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80화 (80/128)

<80화>

“이번 달 물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고?”

광산의 정기 보고를 듣던 크렘벨 공작이 물었다.

그의 의아한 목소리에 보고를 하던 남자가 바짝 굳어서 대답했다.

“예. 관리인의 말로는 부리는 인력 중 둘이 다쳤는데, 이것이 워낙에 보안을 요하는 일이다 보니 외부 인력을 구할 수가 없어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 진즉 보고를 하지 않았지?”

조용히 묻는 공작의 목소리에 제법 언짢음이 묻어 있었다.

남자는 그의 표정을 살짝 훔쳐보았다가, 찔끔해서 곧장 다시 얼굴을 땅에 처박고는 말했다.

“다른 인력들에게 일을 더 시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그러지 못했다는 보고입니다.”

“……그래?”

“미덥지 않으시면 직접 방문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실히 화약은 빼돌리면 돈이 되는 물건이니까요.”

“그러지. 네가 직접 다녀오도록.”

예상외로 별다른 문책 없이 넘어가는 것 같자, 남자는 얼른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지.”

공작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보고를 마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나갔다.

길리언은 의자에 몸을 깊이 누이며 턱 끝을 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근래 들어 무언가 일이 계속 하나씩 어긋나고 있었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우연이 겹치면, 그것에 무언가 알아차리지 못한 필연적 요소가 있는 법이었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의 감이 분명히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거지? 황제인가? 아니면 황태자? 그도 아니면 2황자?’

그는 여러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이 이상한 흐름의 시초로 올라가면, 그곳에는 도박장 사건이 있었다.

자신이 황실의 눈을 피해 자금을 끌어 모으던 창구.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알고도 눈을 감아 주었다.

결국 그는 자신을 내치기보다, 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그놀리아의 채권이 모두 휴짓조각이 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황제에게 있어서도 초강수였다. 황제는 아니야.’

그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황제는 막대한 비자금을 자신에게 넘겼다.

결과적으로 제게 남은 게 없다는 게 뼈아프긴 하지만, 결국 황제의 의중을 확인했으니 나쁘지 않은 값이었다.

그는 다시 제 턱 끝을 톡톡 두드렸다.

어쨌든 황제가 아니라면 이제는 황태자나 2황자를 고려해 봐야 할 일.

‘……2황자 쪽은 아니다. 만약 크레센트나 바로크가 내가 반역을 꾀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나를 지금껏 놔두었을 리가 없지.’

게다가 요즘 귀족파는 여러모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것만 해도 그랬다.

민심도 떠나갔고, 그렇다고 귀족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력은 근간부터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고 봐야 했는데, 그렇다면 양쪽 다 승기를 쥐고 있는 것은 황태자 측인 상황에서 이런 패를 그저 쥐고만 있다?

‘말도 안 되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라면 적어도 페리윙클이 몰락하기 전 이것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렇게 아예 판을 흙탕물로 만들고, 자신의 핵심 세력을 살려서 끌어안고 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지금 크라이언트에게 목을 매고 있다. 마치 그것만이 방법이라는 것처럼…….’

그는 제 책상 위에 놓인 루비가 박힌 문진을 집어 들었다.

본디 페리윙클은 광맥으로 나름 큰 부를 축적하고 거기서 파생된 권력을 쥐고 있던 가문이다.

그런데 크레센트는 그런 페리윙클을 잘라 내고, 확실하지도 않은 크라이언트 포섭에 수를 걸었다.

지금 그에게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 때고, 그러니 크라이언트를 건지는 것만이 확실한 타개책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확실히 크라이언트와 붙고 나서 민심이 눈에 띄게 황태자를 향해 기울었으니.’

그뿐인가.

크라이언트는 그 스스로도 완벽한 화수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만약 황태자의 측근인 크렘벨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 나올 수가 없는 결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정보가 새었다는 전제하에,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은 황태자라는 소리가 되는데.’

그는 제 앞에 놓인 종이에 이것저것 쓱쓱 메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본래의 계획과는 반대로, 황태자를 먼저 처리해야만 하는 상황.

‘계획대로만 진행됐다면 2황자는 황태자가 알아서 처형대로 안내했을 것이고, 그 세력을 모두 내가 흡수해 황태자의 뒤를 치면 됐을 일이지만…….’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당초 준비 예정이었던 장기전을 이끌어 갈 여력이 안 된다.

‘단기에 황성을 함락하고, 수도를 장악하는 것까지. 그게 마지노선인가.’

길리언은 펜 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될 경우 확실히 황가의 일원을 모두 죽여야 하고, 지방 영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도록 그 세력을 규합할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다른 수단이라……. 까다롭군.’

본래대로만 되었다면 2황자의 세력이 자신을 지지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을 지지해 줄 제3의 세력이 필요했다.

‘국내에서는 확실히 찾기 어렵겠지. 그러면 결국 외국뿐인가.’

그는 집무실 옆에 걸려 있는 커다란 세계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정복 전쟁이 활발한 트리발로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손해를 떠안긴 나라이지만, 지금은 그만한 나라를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사람 인생은 모르는 일이라더니. 트리발로스에 사람을 보내야겠군.’

