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어떻게 됐니.”
“안 돼요…….”
책상에 앉아 열심히 장부를 보던 리암 오세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계산해도 이번에 전하께 보내 드릴 금액을 제하고 나면 여력이 남지 않는다고요.”
그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 우리도 페리윙클 같은 꼴이 나는 건 아니겠죠, 어머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오세먼 부인, 릴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스스로 실수를 했어. 크러니 크라이언트에게 주는 선물이랍시고 버려진 것 아니니.”
“하지만 그건 우리도 같이…….”
“아니, 그 건은 그걸로 끝났다. 페리윙클은 선을 넘은 게야. 전하께서 내치지 않으셨어도 침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린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럼에도 리암의 표정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아버지란 작자는 이미 무엇인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집을 나갔다.
말로는 새로운 상품과 투자자를 찾아보러 가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마냥 믿으며 기다리기에는, 그가 가져간 것은 당장 현금화가 가능한 물건들뿐이었다.
“어떻게 얻은 세습 작위인데. 내가 반드시 너만은 오세먼 자작으로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게 해 주마.”
그녀는 제 아들을 꼭 껴안았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그런 제 어미의 말에, 리암은 울컥해 그녀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전하께 사정을 말씀드려 볼게요. 우린 할 수 있을 거예요…….”
* * *
마린이 아페타와의 미팅이 잡혔음을 알려 왔다.
장소는 카라밀로의 VIP룸.
찾아올 아페타의 대표를 기다리고 있던 엘렌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카라밀로의 대표 엘렌―”
“크라이언트지.”
엘렌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를 보았다.
들어온 것은 익숙하고도 끔찍한 얼굴.
“오랜만이군.”
길리언 크렘벨이었다.
“……당신이 여기엔 무슨 일이죠? 보안!”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제이시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물러서 계십시오.”
“……못 보던 얼굴이군.”
길리언은 그녀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
“보안은 당신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나를 들였어.”
그는 두 손을 들어 제게는 아무런 위험 요소가 없음을 보였다.
“내가 아페타 대표거든.”
“하.”
엘렌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미리 말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택에 방문을 알리고 정식으로 찾아가면 넌 없는 척을 하거나, 갖은 핑계를 대며 나와 대화를 하지 않으려 드니까.”
“……정말 치졸하기 그지없군요.”
엘렌이 싸늘히 굳은 낯으로 말했다.
하지만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도 그냥 담당자를 보냈으면 될 일이야. 그럼에도 내가 직접 온 것은 그만큼 널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날 존중한다고?”
엘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휙 손짓을 해 보이고는 말했다.
“이만 나가세요.”
“사업이야. 그렇게 반응할 만한 일이 아니지. 냉정해지라고.”
“이게 당신이 언제나 해 왔던 나에 대한 존중이에요.”
엘렌이 오른손을 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손짓, 나가라는 말. 우리 대화를 끝내는 한마디.”
그녀의 말을 길리언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나는 그대로 돌려주고 있을 뿐이죠.”
“그건―”
길리언은 무언가 변명을 하려다, 곧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말했듯 미안해. 사과하지.”
“사과? 난 당신이―”
정말 끔찍해.
엘렌은 뱉던 말을 멈추었다.
당신을 믿을 수가 없어.
당신에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마는, 이 상황이 난 싫어.
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그의 앞에서 쏟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길리언은 그녀의 뒷말을 듣지 않고도 이어질 말이 무엇일지 알고 있는 듯 그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 영지의 히비스커스, 너도 알 테지.”
“…….”
“애초에 너희 유통망을 이용할 생각으로 추진했던 계획이었지.”
“……그랬었죠.”
“지금이 그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는데. 수익 분할은 협상이 필요하겠지만, 최대한 네게 맞춰 줄 거다. 원래 네가 진행하던 일이었으니까.”
제가 나가기라도 할까 서둘러 말을 잇는 모습에, 엘렌은 괜히 애잔한 마음이 들어 눈을 감았다.
“필요 없어요.”
이런 모습을 왜 그때는 보여 주지 않았어?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이러는 당신을, 나는 이제 보고 싶지 않아.
“나에 대해 네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사업적인 부분에서까지 손해를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
길리언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네게, 그때 내가 주지 못했던 것들을 주고 싶은 거다. 결코 네게 해될 게 아니야.”
그리 말하는 길리언의 얼굴은 아주 낯설었다.
그 목소리는 지금까지 들은 것 중 가장 간곡했고, 입에 담는 말은 그간 들어 본 적 없는 애원이었다.
“……그건 크렘벨 부인이 한 일이죠. 지금의 내가 들고 올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
그것을 나는 한 번의 생이 지나, 지금에야 알게 되었구나.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엘렌을 보던 길리언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에게 다가간 그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함부로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길리언의 손이 중간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저지당했다.
