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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82화 (82/128)

<82화>

초조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이 없었다.

길리언 크렘벨은 지금 열네 살 이래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저 애를 없애야 해요. 여보.]

[하지만 저 애는 황제의 핏줄이야. 함부로 그러기엔 위험 부담이 커.]

[그러게 당신은 왜……!]

[왜긴! 우리 사이엔 아이가 없었고, 황제는 제 자식을 죽게 두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거절할 수도 있었잖아요!]

[황제야! 황제라고! 그 핏줄을 죽게 두는 것도 불충인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거기까지 들은 소년은 제 입을 틀어막은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는 소년의 귀에 6시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당혹을 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내려간 만찬장.

그곳에는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는 여자와 수심에 잠긴 남자가 있었다.

소년은 목에 모래가 걸린 것 같은 느낌에 유독 먹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공작 부부가 마차 사고로 나란히 비명횡사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괜찮아. 제위만 얻으면 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

그는 들고 있던 술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액체에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술이 들어가면 진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가슴은 외려 쿵쿵대며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엘렌은 자신의 것인데.

자신의 옆에 있던 사람인데.

그렇게 순조롭게 황위를 향해 갈 것이었는데…….

그는 재차 술을 들이켰다.

엘렌이 제가 좋아하던 것마저 거절한 지금,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수단으로 더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사실 정말 마음이 급하다면 엘렌을 놓고 크레센트와의 연합으로 황태자를 치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놓을 수가 없었다.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 하하…….”

그는 실소하기 시작했다.

자신으로서도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전조는 있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엘렌에게 연연하기 시작했더라.

그녀가 집을 나가서?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그다지 그녀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이혼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부터?

그때는 참 어이가 없었다.

그랬다. 그것이 시작이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언젠가부터 자신은 그녀에게 직접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신경을 끄고 알아서 들어오겠지, 하던 것이 그다음엔 왜 들어오지 않나, 왜 저런 행동을 하는가.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지금 자신을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옆에 둘 수 있을까…….

스스로가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그러했다.

“크레센트……. 크레센트를 찾아가야 해.”

그가 중얼거렸다.

황태자를 제거한다면, 일단 그가 보란 듯이 데리고 다니고 있는 엘렌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신분으로, 신분으로도 되지 않는다면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을 자신이 얻어 내면 그만.

열네 살의 밤에 그리했듯, 자신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말 것이다.

* * *

“이건 뭐야.”

크레센트는 새벽을 틈타 제게 온 편지를 집어 들었다.

“혹시 모르니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클라우디스가 다가가 그가 들고 있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아무 표식도 없는 밀랍으로 봉해진 편지.

그것을 조심스레 뜯자,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크렘벨가의 인장이었다.

“……크렘벨?”

그는 의아한 중얼거림과 함께 편지를 펼쳐 들었다.

<오늘 밤, 11시 정각. 웰링우드의 다리 밑.>

“……재밌네. 네가 보기엔 이게 무슨 의도 같지?”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던 크레센트가 묻자, 클라우디스는 편지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도 의중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흐음.”

크레센트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를 가져가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다른 메시지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너무 정직해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크레센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느낌이 좋아. 이건 네가 가 봐.”

“가는 겁니까? 만약 함정이라면…….”

“함정이면 그것을 핑계로 형님을 샅샅이 휘저어 줘야지.”

“그렇군요.”

클라우디스가 떨떠름한 낯으로 대답했다.

크레센트는 그러든 말든 말했다.

“가 봐. 가서 나쁠 게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 공작이 그 광산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이 시기에 내게 연락을 할 이유가 없거든.”

제 말을 자르고 나온 크레센트의 추측에 클라우디스가 멈칫했다.

“설마…….”

“그래. 나도 설마 하는 중이니까 가서 확인해 보라고. 무슨 제안을 하든, 내게 전달하겠다,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면서 말이야.”

“……그거 잘못하면 저는 입막음으로 죽는 것 아닙니까?”

클라우디스가 저도 모르게 찡그려진 눈가를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러자 크레센트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 그것을 명분으로 크렘벨 공과 함께 형님까지 확실히 보내 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너의 희생은 충분히 가치 있을 거다.”

“……하.”