그는 적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일단 황태자가 자신의 반역을 알아챘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했다.

먼저 2황자와 손을 잡은 뒤, 그들과 작당해 황태자를 친다.

그 후에 믿을 만한 강력한 세력, 그러니까 트리발로스를 배경 삼아 2황자를 존속 살해로 고발, 처형대에 세운다.

‘그러려면 일단 황태자의 세력을 흔들어 놓고, 이후 적당한 명분을 세워 내전을 일으켜 황성을 함락하는 게 좋겠지.’

그는 차근차근 계획을 정리했다.

‘그러면 크라이언트는―’

황태자의 측근으로서 죽게 될까.

움직이려 자리에서 일어났던 그는 그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제자리에서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제길.”

그는 얼마 전 카라밀로에서 보았던 엘렌의 낯을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대화가 안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신으로서도 무얼 어쩐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도 마냥 싫다고 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대체 무엇을 더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더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견딜 수 없었던 길리언은 괜히 주먹으로 책상을 쾅, 쳤다.

하지만 그가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되찾아 와야 한다고 속삭이는 자신의 머릿속이었다.

“무언가 수를 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는 허리를 숙여 책상을 짚은 두 팔로 자신을 지탱하며 생각했다.

돈으로는 안 돼. 무언가 더 그녀를 끌어당길 만한 것.

나한테 그런 게 뭐가 있었더라…….

그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여러 가지 수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다, 문득 뇌리를 스친 한 가지 방법에 저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히비스커스!”

그는 서둘러 책장으로 다가갔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보고서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본디 크라이언트는 합리적인 이들.

자신의 득실을 계산해 거래를 나눌 줄 아는 그들은 저희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안이 제시된다면 분명 승낙할 것이었다.

‘지금은 여러모로 쌓여 있던 불만 탓에 대화를 거부하고 있지만, 이거라면…….’

사실 그녀의 태도를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로서도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아니라면 곤란했다.

이번에도 안 된다면 저는 영영 그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로서도 슬슬 깨달아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래서는 절대 얻을 수 없을 거예요.”

수잔이 베니빈을 첨가한 커피가 든 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나러 다녀오신 잘생긴 남자는 어찌 되었냐며 호기심을 표하던 그녀는, 딱히 아무 일도 없었다며 웃는 엘렌에게 말했다.

“아니, 그 잘생긴 얼굴로 적극적으로 밀어붙여도 봐줄까 말까 한 게 사장님인데!”

그녀는 어째서인지 제가 더 적극적이 되어서는 말했다.

“겨우 그 정도로 사장님께 관심을 표한다고 생각하다니. 그 사람은 분명 후회할 거예요. 그렇죠?”

그녀는 엘렌의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느닷없이 날려 온 호위, 제이시는 잠시 고민했다.

[아델 양. 갑작스럽겠지만 잘 들어. 영애의 주변으로 누구도 접근해서는 안 돼, 알겠지? 그대의 임무가 막중해.]

황태자가 제게 신신당부하던 모습을 떠올린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한 사람은 껄껄 웃고 있을 게 분명한데.

제이시가 고민하고 있자, 그녀가 대답하기를 곤란해한다고 생각한 엘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려나.”

“네! 물론 사장님의 전남편분도 포함해서요.”

그녀는 자연스레 마린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건 제 생각이긴 하지만, 전남편분은 지금도 충분히 후회로 배가 아파 바닥을 구르고 있을걸요.”

“그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그랬으면 속은 시원하겠어.”

엘렌이 엷게 웃었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린이 곁에 다가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사장님.”

“응? 말하게.”

“아페타라는 곳에서, 사장님께 협업 제안을 해 왔습니다.”

그 이름을 들은 엘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페타? 처음 듣는 이름인데. 뭐 하는 곳이지?”

“자체 교배로 개발한 히비스커스로 메뉴 개발에서의 협업을 요청, 이후 유통과 판매는 크라이언트 독점으로 진행하고 싶다고 합니다.”

“히비스커스로 무슨 메뉴 개발이 필요하지?”

엘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카라밀로에서 컬래버 메뉴를 내놓는다든지, 그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카라밀로 유행이 제법 구미가 당겼나 보군.”

그나저나 히비스커스라.

엘렌은 자신이 크렘벨 공작 부인으로 있던 시절, 크렘벨령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 시도했던 사업을 떠올렸다.

원예 농가 중 몇 군데를 선정해 약간의 지원금과 함께 온실을 설치해 준 뒤 쓸 만한 종을 개발하도록 했던 일이었다.

저택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은 안 되지만, 그걸 상품화해서 판매하는 것은 허락을 해 주었기에 추진했던 일이었다.

‘보아하니 소규모 회사 같은데…….’

기껏 판을 다 깔고 나와 주었는데 그것마저 결국 다른 회사에게 추월당하다니.

크렘벨에 대한 반감과 별개로 드는 농가에 대한 안타까움에 엘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조만간 미팅을 잡아 보도록 하지.”

“네. 이후 일정 확정되면 보고해 드리겠습니다.”

마린이 메모를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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