제이시였다.
길리언이 기분이 나쁜 듯 얼굴을 팍 찡그렸다.
그러나 그는 무어라 하기 전, 엘렌의 눈치를 한번 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래. 다가가서 미안하군. 그동안 네가 힘들었을 걸 몰랐던 것도. 미안하다.”
엘렌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언젠가 잘했다는 말을 하며 쓰다듬어 주었던 그 손.
그 시절에 웃던 자신, 죽어 버린 가족.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지금.
엘렌이 입술을 열었다.
“……차라리 찾아오지 말지 그랬어요.”
조용히 나온 그녀의 말에 길리언이 몸을 굳혔다.
“무슨…….”
“당신이란 사람은 본디 애정이 결핍되어 있었노라고, 가진 애정이 없어서 내게도 주지 못했던 거라고.”
엘렌은 뒤로 물러서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그리 생각하며 일말의 연민이나마 갖고 있을 때, 거기에서 멈추지.”
둘 사이의 거리가 처음만큼 벌어졌다.
본디 그녀에 대한 의문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 없던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의문을 내비쳤다.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무례를 범해도 된다는 뜻으로 알겠노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죠.”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나가.”
“…….”
“내 앞길 걱정해 줄 생각 말고, 네 앞길이나 잘 가리라고.”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그를 한번 보았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보안!”
엘렌은 문을 벌컥 열고는 말했다.
“손님께서 가시네. 배웅해 드리도록.”
그리 말한 그녀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또각또각, 유난히 크게 들리는 구두 소리가 방 안까지 울렸다.
길리언의 시선이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그대로 박혔다.
안 돼.
보내선 안 된다.
이것마저 안 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어.
그는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가며 외쳤다.
“엘렌! 기다려! 이야기할 게 있다!”
쫓아 나가는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해?
했는데도 내 편이 되지 않으면?
그땐 정말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죽여야 해.
엘렌을, 죽여야…….
쫓아 나가던 길리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의 앞을 가로막기 위해 몸을 날리려던 보안들이 애매한 얼굴로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깨달았다.
“미쳤군. 미친 게 틀림없어…….”
그가 제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죽이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음이, 그때의 피습으로 그녀가 죽었어야 했다며 말했던 것이.
적어도 자신은 스스로 그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었음을, 그는 지금 비로소 깨달았다.
* * *
엘렌은 카라밀로의 문을 박차고 나섰다.
빠른 속도로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그대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그녀의 뒤를 따라 올라탄 시녀 제이시가 마차를 출발시키고는 물었다.
“피곤하십니까?”
“피곤하다기보다, 그냥…….”
엘렌은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려다, 이내 고개를 젓고 말했다.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맞아요.”
그러자 제이시가 조용히 날짜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그럴 일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며칠 안에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요.”
“빠르면 닷새.”
엘렌이 말하자 제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공작이 왔다 간 것을 알면 또 신경 쓰실 텐데……. 괜히 일만 만든 것 같네요.”
그러자 제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전하께서 그것을 원하셔서 그리하신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저를 보내셨을 리가 없지요.”
그녀는 아주 강한 확신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장담컨대 전하께서는 오늘의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실 겁니다.”
* * *
케이든이 박수를 짝짝 치며 외쳤다.
“좋아, 잘했군!”
그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받은 쪽지를 휙 던졌다.
“그러게 있을 때 잘했어야지. 굴러 들어온 기회도 놓친 멍청이가 어딜 날 상대하려 든단 말이야.”
들떠서 걸어가는 그를 모리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케이든은 다 익은 콩깍지인 양 슬쩍 입매를 벌리고는 말했다.
“아, 포트 후의 군대나 빨리 왔으면 좋겠군.”
“도착까지 닷새라고 하니 이제는 정말 금방이지요.”
모리스가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알아. 하지만 그냥, 군사가 없는 것이 신경이 쓰여서.”
케이든이 중앙에 멈춰 서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황군은 황성을 지키는 것으로도 벅차. 군사를 진작 더 늘렸어야 했는데.”
“세력 균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요. 이제부터 전하께서 늘려 가시면 됩니다.”
“그래야지.”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창가로 다가가 창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시야에 짝지어 돌아다니고 있는 병사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러지 못해 지금의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
그의 뒷모습이 퍽 안쓰러워, 모리스는 그에게 서툰 위로를 건넸다.
“그런 전하의 치세이니만큼 앞으로는 더욱 좋아질 겁니다. 너무 자책 마십시오.”
“그래. 일단은 당면한 과제를 무사히 해치우는 게 먼저겠지.”
케이든이 설핏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