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길리언 크렘벨’.
그것은 현황 헤지스 이스타지오의 사생아가 가져야 했던 이름이며, 본래 어미가 붙여준 이름을 기억할 수조차 없는 한 남자가 갖게 된 이름이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나름 성군으로 평가받던 현황.
황제가 제 책임을 제대로 졌다면 제1계승권자의 이름은 자신의 것이 되어야 했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을 때, 길리언은 참을 수 없는 적개심에 휩싸였다.
[처신 똑바로 해라.]
[만찬 시간 외에 내가 저 애를 볼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
[저 애를 없애야 해요.]
[황제는 모르게, 사고로 위장해서…….]
자신이 그런 눈길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이유가, 그런 시선을 받아야 했던 시간이.
그 모든 게 모두 저 황제 탓이었다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애초에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였기에 딱히 그립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는 양부모를 살해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쥐고서야 제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살기 위해서는 먼저 행동해야 한다.
상대를 가차 없이 쳐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몇 년 뒤, 우연히 공작의 침실 벽 너머 공간에 숨겨져 있던 이중 금고를 찾아낸 뒤로는 더욱 확실히 굳어졌다.
그곳에 들어 있던 것은 양부인 공작의 약점이자 그를 보호해줄 방패.
후궁 벨라테스 이스타지오와의 황후 릴리아 이스타지오 독살 모의 증거였다.
열어본 서찰에는 ‘주고받은 모든 것은 보고 태울 것’이란 말이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모든 자료를 남겨놓았고, 덕택에 그것은 증거가 되어 고스란히 그에게 승계되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후일 벨라테스가 저를 내칠까 하는 노파심에 남겨둔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
어쨌든 벨라테스 역시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먼저 상대를 제거한 이력이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어떠한 한 가지 확신을 안겨 주었다.
무엇인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갖고 있는 이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
그는 그렇게 제가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어느새 남은 것은 몸뚱이 하나뿐이라…….”
길리언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다 털썩, 차가운 돌바닥에 힘없이 누웠다.
되찾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저를 버린 아비에게 똑같이 버려지는 고통을 선사해 주고자 내디딘 걸음이었는데.
그런데 결국엔 모든 것을, 심지어 아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엘렌.”
그는 괜히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을 한번 불러보았다.
엘렌 크라이언트.
나를 이 나락까지 떨어뜨린 나의 부인.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금빛 잔상이 야속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진즉 너를 돌아보지 않았을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네 뒷받침이 날 지탱해 주었던 것을 알지 못해서?’
내가 네게 이렇게 목을 매게 될 것이라 생각지 못해서? 아니면 진즉 너를 돌아봐 주지 않아서?
그는 이어지는 생각들에 눈을 감았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다신 그러지 않을 텐데.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텐데.
절대 놓치지 않을 텐데.
내 옆이 아닌 곳에, 널 두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런 수도 없이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하는 이 시간.
닥칠 미래를 알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이, 그를 개미지옥처럼 바닥까지 끌어내렸다.
* * *
따사로운 오후, 발끝을 적시는 오렌지빛 햇살에 향긋한 홍차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
하지만 방 안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런 것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연신 다리를 떨며 제 무릎만 붙잡고 있었다.
‘어떡하지.’
리암 오세먼은 손톱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았다.
황자궁의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그야말로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사교 시즌부터 가뭄과 홍수를 거치며 누적된 손해는, 이번 투자 실패를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젠 황자에게 보내던 금액을 평소대로 보냈다간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그 사실을 황자에게 전해야 했다.
‘정해진 금액을 채우기 어렵다는 말을 대체 어떻게 전해야 하지?’
정말 페리윙클처럼 우리를 팽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떤 줄이든 좋으니 살길만 있다면 그것을 붙잡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황제파로 갈아타기는 무리였고, 그렇다고 중립을 선언하고 나가는 것 역시 저희의 몰락을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별다른 방법이 없다며 체념한 그는 초조한 가슴을 안고 2황자의 기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 너머에서 안내가 들려왔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드디어!
