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자, 그럼 도장 찍으세요-79화 (79/128)

<79화>

“뭐?”

아들 리암이 가져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오세먼 부인이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 퀴니시에서는 아직 여기까지 나온 상선이 없다고……!”

“크라이언트의 배가 직접 수입해 왔대요. 퀴니시의 상선은 아니죠!”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러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고,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말씀드렸었잖아요!”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무슨 말인들 못 하니!”

그녀도 씩씩대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도 발맞춰서 최대한 빨리 내놓는 수밖에.”

그녀는 당황했지만, 원래 세상일이 생각한 대로만 흘러가진 않는다는 것은 이미 살면서 익히 배운 바 있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홍보비를 아낀다고 생각하자꾸나. 정말 흥행할 상품이라면 우리 것도 충분히 잘 팔릴 거란다. 손해는 안 볼 게야.”

“크라이언트는 늦어도 다음 주쯤, 살롱을 통해 공급할 예정이라고 했어요. 음료와 열매, 그리고 간단한 레시피까지 같이요.”

“그래? 빠르구나. 그러면 조만간 개업할 살롱에 우리도 음료를 함께 내놓아야겠어.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메뉴 개발은 크라이언트에게 시키고 우리는 아예 베끼기 전략으로 가자꾸나.”

그녀는 빠르게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전략을 수정했다.

그러나 리암은 그녀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우린 늦었어. 어쩔 수 없단다.”

“그 여자가 아주 보란 듯이 뭐라고 했는지도 모르고 어머니는……!”

리암이 분한 듯 외치는 말에, 오세먼 부인은 그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리암.”

“…….”

“잘 기억했다가, 다음에 갚아 주면 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녀의 당부에, 리암은 제 어머니 또한 호구라서 그저 당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납득하고는 대답했다.

“……예.”

“그래. 잘했다.”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어머니.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혹시 우리 품목에 베니빈이란 것도 있어요?”

“……그건 왜 묻니? 설마 그것도 크라이언트가 갖고 있었니?”

“네. 이미 메뉴까지 모두 연구되어 있었어요. 심지어 맛있었고요.”

그의 대답을 들은 오세먼 부인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 안 돼.”

“어머니?”

리암의 부름에 그녀가 넋을 놓은 듯 말했다.

“우리 배는…… 이미 출항했단다.”

“그런……!”

무려 가문의 상선 일곱 척이었다.

안 될 시장에 그것들이 전부 묶였다간 손해가 막심할 터였다.

게다가 그 배가 들여올 상품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크라이언트의 물량이 충분하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크라이언트의 이름에 밀려 그들은 계속 아류의 취급이나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나. 모 아니면 도야. 주도권을 완전히 뺏어 오든지, 양쪽 다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시장 자체의 규모를 키우든지.”

“시장 규모를 키우고 싶어도 지금은…….”

“나도 알아!”

오세먼 부인이 빽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귀족 상대의 장사야. 키넛과 베니빈을 떠올렸을 때, 누구의 이름과 함께하느냐는 결국 노출도가 결정하는 법이지.”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맛도 중요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살아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손해를 보지 않는 거야. 원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지겠지만, 최대한 원금은 보전하는 방향으로 가는 수밖에.”

* * *

미식회에서 황궁으로 복귀한 클라우디스는 곧장 크레센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전하.”

“아, 왔나? 오늘은 어땠지?”

담배 연기가 뻑뻑 피어오르는 책상 앞으로, 클라우디스는 성큼성큼 다가가 제가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그보다 먼저 이것을.”

“뭐야?”

제 눈앞에 놓인 쪽지를 받아 든 크레센트는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가, 곧 엄지와 검지 사이에 쪽지를 끼워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그것참 부러운 일이네. 그런데 이게 왜. 어쩌라는 거지?”

“크라이언트 영애가 제게 혼자서 보라며 쥐여 주고 간 것입니다.”

“크라이언트 영애가? 너한테?”

“예.”

클라우디스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 쪽지와 함께 말하길, 제물은 필요하다고.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리라 믿는다고 했습니다.”

“제물이라.”

크레센트는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종이를 한번 다시 펼쳐 보고는 피식 웃었다.

“괜찮은 겁니까? 저로서는 일을 판단할 수 없어 곧장 전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래. 잘했다.”

크레센트가 건성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혀를 쯧, 한번 차더니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아깝군. 내가 이런 걸 갖고 있었다면 절대 들키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일입니까?”

“그래. 우리 말고 이런 걸 운영할 만한 미친놈이 어디에 있는지 그게 제일 궁금하군, 지금은.”

크레센트가 킬킬 웃었다.

“일단 네가 잘하고 있는 듯하니, 앞으로도 크라이언트는 네게 맡기지. 영지도 있으니 완전히 회유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다만, 그래도 일단 네게는 이런 기밀 정보까지 넘길 만큼 친분, 혹은 호의가 있다는 거니까.”

친분, 호의.

