의 반문에 시종장이 어쩔 줄을 모르는 낯으로 대답했다.

“예. 바깥에서 전해드리기엔 자칫 문제가 될 수 있어 여기서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슬쩍 엘렌의 눈치를 보고는 허둥지둥 뒷말을 이었다.

“불편하시다면 전하께서 나오실 때까지 다른 곳에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응접실로 가시겠습니까?”

보통의 경우였다면 애초에 이런 선지 따위 없이 ‘주인이 준비하고 나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리니 이곳에서 대기하라’는 말과 함께 곧장 응접실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이런 사정을 굳이 밝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이 그를 찾아가 주길 바랐다는 뜻과 같았다.

엘렌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전하께 안내해 주시지요.”

주변의 눈이 신경 쓰일 만한 장소이기는 했지만, 태자비의 방까지 대놓고 묵어가며 지냈던 마당에 이제 와 그러는 것도 우스웠다.

그녀가 황태자의 침실 앞에 도착하자, 시종장이 노크와 함께 그녀의 방문을 알렸다.

똑똑.

“전하. 크라이언트 영애가 왔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이렇다 할 기별이 없었다. 시종장이 퍽 곤란한 얼굴로 방문을 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혹 전하께서 다시 주무시는 건 아닌지요?”

“아닐 겝니다. 영애께서 직접 말씀드려 보시겠습니까? 늙은이 목청으로는 잘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예? 아, 예.”

엘렌은 똑똑, 노크한 뒤 목소리를 높여 황태자를 불렀다.

“전하. 엘렌입니다. 제가 들어가 봐도 될는―”

문이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가운 차림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신장 차 탓에 그녀의 머리 위를 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는지 황태자가 얼떨떨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영애? 정말로?”

“예. 접니다.”

“그대가 이 시간에, 여기는 어떻게…….”

“걱정이 되어서요.”

“그대가? 내 걱정을?”

케이든은 멍하니 그녀를 보다, 그녀와 저 사이의 거리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그가 침실로 뒷걸음질 쳐 들어가자 엘렌이 물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아무……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들린 그의 목소리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엘렌은 그에게 물었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그러지요.”

케이든이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 대답했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간 엘렌은 그의 바로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일이 있었던 것은 맞는데 나로서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아서. 정말 아무것도…… 정리가 되질 않아서.”

어딘가 곤란한 듯, 난처한 기색으로 말하는 케이든의 말끝에는 어째서인지 자조적인 기색이 짙게 묻어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엘렌은 언젠가 제가 받았던 것처럼 손끝을 뻗어 그의 뺨을 감싸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정리되지 않아도.”

케이든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것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생각나는 대로 천천히 말씀해 보시지요.”

“……생각나는 대로라.”

케이든이 그녀의 말을 느리게 되뇌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보고 싶었습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분위기였다. 엘렌은 염려 섞인 낯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리 시선을 피하십니까?”

“막상 마주하니 보기가 어려워 그렇습니다.”

케이든이 하하,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좋군요. 내 생각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지요?”

엘렌의 질문에 그가 애달프게 웃더니 말했다.

“그대가 있다면, 분명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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