리암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빠른 걸음으로 시종을 따라간 그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2황자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열자, 그곳에는 매캐한 담배 연기와 함께 심기가 좋지 않은 얼굴로 앉아 있는 크레센트가 보였다.
황자는 고개만 슬쩍 들어 그를 보더니 말했다.
“아직 오세먼이 나를 볼 때는 아니지 않나? 무슨 일이지?”
실낱같은 그의 용기는 크레센트의 한 마디에 모두 사그라지고 말았다.
리암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애써 움직였다.
“그…… 이번 납금액을 다 채우기가 어려울 것 같아……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서류를 들춰보고 있던 크레센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정면을 향하며 리암에게 시선이 꽂혔다.
“……뭐라고?”
“납금액을 다 채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기다려 주시면! 맹세코 다음 분기에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리암은 제가 떨고 있던 게 언제였냐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나 들어보지. 말해봐. 이유가 뭐지?”
그의 질문에 이것이 정말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 리암은 두 눈을 꽉 감고 말했다.
“그것이, 아시다시피 이번 사업이 크라이언트와 엮이는 바람에…….”
“아, 크라이언트.”
크라이언트라고.
크레센트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르며 중얼거렸다.
그는 완전히 상체를 들더니,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고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짜증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왜 내 아래에는 이런 놈들밖에 없을까.”
“…….”
“너희가 조금만 나았어도 내가 이렇게 한낱 백작가 따위에 목을 매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 아니야.”
낮게 깔린 채 나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목을 주무르던 손을 내리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후……. 좋아. 일단 묻지. 내가 넘어가면, 기다리면. 그러면 그때는 정말 가능한가? 그런 보장은 어디에 있지?”
그러자 리암이 대답했다.
“만일 거사를 치르는 데 급히 필요한 비용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밑천을 거덜 내서라도 함께하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조금 더 먼 미래를 생각해 저희가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만큼만, 그만큼의 말미만…….”
그의 낯이 다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간절해졌다.
제 앞의 실패자를 물끄러미 보던 크레센트가 하, 하는 낮은 한숨을 뱉고는 대답했다.
“그래. 알겠다.”
“감사합니다……!”
리암의 낯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자는 그것만으로 넘어가 주는 이가 아니었다.
크레센트가 분기를 누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뿐이다. 그 밑천, 다음엔 정말 준비해서 와야 할 거야.”
“네, 네! 물론입니다.”
2황자의 경고성 짙은 한 마디가 날아들었지만 괜찮았다.
겨우 말 몇 마디로, 오세먼가의 목숨줄은 몇 달 더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 * *
힘겨웠던 여름도 어느새 많이 지나간 모양인지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케이든은 두 손으로 테라스의 난간을 짚은 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요한 말들은 이미 모두 들었잖아. 여기서 내게 윽박지르기보다 네 아비에게 찾아가 묻는 게 빠르지 않겠나?]
“어려워. 어렵다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쥐고 있던 난간에 미끄러지듯 기댄 그는, 떨구어진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짙은 어둠에 가려진 수목들을 멍하니 보았다.
사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도 맞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는 것 외에는 제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엘렌이 주었던 브로치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언젠가 자신을 잡아주었던 온기.
자신감이 깃든 또렷한 목소리.
그 옅은 금빛이, 곱게 휘는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이 모든 혼란이 그녀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줄 것 같은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있다면 이 모든 고통도 괜찮아질 것이라고, 케이든은 막연한 믿음에서 비롯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엘렌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 * *
끼익―.
늦은 밤.
단단한 돌바닥, 축축하고 어두운 복도에 녹슨 철문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이 거의 다 타 버려 안을 비추는 불빛은 희미했고, 안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간수는 어찌 된 일인지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잘 식별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한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울렸다.
힘없이 벽에 기대어 있던 길리언은 제 앞에 멈춘 발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려 쇠창살 너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