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엘렌은 당혹스러웠다.
가만히 두었어도 그녀의 안배에 따라 침몰하게 되었을 가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개입해서 제 손으로 처리를 했단 말이지…….’
그녀는 제 목덜미의 솜털이 예민하게 오소소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날 회유하기 위한, 아니 정확히는 제 위치를 과시하기 위한 선물로 전락시킨 거야. 정말 기가 막힌 꽃다발이군.’
엘렌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전에는 제대로 황위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빠르게 죽어 버렸기에 몰랐다.
그런데 이 정도였을 줄이야.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신이 들쑤시고 다닌 탓에 이런 성향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모양이었다.
크레센트가 칭찬받기를 원하는 기색으로 은근히 그녀에게 물어 왔다.
“어떤가? 제법 좋은 선물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잘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야 이 복수는 제 것이 아니게 되었군요.”
“아, 영애는 그런 성격이었나?”
그는 웃음기 서린 얼굴로 두 손을 위로 들더니 다리를 꼬며 뒤로 기대어 앉았다.
“내가 성급했군. 나는 영애의 복수를 망치려 든 게 아니야. 그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을 건드리면 어찌되는지, 내 손수 가르쳐 주려고 했을 뿐이지.”
크레센트는 페리윙클 부자가 끌려 나간 곳을 턱으로 까딱 가리켰다.
“그래도 제법 유쾌하지 않나? 오늘은 나를 보아서라도 이 결과를 즐겨 주었으면 좋겠어. 물론 아발란쉬 영애도 말이야.”
그의 시선이 제게 닿자, 메이는 주먹을 쥐어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그 손에 눈길이 미친 엘렌이 입술을 열었다.
“덕분에 오늘은 좋은 구경을 하고 가는군요. 관람료는 다음에 제대로 값을 치러서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크레센트가 발끝을 까딱이며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사실, 영애만 나와 함께한다면 관람료 같은 건 치르지 않아도 좋으니까. 난 인재에게는 온후하거든.”
“퍽 솔깃한 말씀이군요. 새겨듣겠습니다.”
메이는 태연히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감탄하다 못해 질린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밀어붙이는 크레센트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 지어 보이는 엘렌이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저를 아득히 뛰어넘은 다른 세상의 이들 같았다.
‘사람들 간의 눈치 싸움이나 노골적 멸시에는 익숙했지만…….’
하지만 이렇게 살 떨리는 두려움이라니.
자신이 앞으로 끼어들어 가야 할 세계는 아마도 이런 곳일 거라고, 메이는 생각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 * *
기다란 황궁 복도를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멀리에서부터 들려왔다.
우당탕 큰 소리가 울리며 집무실 문이 쾅, 열렸다.
“전하!”
들어온 것은 체셔 경 테리어드였다.
문을 열어젖힌 그는 제 팔 사이에 끼고 있던 서류 뭉치를 꺼내 들며 외쳤다.
“찾았, 찾았답니다!”
테리어드를 시큰둥하게 쳐다본 케이든이 물었다.
“뭘?”
“화약이요!”
의자 등받이에 기대 늘어져 있던 케이든의 등이 순식간에 바짝 세워졌다.
테리어드가 빠른 걸음으로 그가 앉아 있는 책상을 향해 다가왔다.
“처음 생각했던 곳이 아니었답니다. 두 번째 후보지에서 잠입에 성공해 그곳에서 제대로 된 증거물을 찾았다더군요.”
“보고가 늦는다 싶더니 이유가 있었군.”
케이든이 손을 내밀자, 테리어드는 제가 들고 있던 것을 그에게 건넸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확인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
보고서를 받아 든 케이든은 그것을 곧장 펼쳐 들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종이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관리인? 아, 화약도 찾았군.”
휙휙 보고서를 넘기던 그가 중얼거렸다.
“예. 관리인 한 명을 사로잡아, 그가 크렘벨에게서 명령을 받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 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제조된 화약도 입수했습니다.”
“좋아. 하나가 잡혔으니 나머지를 찾는 것은 훨씬 빠르겠지.”
마지막 장까지 훑어본 케이든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닫으며 말했다.
“사실 더 찾을 필요도 없지. 이것만으로도 반역이다.”
“그러면……?”
테리어드가 조심스레 묻자, 케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길리언 크렘벨은 이제 끝이라는 소리지.”
* * *
크라이언트 산하 주얼리 숍 3층, 아무 명패도 없는 사무실.
그곳에서 수북이 쌓인 편지들을 분류해 기록하고 있던 수잔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
“왜 그러지?”
그 옆에 함께 앉아 그녀가 작성한 기록들을 보던 엘렌이 묻자, 그녀는 제가 들고 있던 편지 한 장을 들어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대체 이 수많은 편지로 무엇을 하시려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쓸데없어 보이는 작업에서 저도 보람이란 걸 얻고 싶어서요.”
“수잔.”
조금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는 수잔의 물음에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마린이 그녀를 슬쩍 흘겨보았다.
“오, 마린. 이 정도는 봐줘요. 솔직히 마린도 궁금하잖아요.”
