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이제 둘째들은 방계로서 작위를 노리기보다 힘 있는 혼처를 노리는 게 더 유리하게 됐어요.”
여인들이 모이는 살롱, 그곳에서는 이번 여성 후계의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게요. 지금은 아발란쉬 외에는 확실한 가문이 없죠?”
“난 솔직히 크라이언트도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부인께서는 어찌 생각하세요?”
“전 조금 회의적이에요. 영애가 그만큼 뛰어난 것은 맞는데, 굳이 동생의 자리를 빼앗으려 할까요?”
“하기야. 이번에 사고 대처만 봐도…….”
그들은 이번에 엘렌이 엘시어의 일에 대해 어찌 나섰는지를 보았기에, 저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아들을 가진 그들은 앞으로 아이들의 혼처를 어떻게 구할지를 진지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충분히 좋은 혼처예요.”
“그건 그래요. 요즘에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기야, 둘 다 제 짝은 스스로 고를 것 같은 느낌이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둘 다 저를 지탱해 줄 만한 배우자를 고를 것 같지 않나요? 그러려면 결국 중매 아니겠어요.”
그때, 시종에게 계속 시간을 묻던 여인이 말했다.
“어머, 시간이 됐어요. 잘하고 와야 할 텐데.”
“무슨 시간 말씀이신가요?”
“아발란쉬 영애가 오늘 관람한다던 오페라 시간 말이에요. 제 아들을 보내 놓았거든요.”
여인은 그리 말하며 두 손을 꼭 쥐었다.
* * *
오페라 극장을 향하는 마차 안.
“배움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건 기본이고, 그 위에 얹어야 하는 것은 입지예요.”
엘렌은 맞은편에 앉은 메이 소르본에게 말했다.
“입지요?”
“일단 돌아다니면서 얼굴을 팔고 다니라는 이야기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애는 지금 여인들의 사교계에도, 그렇다고 남성들의 클럽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상태예요. 내가 그러하듯.”
“영애께서도 그러셨나요?”
“물론이죠. 듣자 하니 아발란쉬 영애께서도 아카데미에서 어느 정도 겪어 보셨을 듯한데.”
“…….”
“사회 속에서의 자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생겨요. 그러니 수도를 활개 치고 다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영애의 있을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죠.”
“네. 이해했어요.”
“오늘 내가 맡은 건 그런 역할이랍니다.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영애를 후계자로 인정함으로써 득을 얻을 사람들을 찾아 어울려야 해요.”
엘렌은 등에 힘을 주어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메이를 보고는 대견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오페라 구경은 얼마나 자주 갔나요?”
“사실 저는 문화에는 그리 관심이 깊지 않아요. 과제로 보아야 했던 것 몇 개 정도 외에는…….”
메이가 민망했는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하자, 엘렌은 웃는 낯이지만 단호히 말했다.
“오, 이제부터는 관심을 두셔야 해요.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많이 아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네.”
“자신 없다고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도 말고요. 아직 학생인 영애에게 내가 어렵게 느껴질 것은 알지만, 앞으로 영애는 그런 이들을 상대해야 해요.”
“네. 새겨들을게요.”
“좋아요. 그래도 지금은 긴장 풀고 있도록 해요.”
엘렌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영애에게 다가올 이들은, 내 장담하건대 영애의 눈에 들지 못해 안달을 떨 테니까요.”
* * *
박스석으로 들어가는 길목.
마찬가지로 오페라를 보러 온 듯한 남성이 메이에게 부딪쳐 왔다.
“앗!”
왼손이 부자유했던 메이는 가벼운 외출용 드레스 차림임에도, 쉽게 균형을 잃었다.
그러자 그녀에게 부딪쳐 온 남성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마치 그 자리에 엘렌은 없는 듯, 남성은 그녀에게만 집중하며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메이가 재빨리 다시 균형을 잡으며 인사하자, 남자는 사과를 건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물었다.
“전 브랜 하워드라고 합니다. 아름다우신 영애의 성함이 무엇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네?”
“그냥 보내기엔 걱정이 되어서 그럽니다.”
“아, 하워드가의?”
“예. 영애께서는…… 아, 크라이언트 영애?”
그는 옆에 자리한 엘렌을 이제야 발견한 척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크라이언트 영애와 함께 계시다니. 혹 아발란쉬 영애십니까?”
그런 남자의 모습을 한발 물러서 지켜보고 있는 엘렌은 기가 차서 그만 웃고 말았다.
“네. 그나저나 곧 오페라가 시작하겠어요. 음, 그러니까…… 하워드 경?”
메이는 아직도 잡혀 있는 제 손을 눈짓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는 난처한 웃음과 함께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저는 기사 작위를 받지 않아서…….”
“아, 하워드 영식.”
“그냥 브랜으로도 괜찮습니다.”
“네. 어쨌든 전 정말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메이는 그리 말하고는 엘렌의 손을 잡고 그를 지나쳐 오페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복도를 꺾어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세상에. 안달일 거라던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뭐, 그렇죠.”
엘렌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무려 계승권자잖아요.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예요.”
“오, 끔찍해라.”
메이는 몸서리를 쳤다.
“전 제대로 자신이 노력해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싫어요.”