그 말에 클라우디스의 의식 중으로 애써 머릿속 한구석에 밀어 넣어 두었던 생각들이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경멸, 호의, 체념, 존경…….

그러다 제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번져 가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곧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예. 이대로 부담 주지 않고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 가능성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는 뭐 켕길 것도 없겠다, 이 반역도의 색출에 발 빠르게 참여해 보도록 하지. 관계없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증명해 보자고.”

크레센트는 새 담배의 끝을 툭, 잘라 내며 말했다.

“관련 없다고 그냥 정말 가만히만 있으면 어떻게 덤터기를 맞을지 모를 일이니 말이야.”

* * *

무엇이든, 소문이 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래서 대체 크라이언트의 키넛이 뭐야?

몰라. 번번이 순서를 놓쳐서 나도 아직 못 먹어 봤다고.

오세먼이 키넛을 판다던데.

그게, 그걸 가지고는 크라이언트 같은 맛이 안 난다더라고. 그냥 맹숭맹숭하기만 하다던데.

왜지? 다른 열매인가?

나도 실물이나 한번 구경은 해 봐야 될 텐데.

그리고 그 사이에서 케이든은 선물받은 키넛과 베니빈을 가지고 일부러 보란 듯이 제 측근들과 오찬을 가졌다.

케이든으로서는 날 봐라, 나는 크라이언트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사방에 광고하는 행동이었지만, 애초에 황가에 먼저 진상된 것들이 있었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그것이 황실의 물건인지 케이든 개인의 물건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그 수혜자가 된 체셔가 남매는 이 새로운 향신료에 대한 극호평을 하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키웠고, 그중 몇몇은 물건을 구하는 데 성공한 하위 귀족들이 상납한 것으로 유행을 따라갔다.

물론 그 이야기는 다시 사방으로 퍼져 나가, 종래에는 수도뿐만이 아닌 지방 영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 한 번 정도는 꼭 먹어 보아야 할 음식이 되었다.

크라이언트의 살롱인 카라밀로는 재입고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언제나 성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달리 말하면 그곳에서 물건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차선책으로 오세먼으로 발길을 많이 돌린다는 뜻이 되었다.

노출을 올리기로 한 그들의 전략은 처음에는 빛을 발하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레시피가 정착되지 않은 채 무작정 팔아 치운 것들은, 급기야는 크라이언트가 파는 것과는 애초에 다른 물건인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크라이언트가 수입해 두었던 물건들을 충분한 양으로 풀기 시작하며 대체제로서 오세먼을 찾는 이들은 사라졌고, 그렇게 그들의 향신료 사업은 막대한 손해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이건…… 이건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진정하게.”

“어떻게 사람 된 도리로 이리한단 말입니까!”

“그러게나 말일세.”

“당장 목을 치셔야 합니다, 폐하!”

“그래, 그래. 그러잖아도 그럴까 생각 중이네.”

황제의 앞에서 당장 그 귀청을 떨어뜨릴 기세로 소리를 치는 이 남자의 이름은 세드릭 포트.

트라이아와 바로크를 아주 꼴 보기 싫어하며, 기회주의자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헤이젤 또한 싫어하는 남자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그 목록에는 크렘벨이라는 이름도 추가되었다.

“저처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것이 측은해 보살펴 주었더니…….”

“일이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쩌겠나. 크렘벨을 걷어 내고도 우리가 타격을 입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지.”

이야기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올라왔던 헤지스는 눈앞에 놓인 키넛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물었다.

“자네, 무언가 좋은 생각 없나?”

그 질문에 계속 시끄럽게 열을 내던 포트 후가 조용해졌다.

“…….”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가 꺼낸 말은 단순했다.

“……처형과 재산 몰수. 핏줄이니 더욱 엄격히 하셔야 합니다, 폐하.”

헤지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단 표는 채워야지. 우선 이 음모를 밝히는 데 기여한 공신들의 승작을 명할 생각인데. 어떤가?”

“공신이라 하심은?”

“아발란쉬와 크라이언트라네.”

그의 말에 포트 후작의 눈이 뎅그렇게 커졌다.

“크라이언트라면 크렘벨 부인 아닙니까. 설마 애초에 내부의 고발에서 시작된 조사였던 겁니까?”

“그래. 사실 조사 자체를 시작한 지는 꽤 됐다네.”

헤지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괜한 반격의 기회를 주어선 안 돼. 한 번에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폐하.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출두 명령처럼 온건한 방법은 쓰시면 안 됩니다.”

포트 후작이 말했다.

“군사를 보내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단번에 포박해야 합니다. 탈출이라도 했다간 여러모로 피곤해질 테니까요.”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네. 그러니 지금 자네와 이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그 말에 포트 후작이 물었다.

“제게 맡겨 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아니면 내가 누구의 군사를 믿겠나.”

헤지스가 깊게 침잠한 눈으로 말했다.

“그대의 군사를 은밀히 불러들여 주게. 그들이 도착하면…… 크렘벨을 치우도록 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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