그러자 그녀도 부정은 못 하겠는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우리가 보통 돈을 쥐었나요? 사장님 성격에 그걸 가만히 두실 리가 없는데, 지금은 명확한 타깃 없이 정보만 계속 수집 중이잖아요.”
엘렌은 나지막이 웃고는 말했다.
“별거 아니네. 그저 정보망을 만들어 놓고도 써먹지 못하면 아까워서 그렇지.”
“그러니까요. 어떤 소식을 찾고 계신 건가요? 또 저번처럼 재밌는 일을 계획하고 계신 거죠?”
엘렌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수잔은 허공을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담. 또 무언가 큰 건이 있으신 건 맞는 것 같은데.”
“곧 알게 될 테니 너무 조바심 내지 말게.”
엘렌은 쿡쿡 웃고는 읽고 있던 부분에 펜으로 밑줄을 쫙 그으며 말했다.
“마린. 이건 확실한 이야기겠지?”
마린은 그녀가 가리킨 것을 보더니 대답했다.
“아, 트리발로스에서 오는 저희 상선들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프란체 항으로는 입항했고, 별문제가 없다면 내일, 늦어도 모레까지는 템트 항으로 올 겁니다.”
“실어서 오는 품목은 체크했었나?”
“예. 모두 직접 하셨습니다. 주된 품목은 향신료였습니다만, 필요하시면 당시 보셨던 자료를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엘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때 어련히 잘해 놨겠지.”
그녀는 흘끗 시계를 보고는 읽고 있던 것을 덮었다.
“당분간은 항구 쪽 정보들을 우선적으로 취급해 줘. 그럼 나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지.”
“예. 사장님.”
그때, 수잔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머. 사장님, 혹시 데이트 가시나요?”
“응?”
그녀의 눈빛에 엘렌이 제 차림을 한차례 훑었다.
평소 사무실에 올 때와 달리 화려했던 탓에 그리 짐작한 모양이었다.
엘렌은 조금 애매한 듯 으음, 하는 신음을 한번 흘리고는 말했다.
“데이트라기엔 어폐가 있지. 비즈니스를 위한 사교 정도가 정확한 표현일까.”
“남성분은 맞는 거군요? 세상에.”
수잔이 펜을 든 채로 짝, 박수를 쳤다.
“분명 잘생겼겠지요? 지금 사장님을 만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면 최소한 그 정도는 갖춰야 해요.”
“잘생겼다라……. 확실히 제법 출중한 편이긴 하지.”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잔이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사장님, 하지만 얼굴만 보고 넘어가시면 안 돼요?”
“그거야 잘 알지. 잘난 얼굴에 넘어갔다가 이혼한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엘렌이 피식 웃으며 답하자, 마린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수잔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깔깔 웃었다.
“세상에, 그랬죠! 내가 누굴 걱정한 거람?”
수잔이 요란하게 웃어 젖히고는 말했다.
“다녀오신 곳의 디저트가 맛있으면 저희 탕비실에도 좀 들여 주세요!”
“굳이 그럴 게 있나. 앞으로는 VIP용으로 들이는 카라밀로의 디저트 주문량을 늘려 이쪽으로도 올리라고 하지.”
“오, 사장님이 최고예요!”
그녀의 유쾌한 배웅에, 엘렌은 처음보다 훨씬 가벼워진 기분으로 정보실을 나갔다.
* * *
어떤 사람이든, 고독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었는데.’
클라우디스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웬만한 자리가 아니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다는 여인 아닌가.
그런데 조금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정도로 자신은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까지 갖게 될 줄이야.
‘제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본인이 힘들 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생각을 이어 가던 그는 문득 치고 들어오는 씁쓸함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알면서도 한번 이용해 보겠다고 이러고 있는 나도 정말 인간 말종이로군.’
기사가 돼서 미인계나 쓰고 있는 꼴이라니.
클라우디스는 제게 드는 경멸감에 쯧,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가문을 저버리지 않는 이상, 어차피 자신은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음을.
클라우디스는 저에 대한 환멸과 체념을 동시에 느끼며 문을 열었다.
딸랑―.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다가와 이름을 확인하고는 그를 안쪽의 룸으로 안내했다.
안내된 곳에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엘렌 크라이언트가 있었다.
“오셨군요. 앉으세요.”
엘렌이 제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영애.”
“덕분에요. 답답한 체증이라도 내려간 것처럼 잘 지냈지요.”
엘렌이 웃으며 답하는 말에 클라우디스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입니다. 갑작스레 닥친 일이라 당황하시지 않았을까 걱정되었었는데, 제 기우였군요.”
“후후.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렌이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음료는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차? 커피? 주스?”
“음. 차가 좋겠습니다.”
“레몬과 함께 우려낸 홍차로 괜찮으신가요? 조금 더 달콤하게 망고와 오렌지가 첨가된 종류도 있답니다. 클래식한 얼그레이도 괜찮고요.”
그녀의 말에 클라우디스는 조금 고민하다 대답했다.
“레몬티가 좋겠습니다.”
“들었나? 그렇게 부탁하지.”
엘렌이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들이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조용한 가운데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라우디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