“그건 나도 그래요. 하지만 그런 영애의 기준을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니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어째서죠? 그것이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는 깔끔한 방법 아닌가요?”
메이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엘렌은 음, 하는 낮은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영애는 기사가 되고 싶으셨다더니 확실히 그렇네요. 하기야, 가주의 직은 언감생심 먼 얘기였을 테니까요.”
“네? 네.”
“사람이 엮이고 정치가 되면 마냥 깔끔하게 잘라 내기만 해서는 안 돼요. 적당히 질질 끌 줄도 알고, 그걸 이용해서 판을 흔들고 패를 당길 줄도 알아야 해요.”
“아……?”
메이는 머리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어딘가 마음에 와닿는 소리는 아니었는지 동시에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엘렌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런 것은 차차 후작께서 가르쳐 주시겠지요. 일단 오늘은 알고만 있어요. 나쁜 대처는 아니었어요. 잃을 건 없지만 얻을 것도 없는 대처였다, 그 정도로만.”
“아, 네!”
예약해 둔 좌석에 다다른 두 사람은 박스의 커튼을 걷어 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대체 저 텅텅 빈 박스석들은 뭐란 말이오?”
“자리 구하기 어려웠던 이유가 이것이었나요?”
“죄송합니다. 이미 예약 후 대금 지불이 완료된 좌석들이라…….”
“허, 참.”
소란스러운 소리에 슬쩍 밖을 내다보았더니, 그들이 앉은 자리 전후좌우로 모든 박스들이 비어 있는 것이었다.
“……이게 대체?”
처음 겪어 보는 일에 엘렌이 어리둥절해 있자, 메이도 나와서 보더니 말했다.
“……이래서 제가 속하는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셨던 거군요.”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사람이 없어요, 크라이언트 영애.
메이 아발란쉬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앞으로도 크라이언트에 관한 일은 바로바로 보고를 올리도록.”
케이든이 갈까마귀의 보고를 듣고는 만족스레 웃으며 말했다.
“플란넬이고 크렘벨이고, 다신 접근할 수 없도록 아주 확실히 차단하려니까.”
그것을 보고 있던 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우리가 혼약자 사이라는 것을 영애가 밝혀 주면 좋을 텐데, 그러길 바라지 않잖아.”
그는 룰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보이지 않게 잘 지켜 내는 수밖에.”
* * *
“은근한 방해가 짜증 나는군.”
크레센트의 명령을 받고 엘렌을 만나기 위해 나와 있던 클라우디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크라이언트 영애가 아발란쉬 영애와 함께 오페라 극장에 간다는 소식이 동네방네 퍼졌다.
보나마나 이런저런 끄나풀들이 붙을 것이 뻔했기에, 그곳에서 적당히 다른 이들을 견제하며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건만.
‘무대에 오른 지도 꽤 된 오페라인데, 자리가 없다니.’
생각지도 못하게 표를 구하지 못한다는 상황에 부딪친 그는 오페라 극장 밖 마차에 앉아서, 짜증 섞인 손짓과 함께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길 한참.
저 멀리 입구에서 익숙한 인영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라이언트 영애.”
“아, 바로크 경.”
엘렌이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께서도 오페라를 관람하고 가시는 건가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클라우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저를요?”
그녀가 어리둥절히 묻자 메이가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메이의 물음에 클라우디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편하신 대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엘렌의 말에 클라우디스가 말했다.
“페리윙클 영식의 반역죄에 관한 재판입니다.”
* * *
“아, 크라이언트 영애. 왔군.”
재판장,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크레센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아발란쉬 영애도 함께로군. 다들 앉지.”
크레센트는 제 옆을 툭툭, 두드렸다.
엘렌은 그가 지정해 준 자리로 가 앉아 물었다.
“전하. 외람되오나 갑자기 오늘 이 재판은 대체…….”
“저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야. 살면서 저희가 이런 곳에 서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나.”
크레센트가 제대로 대답을 않고 그녀의 말을 끊어 내자, 엘렌은 다시 한번 물었다.
“전하. 그런데 영식의 재판이 귀족 암살 미수가 아니라 반역죄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소리인지요?”
“감히 폐하께서 직접 승인하신 법의 효력을 부정하지 않았나.”
크레센트는 태연히 말했다.
“폐하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도전한다? 그것은 명실상부한 반역의 의사를 내비친 것이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메이는 소름이 올라온 팔을 쓰다듬었다.
“……그런고로 주동자인 밀러 페리윙클에게는 사형을 선고하며, 페리윙클가의 작위를 박탈,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
땅땅.
“전하아아―!”
선고를 들은 페리윙클 백작이 자리에서 튀어나오며 크레센트를 향해 다가오려 했지만, 그것은 곧 그의 기사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도와주신다고, 마지막 기회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하아아―!”
결박된 채 끌려들어 가는 밀러 페리윙클은 공포로 울부짖으며 몸부림치고 있었고, 절망에 빠진 페리윙클 백작은 크레센트를 향해 달려들다 머리부터 아래로 처박히고 말았다.
“크헉―!”
그걸 보던 크레센트는 아마 파티장에서 보았다면 분명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어때. 만족스러운 그림인가, 영애?”