클라우디스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 * *

빛이 들지 않는 다리 밑.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헤치고, 옅은 등불과 함께 마차 한 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등불이 앞을 비추고, 조금씩 밝혀지는 시야에 사람의 구둣발이 나타났다.

“어이쿠!”

마부가 깜짝 놀라 마차를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제동에 안에서 무슨 일이냐 외치자, 마부는 “사람이 있습니다!”라며 답하고는 잽싸게 마차에서 내려 멀찍이 물러섰다.

클라우디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자, 건너편에 서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크레센트 황자 전하가 아니시군.”

클라우디스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림자 속 구둣발의 주인을 보았다.

“……정말 크렘벨 공이시군요.”

“누가 나를 사칭하겠습니까.”

길리언이 느린 걸음걸이로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불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나고, 그의 창백한 뺨을 노르스름한 등불 빛이 비추었다.

“오랜만에 봅니다, 바로크 경.”

길리언이 인사를 건네자 클라우디스가 어색한 낯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번 크라이언트 저에서 뵌 이래로 처음인 듯하군요.”

“……그렇지요.”

제 치부를 들추는 말에 길리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제안을 먼저 건네러 온 것이었다.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러면 난 경에게 내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 진위조차 파악할 수 없는 편지 한 장에 전하께서 움직이실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클라우디스의 발밑에서 찰박, 물이 튀었다.

그런 그를 보던 길리언이 한숨과 함께 답했다.

“후……. 그렇습니까. 그러면 나도 간결하게 전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말씀하시지요.”

“전하께서도 황위에 욕심이 있으시다는 사실은, 솔직히 모두가 아는 일입니다.”

“…….”

“그리고 난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지요. 우리는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말씀 끝나셨습니까?”

클라우디스의 냉정한 태도에 잠시 고민하던 길리언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치려면 지금이 적기라고.”

“적기?”

클라우디스가 반문했지만 길리언은 자신의 할 말만을 이었다.

“그 이유는 직접 뵈었을 때 말씀드리겠다고. 그리 전해 주시지요.”

* * *

이스타지오의 황제, 헤지스는 잠이 오지 않는 머리를 애써 비우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이 시각에 침실에 든 황제를 찾는 일이라면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그러자 바깥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포트 후의 전언입니다.”

그것은 국가 중대사.

그러니까, 이를테면 반역과 같은 일.

“가져와라.”

헤지스는 들어온 시종이 건넨 것을 받아 들었다.

펼쳐진 쪽지에 쓰여 있는 것은 이러했다.

<준비 완료.>

헤지스는 그것을 방 안의 초에 가져다 대어 태우며 말했다.

“당장 가서, 포트 후에게 크렘벨 공작을 체포하라 전해라.”

* * *

새벽의 거리.

수도를 가로지르는 대인원의 이동으로 거친 말발굽 소리가 온 거리에 울렸다.

잠귀가 예민한 이들은 일어나 창밖을 보았고, 개중 심약한 이들은 심상치 않은 거리의 분위기에 커튼을 치며 숨어들었다.

그렇게 템트 운하의 다리를 건너 도착한 크렘벨 공작저의 정문.

쾅쾅쾅!

“반역자 길리언 크렘벨은 나와서 황제 폐하의 칙명에 따라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문자의 성명과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십시오!”

“5분을 기다린 뒤에도 열지 않는다면 강제로 열겠다!”

포트 후작의 외침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 공작저의 경비병들은 서둘러 저택 내로 전령을 보냈다.

그러나 결정권자가 부재한 저택은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고, 문은 곧 포트 군에 의해 부서지고 말았다.

쾅!

“샅샅이 뒤져!”

“저택의 문을 막아!”

“꺄악!”

밀려들어 온 군사들에 사용인들은 혼비백산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저택의 곳곳은 부서지고 망가지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하엔 보이지 않습니다!”

“1층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보고해라!”

“2층도 없습니다!”

“3층도 발견 못했습니다!”

“저택 인근으로 범위를 넓힌다!”

포트 후가 외치자, 한쪽에서 마구간 지기를 포박하고 있던 병사가 외쳤다.

“여기, 사용인이 말하길 공작은 외출했다고 합니다!”

그 외침을 들은 포트 후작이 명령했다.

“절반은 시가지를 훑어라! 치안대에게도 협조를 구해! 황제 폐하의 칙명이라고!”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반역자 길리언 크렘벨을, 반드시 체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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